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흠…."
"너도 느꼈나?"
"그래. 조금 전, 아시아에서 플레이어가 등장한 순간 파편이 공명을 일으켰다."
"……."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모여 앉아 있는 가운데, 그들이 미간을 좁혔다.
그들의 인종은 다양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붉은 색의 문신.
문신은 얼핏 거미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붉은 문신은 중앙의 한 점을 기점으로 상체를 타고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블러드'라는 집단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런 일은 처음인데."
"대체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이기에 파편이 반응을 하는 것이지?"
그들도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힘을 제공하는 이 파편이 누군가가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반응을 한 기억은 없었으니까.
"동요할 필요는 없지. 아직 위쪽에서 이렇다 할 오더는 안 내려왔다."
"그래도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파악해 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흐음…."
플레이어들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 않아도 파편을 몸에 담기 위해 아시아의 스타팅 포인트로 향한 녀석들이 있기는 한데."
"잘 됐군. 그들을 이용해서 아시아의 플레이어에게 먼저 접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만약 그 녀석이 우리 쪽에 협조해 주기만 한다면… 그것도 꽤 괜찮겠군. 파편이 공명할 정도라면 그 녀석은 아마 범상치 않은 플레이어일 게 분명하다."
"그래. 게다가 최초로 아시아에서 어비스로 넘어온 플레이어라면, 앞으로 넘어오게 될 아시아의 플레이어들을 우리 쪽으로 포섭하는 데에도 훨씬 용이할 테지."
"좋아."
그들은 결정을 마친 뒤, 메시지로 무언가 작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아시아 쪽의 스타팅 포인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
지도를 넘겨 달라는 내 말에 잠시 머뭇대는 이스테임.
아무래도 이들이 직접 작성한 지도를 내게 건네준다는 게 조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다.
충분히 납득가는 반응이다.
지도라는 것은 국가의 기밀 사항이기도 할 테니까.
특히 지금 이들의 경우에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를 테고.
나라는 사람을 아직 신뢰할 수 없을 테니 망설일 수밖에.
"원치 않으신다면…."
내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아닐세. 지금 즉시 모험가에게 지도를 넘겨주도록 하라. 그리고 내 부탁하건대 그대 모험가 역시 우리 왕국의 부흥을 위해 힘써 주시길 바라네!"
국왕이 외쳤다.
정말이지 호쾌한 양반이다.
국왕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왕국의 신하들은 바삐 움직이며 지도를 사본을 가지고 와 내게 건넸다.
그 지도의 크기 거대했다.
높이만 하더라도 내 키의 1.5배가량 되어 보였다.
'커다란 만큼 지도에 디테일이 확실히 살아있어.'
괜히 크게 만들어 놓은 지도가 아니었다.
지형의 높낮이와 지형에 서식하고 있는 짐승, 몬스터.
그리고 잡초의 종류까지도 세밀하게 적어 놓은 지도였다.
그동안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동, 식물을 분류하기 위해 작업해 놓은 것 같았다.
물론 왕궁에서 멀어질수록 디테일은 조금씩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도 근방의 지형을 파악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내가 지도를 쭉 훑어보며 이 근방의 지형과 지리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던 중.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지도 '발레하드 왕국 인근'이 시스템에 각인됩니다.]
'맵인가?'
시스템에 지도가 각인된다는 건, 지도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언제든 지형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원할 때 언제든 시스템을 이용하여 지도를 펼칠 수 있습니다.]
역시 내 예상대로다.
저 메시지가 떠오른 동시에 내 시야 한쪽 구석에 지도가 떠올랐다.
이들이 작성한 지도와 동일한 형태의 지도였다.
그리고 메시지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떠올랐다.
[개척률 0.07%를 달성했습니다.]
[1인의 플레이어가 최초로 아시아 대륙의 어비스를 개척해냈습니다.]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업적 '유일한 개척자'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능력 '만리경'을 획득했습니다.]
'업적.'
첫 번째로 개척률을 달성함과 동시에 달성해 낸 업적.
발레하드 왕국 인근의 지리를 담고 있는 지도를 획득한 결과일 테지.
'그나저나 이 정도로 고작 0.07%라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꽤 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도도 나름 디테일하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0.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니.
게다가 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이들이 쏟아부은 노력을 생각하면….
'빨리 위드 쪽에서 어비스로 넘어와 줘야 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저 개척률이라는 것이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열쇠일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많을수록 개척률을 달성하는 데 유리할 수밖에 없을테지.
'그래도….'
시작은 나쁘지 않다.
동시에 또 하나의 능력을 손에 넣었으니까.
'만리경.'
이름만으로도 어떤 능력인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어쨌든 능력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 능력의 정보창을 펼쳤다.
[만리경]
>등급 : AA
>효과 : 먼 곳에 떨어진 장소에 1분간 타인이 감지하지 못하는 분신을 생성할 수 있다.
생성된 분신의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는 시전자에게 온전히 전달된다.
생성된 분신의 오감의 발달 정도는 시전자의 마력에 비례한다.
단, 생성된 분신은 상대를 공격할 수 없다.
'호….'
그 결과는 내 예상보다 더 뛰어났다.
단순히 먼 곳을 관찰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만약 그 정도 수준의 능력이었으면 초감각과 겹치기에 활용도가 많이 떨어졌을 테니.
'하지만 이런 능력이라면….'
분명 내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초감각 역시 훌륭한 능력이긴 하지만 무슨 대화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는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만리경의 능력이라면, 먼 곳에 떨어진 이들의 대화마저도 내가 꿰뚫을 수 있지 않겠는가.
'특히나 나 혼자 활동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하는 내게 있어서 만리경이라는 능력은 꼭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능력은 아니지만.'
사실 전투 능력까지 더해지길 바란다면,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인 것도 사실이지.
'그건 그렇고.'
나는 시스템에 각인되어 허공에 떠 있는 지도를 바라봤다.
'아마 저곳이 발레하드 왕국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곳이겠군.'
그곳은 바로 발레하드 왕국과 인근의 왕국을 가로막고 있는 협곡.
저쪽 왕국의 상태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두 왕국이 적극적으로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면 어쨌든 활로가 열릴 수밖에 없을 테지.
그런 내 예상은 정확했다.
"내 그대에게 부탁하네. 저 협곡을 개척하여 인근의 왕국과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뚫어 주시게!"
잠시 후 국왕이 내게 직접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게다가 저곳을 뚫어내면 개척률을 증가시킬 수 있을 거다.
실제 지도에서도 협곡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답했고.
국왕은 즉시 병사들에게 일러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도록 지시했다.
***
내가 도착한 곳은, 한 무리의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모험가님! 저희는 모험가님을 호위하여 협곡으로 모셔갈 개척대입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한눈에 보더라도 잘 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이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은 이미 낡을 대로 낡아 있는 상태라는 것.
그리고 내색은 안 했지만, 지친 기색들이 역력했다.
내 앞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쓰고 있었지만, 결코 숨길 수 없는 짙은 피로감이 저들의 몸 곳곳에 짙게 배어 있었다.
'아마 수리할 재료도, 인력도 부족했겠지.'
어비스에 갇힌 뒤, 협곡을 뚫어내기 위해 벌써 많은 기사를 잃었다고 했다.
'그래도 훌륭하군.'
충분히 절망할 만한 상황임에도, 아직 투지를 잃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샀다.
"바로 갑시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모험가님을 모시겠습니다! 불편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기사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갑시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나는 기사의 말을 일축했고.
"예, 옛!"
그는 다시 한번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자, 준비해라! 모험가님을 협곡으로 인도할 것이다아아!"
"예에!"
뒤따르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이 입을 모아 외쳤고.
쿵! 쿵!
행군이 시작됐다.
"저 사람들 엄청 멋있어요오…."
"꾸웅!"
몰른과 해츨링은 늠름하게 걸어 나가는 기사들을 보여 그렇게 말했다.
나도 동감이다.
장비는 낡고 해졌다고 하지만,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확실히 잘 훈련된 군인들의 기세였으니까.
내가 만났던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나와 기사들은 꽤 오랜 시간을 걸어 나갔다.
왕궁이 놓여 있던 산을 내려가 평야에 도달했고.
평야를 가로질러 한참을 더 걸었다.
이곳은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넓게 뻗어나간 초감각의 범위에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포착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한쪽에서 이런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식물 – '알레베르 허브'를 발견했습니다.]
[개척률 0.0006%가 상승합니다.]
[동물 – '울카린'을 발견했습니다.]
[개척률 0.0007%가 상승합니다.]
아직 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해 지도에 작성해 놓지 못했던 동물과 식물들.
그리고 지형마저도 초감각으로 즉각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해냈다.
협곡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개척률이 빠르게 상승했고, 시스템에 각인된 지도의 형태도 미세하게 수정되고 있었다.
'이건 또 예상 밖의 선물이군.'
초감각을 통해서 개척률을 올릴 수 있다면, 나 혼자서라도 수백 명분의 일을 해낼 수 있다.
조금 전 내 걱정이 조금은 민망해질 만큼 초감각의 성능은 탁월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다른 대륙에 비해서는 부족하겠지만, 빠른 속도로 개척률을 채워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결국.
"도착했습니다."
내 옆을 호위하던 기사가 말했다.
저 앞으로 거대한 협곡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울레른 협곡을 발견했습니다.]
[식물 – '일레른 잡초'를 발견했습니다.]
[식물 – '하비스토 나무'를 발견했습니다.]
[동물 – '콘토룬'을 발견했습니다.]
[몬스터 - '협곡 아이든'을 발견했습니다.]
[몬스터 - '협곡 아이든 새끼'를 발견했습니다.]
[네임드 몬스터 - '협곡 아이든 우두머리'를 발견했습니다.]
.
.
.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발견 메시지와.
[개척률 0.15%를 달성했습니다.]
개척률이 한 번에 크게 뛰어올랐다.
[현재 개척률 – 0.21564%]
처음 지도를 받았을 때의 개척률이 고작 0.07%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협곡으로 걸어오는 것만으로도 3배의 개척률을 달성하게 된 것.
'초감각이 정말 여러모로 효자 노릇을 하는군.'
초감각이 없었다면, 개척률을 어떻게 달성해야 했을지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했을 지경이다.
'이런 속도라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어비스에 넘어오기 전에 개척률을 꽤나 달성할 수 있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사를 바라봤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금방 돌아올 테니.'
"호, 혼자… 가셔도 괜찮겠습니까."
기사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답해줬다.
따라오지 않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은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채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바로 협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안에 숨어 있는 네임드 몬스터.
그 녀석이 내 첫 번째 타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