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내가 갑작스레 툭, 하고 나타났으면 공격을 하던, 심문을 하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놈들을 어찌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놈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도 놈들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저, 저거…."
"맞지…? 맞아? 맞는 것 같은데?"
이렇게 저들끼리 떠들고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흘끔흘끔 해츨링을 바라보며 무언가 수군댔다.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던 이들인지는 알 수 없다.
그쪽 세계에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저들의 눈에도 해츨링의 모습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을 테지.
그건 그렇고.
언제까지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할 셈인지.
"너희들은 뭔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그들에게 물었다.
어비스에 대해서 설계자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다른 설계자들도 함께 영향력을 끼치는 곳인 만큼 설계자의 개입은 최소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 어…. 그러니까… 모험가님… 맞으십니까!"
그때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모험가.
탑의 원주민들이 플레이어들을 부르던 호칭.
"아마… 맞을 것이다."
내가 답했고.
"우아아아아!"
"드디어! 드디어! 우리에게도 모험가님이!"
내 말을 듣자마자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플레이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아시아 플레이어들의 스타팅 포인트인가 보군.'
그렇지 않으면 플레이어의 등장에 저렇게 기뻐할 리가 없을 것이다.
다른 대륙에서는 이미 꽤 많은 플레이어들이 넘어왔을 테니까.
병사 한 명이 머뭇대며 내게 다가왔다.
"자, 잠시… 모험가님의 신분증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병사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아, 아, 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검문 과정, 검문 과정일 뿐입니다!"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외쳤다.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미간을 좁힌 건, 불쾌해서가 아니다.
다만 내게는 신분증이 없다.
지금 막 어비스에 도착한 참인데 신분증 따위가 있을 리가.
그런 나를 보며 병사들은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죄, 죄송합니다. 신분증이… 모험가님들이 말씀하시는 상태창…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
조금은 낯선 대답이다.
이전의 탑에서 원주민들은 플레이어들의 상태창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니까.
저들도 어떤 세상의 원주민들일 텐데, 그런 원주민들의 입에서 상태창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문제 될 건 없겠지.'
더 이상 내 힘을 숨길 필요도 없다.
이전에는 명가라는 적을 두고 있으니 힘을 숨겼을 뿐이니까.
게다가 아무래도 내 상태창을 보여주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힘들어 보이기도 했고.
"알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창을 펼치면 되는 건가?"
"예, 예. 맞습니다!"
동시에 나는 상태창을 펼쳤다.
내 상태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순간.
"어…?"
"으어어…?"
"흐어어어억!"
내 상태창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신음을 쏟아내는 병사들.
"마, 말도… 말도 안…."
"어찌 이런 귀하신 분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험가님은…."
"축복이다! 축복이야아아아!"
병사들이 부둥켜안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어린애들 놀이터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시,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병사들 중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다급히 행실을 정돈하며 말했다.
"우선… 따라오시지요. 국왕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국왕…?"
"예, 예! 국왕 전하께서 모험가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국왕이라니.
전개가 꽤나 갑작스럽다.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나쁘지 않지.'
조금은 어수선하다고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무언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그렇게 병사들은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몇 개의 문을 거치고.
커다란 문 하나가 등장했다.
그 좌우로는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정작 그들마저도 나를 본 순간 흠칫 놀라며 수군대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자. 마지막으로 복장을 단정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 문을 넘으면…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를 이끌고 온 병사가 말했다.
조금 전의 어리버리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야 군인다운 군기가 잡혀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내 몸을 대충 한 번 훑으며 장비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몰른도 옆에서 열심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고.
해츨링은….
'가다듬을 것도 없군.'
다만 문제는, 그 존재만으로도 병사들의 넋을 쏙 빼놓고 있다는 것이지만.
"준비는 됐다."
내가 병사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럼… 입장하겠습니다."
병사의 말과 함께 좌우로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문 앞으로 다가갔고.
힘을 주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육중한 문이 천천히 움직였다.
끼기기긱-
천천히 벌어지는 문틈 새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용사여어어어!"
내가 왕궁의 중앙 홀에 입장한 순간,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외침의 근원지는 당연히 저 중앙에 앉아 있는 왕이었다.
'이게 뭐야.'
물론 나는 왕이라는 존재를 만나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은연중 왕이라는 존재들은 조금 근엄하고 카리스마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으하하! 드디어 우리에게도 용사가 나타났다! 우리를 구해줄 용사 말이다! 으하하하!"
저렇게 조금은 경박스러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가 당황해 버렸다.
쿵! 쿵! 쿵!
좌우로 도열해 있던 병사들은 발을 구르며 큰 소리를 만들어냈다.
아무래도 저들의 환영 의식인 것 같았는데.
'정신없군.'
그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만의 환영의식이 끝난 뒤.
"용사여! 내 앞으로 오라!"
왕이 소리쳤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왕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 한번.
쿵! 쿵! 쿵!
병사들이 발을 굴렀다.
저건 좀 안 하면 안 되나… 라는 말을 억지로 삼키며 왕 앞에 섰고.
척!
왕이 손을 들었다.
그와 함께 발 구름이 멈췄다.
"나의 이름은 크림슨! 발레하드 왕국의 국왕이며, 오랜 시간 그대와 같은 모험가를 기다려 왔네!"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며 국왕이 나를 바라봤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강민. 한강민입니다."
"오오오! 확실히 이름만 들어 보아도 우리와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아 왔다는 것이 느껴지는 이름이로다!"
웅성웅성!
이름 하나에 저렇게 감탄할 수 있다는 순수함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때.
"여봐라!"
국왕이 외쳤다.
동시에 몇 명의 남자들이 쪼르르 걸어 들어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기사나 병사는 아니었고.
'학자… 같군.'
몸에 근육도 없었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걸 보니 학자가 맞는 듯싶었다.
"모험가가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해 왔다네. 먼저 그대에게 우리 발레하드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도록 하지!"
다시 한번 굳이… 라는 말을 집어삼켰다.
어쨌든 나도 이쪽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할 테니, 조금은 참고 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발레하드 왕국의 제 1 서고의 총 책임자이자 발레하드 왕실 역사학자인 이스테임이라고 하옵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학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발레하드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겠지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탕한 국왕과는 상반된 조심스러운 태도.
그렇게 이스테임이라는 남자는 자신의 조수들과 함께 발레하드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꽤 긴 이야기였다.
시작은 발레하드 왕국의 건국 신화로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왕들의 서사와 연대기가 쭉 이어졌으며, 결국 지금 내 앞에 있는 크림슨 국왕의 이야기에까지 도달했다.
여기까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과거에는 꽤나 강대한 왕국이었지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를 이어갔으나, 크림슨 국왕이 국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병력을 비축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이스테임이라는 남자는 왕실 역사학자라는 직위답게 박식했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도 꽤 능숙했다.
'역사에 대해서 꽤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
실제로 국왕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최대한 포장 없이 전달하려는 노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왕정에 대한 이미지는 고정관념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내가 역사를 공부했던 것도 아니고.
왕과 왕국이 존재하는 시대를 직접 살았던 것도 아니니까.
그런 문제는 둘째로 치자.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였으니, 나는 조금 더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가 살고 있던 세계에 흑암이 드리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모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크읍…!"
국왕도 침음을 삼키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때에 '그 녀석'에게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잡아 먹혔을 테지.
그리고 지금 어비스에 툭, 하고 떨어졌을 테고.
'게다가 나라의 부흥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에 놓였으니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겠지.'
그리고 이어진 학자의 말은, 발레하드 왕국의 역사가 아닌, 어비스에 대한 정보였다.
"그동안 탐색해 본 결과, 우리의 왕국은 이전 우리가 살고 있던 대륙과는 전혀 판이한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원래는 드넓고 비옥한 평야지에 위치해 있었지만… 지금 우리 왕국은 그야말로 척박한 산악지대에 놓여 있게 되었죠."
이스테임은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은 채 설명했다.
그래도 그동안 놀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지도가 꽤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근방으로 열심히 수색을 해본 결과, 왕국의 주변으로 또 하나의 왕국이 있다고 짐작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이스테임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노력해 왔습니다 그동안 이 산맥에 살아가고 있는 몬스터를 짐승들을 사냥하며 식량을 조달해 왔지만, 이제 그것도 슬슬 한계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결국 발레하드 왕국은 고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인근해 있다는 왕국과 교류를 하면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겠지.
배경은 조금 달라졌지만, 결국 내가 파악한 것으로 본다면 어비스 1층 역시 그동안 내가 올랐던 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근본은 그대로다.
'결국 개척하고 나아가며 개척률이라는 것을 채워야 할 테지.'
그렇게 할당된 개척률을 모두 채워냈을 때, 비로소 이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럼 계산은 끝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어쨌든 이 발레하드 왕국을 도와 이 근방의 왕국들과의 길을 뚫어내고 개척률을 채워나가는 것.
'그 이외의 것들은 앞으로 차차 알아가도록 하고.'
나는 이스테임을 향하던 시선을 국왕 쪽으로 돌렸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쪽 지역의 지도를 제게 넘겨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