184화
"뭐지?"
"잠깐만. 아시아에서 플레이어가 입장한 지 이제 고작 몇 시간밖에 안 됐잖아. 그것도 고작 한 명인데…."
몇몇 플레이어들이 상태창에 떠 있는 숫자를 보며 기겁했다.
조금 전 0%에 불과했던 아시아의 개척률이 어느새 0.5를 넘어섰다.
말도 안 되는 속도다.
심지어 고작 한 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이대로라면 오늘 하루 만에 1%를 달성할지도 몰라."
"그게 말이 돼? 하루 만에 어떻게 1%의 개척률을 달성한다는 말이야! 고작 한 명이서…!"
"나라고 그 이유를 알 수 있겠냐마는… 숫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걸…."
사실이다.
실제로 미대륙의 플레이어들이 어비스에 진입했을 때 첫걸음을 내디딘 플레이어들의 숫자는 100명을 넘었고.
그들이 1%의 개척률을 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주일에 가까웠다.
처음 며칠은 도대체 개척률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가시키는지 알 수 없었기에 시간이 지체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개척률을 증가시키는 법을 알게 된 순간에는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주변의 모든 것을 샅샅이 탐구해야만 했다.
어떤 풀인지, 나무인지, 어떤 동물인지.
직접 살펴야만 개척률이 증가했다.
그리고 결국 편법을 하나 알아냈다.
어비스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어비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면 개척률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미 지구의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 어비스에 거주하고 있던 이들은, 나름대로 그들이 살고 있는 어비스에 대해서 파악해 놓은 상태였으니.
그들의 정보를 입수하면 자연스레 개척률이 증가했다.
그리고 결국.
'결국 숫자 싸움.'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어비스로 진입하면서, 개척률은 빠르게 증가했다.
직접 탐구하기도 했으며, 어비스의 원주민들과 관계를 맺으며 어비스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어느새 30%가 넘는 개척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물론 그 30%라는 것도 정말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수치였다.
30%를 기점으로 다시 한번 개척률의 진척 속도가 늦어지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된 일이었고.
'그런데 저 속도는 대체 뭐냔 말이다.'
도무지 납득 할 수 없는 속도였다.
혼자 분신술이라도 쓰는 게 아닌 이상, 어떻게 저렇게 빠른 속도로 개척률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사실은 이미 어비스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주목하기 시작했으니.
쿠웅!
그때 플레이어 한 명이 커다란 탁자를 내리치며 외쳤다.
"저 자를 우리 편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아니, 끌어들이지 못하더라도 블러드에게 넘어가게 둬서는 절대 안 돼."
그의 갑옷 위에는 푸른색의 방패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렉스.
미국의 플레이어로서 '템플'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있는 수장이었다.
알렉스의 주변에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템플은 블러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블러드 녀석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저 플레이어가 필요해! 대체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 플레이어가 블러드로 넘어간다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거야!"
알렉스가 열변을 토했다.
블러드에 대항하는 템플.
그들은 대륙에 관계없이 블러드에 저항하기 위한 한 가지 뜻으로 모인 집단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인종도, 출신 대륙도, 개척률도 아니었다.
자신들과 함께 블러드라는 집단에 대응할 플레이어들을 모으고.
블러드의 악행과 그들의 음모를 저지하는 것.
"이 때를 위해서 우리도 열심히 준비해 왔잖아."
알렉스의 말에 템플의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렉스의 그 말대로, 템플 역시도 아시아 플레이어들이 어비스에 진입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은 상태다.
블러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도 결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알렉스의 철두철미한 준비 정신덕에 템플은 벌써 아시아 지역의 스타팅 포인트들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을 정도였다.
"반드시 아시아의 첫 번째 플레이어를 먼저 찾아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블러드에 넘어가지 않도록 설득해내야 한다고."
알렉스의 비장한 한 마디에 플레이어들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둬, 알렉스. 네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 블러드의 꾐에 넘어가 버렸을 테니까."
템플의 플레이어들.
특히 이제 막 아시아로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알렉스는 플레이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알렉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아시아에서 모습을 드러낸 첫 번째 플레이어.
아직 정체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템플로서는 그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아시아.'
알렉스의 눈이 번뜩였다.
'드넓고 수많은 인구를 보유한 대륙. 앞으로 더욱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꽈악!
알렉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
길게 뻗은 한 개의 다리는 땅을 굳게 디디고 있었고.
가느다란 양팔은 양쪽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 끝에 달린 거대한 손톱은 족히 1m에 이를 정도로 길고 날카로웠다.
아이든과 같은 외형이지만, 크기와 위압감은 평범한 아이든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놈이 등장한 순간 초감각의 범위 내에 알 수 없는 기운이 감지됐다.
'놈의 신체 에너지가 다른 아이든과는 확연하게 달라.'
모든 생명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생체의 에너지.
물론 아이든 우두머리도 생체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든 우두머리가 가지고 있는 생체 에너지는 묘하게 달랐다.
'이건 분명… 나도 알고 있는 종류의 에너지다.'
혈계.
특히 김준석과 싸우고 내가 손에 넣었던 붉은 금속이 내뿜은 에너지와 굉장히 유사한 기운이 아이든 우두머리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초감각이 아니었으면, 그 미세한 차이를 구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지금 저 아이든 우두머리가 단순히 돌연변이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우선은 놈을 제압한 뒤, 놈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의 정체를 밝혀내는 수밖에.
그때.
쿠우웅!
아이든 우두머리가 크게 도약했다.
주변에 남아 있는 아이든들은 그런 아이든 우두머리의 뒤쪽으로 달아나 있는 상태였다.
아이든 우두머리는 육중한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든 우두머리의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부우웅!
길게 뻗은 다리를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그 회전력과 함께 커다란 손톱이 자신의 주변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콱!
회오리바람이 일어난 것만 같다.
협곡 사이에 뻗어 있는 나무나 바위들이 아이든 우두머리의 손톱에 모조리 박살난 채 허공에 나부꼈다.
'요란하군.'
다른 아이든들에 비해서 커다란 덩치를 지닌 만큼 공격 방식도 꽤나 유별났다.
나는 그런 아이든 우두머리를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한 번에 끝내자. 최대한 놈의 몸을 망가트리지 않는 선에서.'
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다.
아이든 우두머리의 신체를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은 상태로 놈을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쿠쿠쿠쿠!
아이든 우두머리의 회전력과 함께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협곡 사이로 피어 오른 모래 먼지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어차피 시각 따위, 지금의 내게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초감각을 더욱 끌어올리며 초감각의 포착 능력에 집중을 더했고.
'하나… 둘….'
나를 향해 다가오는 아이든 우두머리의 움직임을 탐지하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지금.'
흐읍!
짧게 숨을 들이쉬며.
나는 발을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내 몸의 움직임을 따라 검이 자연스레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망설임 따위 있을 리가.
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정확한 순간을 포착해 낸 결과였으니.
서걱!
오러 블레이드 끝으로부터 묵직한 감촉이 전해졌다.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됐어.'
내가 베어낸 건, 아이든 우두머리의 몸통이 아니었다.
대신 길게 뻗어 있는 놈의 다리.
놈의 다리만 잘라 낸다면, 아이든 우두머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테고.
숨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놈을 완전하게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쿠우웅!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나는 눈을 뜨고 놈의 상태를 확인했다.
"크륵! 크르르륵!"
쿵! 쿵!
역시나 정확하게 다리가 잘린 아이든 우두머리는 그대로 고꾸라진 채 몸을 버둥대고 있었으니.
'깔끔하군.'
쓰러져 있는 아이든 우두머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아이든 우두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놈은 거칠게 저항하며 양 팔을 휘둘렀지만.
파직! 콰득!
오러 블레이드로 놈의 손톱마저 완전히 잘라냈다.
그럼에도 아이든 우두머리는 격렬하게 몸을 뒤틀며 저항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우웅!
아이든 우두머리의 전신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크릅…?!"
버둥대던 아이든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췄다.
나는 뒤를 바라봤다.
거기에선 뒤뚱대며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해츨링이 꾸웅, 꾸웅 거리며 양 손을 허공에 대고 휘젓고 있었다.
그와 함께 떠오른 메시지는.
[3서클 – 커즈]
해츨링이 자신의 마법으로 아이든 우두머리를 마비시킨 것이었다.
"대단하군."
내가 시키지 않아도 내 의도를 파악해 적절한 마법을 사용하는 펫이라니.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해츨링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었다.
"잘했다."
"꾸웅. 꾸우웅!"
그리고 나는 다시 아이든 우두머리를 바라봤다.
해츨링의 마법에 온몸이 굳어 버린 아이든 우두머리는 이제 얌전하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놈의 전신을 살폈다.
눈이 아닌, 마력을 놈의 신체 내부로 흘려보낸 채 초감각의 감지 능력을 극대화 했고.
결국.
"흐음…."
마력이 놈의 가슴팍을 지나가는 순간.
턱!
마력이 멈췄다.
'뭔가 있군.'
내 마력을 튕겨내며 저항하는 무언가가 놈의 가슴팍 한가운데에 박혀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고.
꾸욱-
내 마력이 멈춘 부분으로 검을 박아 넣었다.
"키르르르륵!"
아이든 우두머리가 몸을 떨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비가 되어 있어 놈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검을 놈의 가슴팍에 집어넣었다.
초감각의 마력을 아주 미세하고 세밀하게 움직였다.
놈의 가슴팍에는 작은 파편 하나가 박혀 있었다.
놈의 신체에서 생겨난 기관이 아님에도, 각종 신경과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검으로 상처 낸 틈 속으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력이 움직이며 놈의 신경과 파편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결국.
토옥-
놈의 가슴 위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의 금속이었다.
'…역시.'
나는 또 다른 붉은 금속 하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