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가장 궁금한 건…."
나는 설계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붉은 금속 하나를 꺼냈다.
김준석을 처치하고 획득했던 그 붉은 금속이다.
"……!"
설계자가 눈을 부릅떴다.
"봤습니다. 그들의 시작을요."
"하아…."
설계자가 한숨을 토해냈다.
"뭐…. 너라면 언젠가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예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대단하기도 하네."
"뭐가 말입니까."
"네가 그 녀석이 남긴 파편을 손에 넣었다는 건, 그 녀석의 사념을 분노하게 했다는 거야."
"내게 무슨 피해가 있습니까?"
설계자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마. 놈의 사념은 이 탑을 떠돌고 있을 뿐. 아직 놈은 잠들어 있어.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놈의 힘을 억제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설계자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너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어."
"……?"
"네가 그 녀석의 사념을 깨웠다는 건, 결국 네가 그 녀석의 머리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니까."
"그게… 그렇게 이어지는 겁니까?"
"그렇지. 혈계라는 이름으로 플레이어들의 몸속 깊이 잠들어 있던 사념을 깨울 만큼 네가 강하다는 것이고, 잠들어 있는 녀석의 분노를 일깨울 만큼 네가 강하다는 뜻이니까."
"그렇군요."
궁금증 하나가 해결됐다.
이 금속은 '그 녀석'이라고 불리는.
세계를 포식하는 괴수의 사념 파편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그 사념을 깨울 수 있었던 건, 그 녀석이 나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정도로 내가 강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내 궁금증이 끝난 게 아니다.
나는 다시 설계자를 노려봤다.
그녀는 입은 웃고 있지만, 흠칫 놀라며 애써 와인을 한 모금 더 넘겼다.
"경쟁. 대체 설계자들끼리 경쟁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전에 설계자를 만났을 때, 미처 묻지 못했던 이야기.
내가 이해하기로는 설계자들은 함께 세계를 집어삼키는 포식자를 쓰러트린 이들이다.
그렇다면 함께 힘을 합쳐야 할 것 같은데, 분명 설계자는 다른 설계자들과 '경쟁'을 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으음…."
설계자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표정.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말을 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래."
설계자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놈의 머리가 있는 그곳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적이기 때문이지."
"그 이유는?"
"구조적인 한계였어. 우리가 설계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만약 그곳에 한 번에 많은 인원이 들어갈 경우, 놈의 남아 있는 사념이 폭주할 거야. 결국 공간 자체가 무너져 버릴 테고."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가겠지. 그동안 나와 너희의 노력이 아무런 가치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야. 네가 사는 지구도… 사라져 버릴 거고."
그래도 다행이다.
만약 저들의 이기심 따위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 화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이라면.
나 역시 이해하는 수밖에.
"결국 플레이어들이 거치는 모든 과정들은… 그곳에 들어갈 인원을 선별하는 과정이라는 말입니까?"
내 말에 설계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 역시 이해가 빨라, 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그걸 내가 경쟁이라고 표현했던 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 어쨌든… 설계자들은 기왕이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탑을 오른 플레이어들이 그곳에 들어가 머리를 파괴하길 원하니까."
"그래서 당신이 얻는 대가는 무엇입니까."
"소명의 완수… 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
"……."
저건 아무래도 내가 넘을 선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설계자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지 못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에 내심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한 모금 더 넘겨 삼켰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궁금한 것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내가 말을 이으려던 그 순간.
"정말 성격 참 급하셔."
설계자가 말했다.
내가 말하려던 순간, 설계자가 내 말을 가로챈 것이다.
"몸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나 봐. 그렇지?"
"……."
정곡을 찔렸다.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질 정도로.
내가 하려던 말은 결국 어서 빨리 다음 층으로 보내달라는 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손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한순간이라도 빨리 새로운 강자와 겨루고, 이 탑의 끝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걱정 마. 곧 보내줄 테니까. 쟤들… 밥이나 좀 먹이고 나서."
설계자는 몰른과 해츨링을 바라봤다.
벌써 몇 그릇째 비우고서 아직도 열심히 음식들을 먹어치우고 있는 두 녀석 말이다.
"캬아아아아!"
"꾸우웅!"
몰른은 맥주를 넘겨 삼키고, 해츨링은 커다란 고기를 씹어 먹으며 감탄사를 한 번 더 터트렸다.
"…오 분. 오 분 안에 식사를 끝내라."
내가 두 녀석을 향해 말했고.
"흐, 흐어엇!"
"꾸우우…!"
"아오, 저 성질머리, 진짜!"
그 둘은 내 말을 듣자마자 다급해진 표정으로 음식들을 자신들 앞으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
"달라질 건 없어. 너는 그동안 네가 해왔던 대로만 하면… 문제는 없을 거야."
설계자가 말했다.
몰른과 해츨링은 식사를 끝마치고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앞으로 71층으로 향하는 모두는 당신을 만나게 되는 겁니까?"
"음. 그렇지. 그런데… 71층은 아니야."
"예?"
"이 탑은 70층까지였고. 71층이라면 71층일 수도 있겠지만… 명확히 말하자면 71층은 아니지."
"……?"
"가 봐. 가 보면 알게 될 테니까. 그건 그렇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인사는 안 해도 괜찮겠어?"
설계자가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위드의 플레이어들과는 메시지를 통해 꾸준히 연락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해밀턴은 지금 너무 바쁠 테니, 굳이 찾지 않는 게 그에 대한 예의일 테고.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며 설계자가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설계자의 방 한쪽에서는 포탈이 생성됐다.
"자."
설계자는 포탈을 가리켰다.
나는 포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엿같군. 이래서 정말 다음 층으로 진입할 수 있기는 한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탑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오는 거였는데."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미국의 양키들한테 완전히 뒤처지게 생겼다고."
"그나마 아시아 놈들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잖아. 그거에 위안을 가져야지."
그들은 바로 유럽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이곳은 '어비스'라고 불리는 장소다.
세계 곳곳에서 솟아난 탑을 돌파하여 플레이어들이 진입하게 되는 곳.
그리고 타국의 플레이어들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는 장소가 바로 이 어비스다.
"대체 미국 놈들은 탑에서 어떤 훈련을 받고 온 거지? 강해도 너무 강해."
"미국 놈들 뿐이야? 아프리카 녀석들도 만만치 않다고. 우리보다 어비스에 늦게 진입했으면서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오고 있어."
현재 어비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유럽의 플레이어들.
하지만 문제는 그 수에 비해서 실속이 적다는 점이었다.
유럽 플레이어들의 대화대로, 현재 어비스에서 가장 강한 세력은 미국의 플레이어들이었다.
현재 어비스에 진입한 세력은 미대륙,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플레이어들.
아프리카 대륙의 플레이어들이 어비스의 진입은 느렸지만 유럽 플레이어들을 빠르게 추격하는 중이었으니.
유럽 플레이어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었다.
"그것보다 말이야. 아프리카 녀석들에 대해서 말이 많더군. 현재 아프리카 녀석들이 속해 있는 왕국 녀석에게 들은 이야긴데."
"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는 건가?"
"놈들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
"자세히 좀 말해 봐."
"요즘 시끄러운 녀석들 말이야. 그 블러드라는 녀석들. 그 녀석들과 비슷한 놈들이 아프리카쪽에서 꽤 많은 모양이야."
"블러드…."
"우리의 설계자가 경고했던 그것 아닌가?"
"그렇지."
블러드라는 말에 그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들어 어비스 1층에서 날뛰기 시작한 집단이 바로 블러드였으니까.
누군가는 빌런이라고도 부르곤 했지만, 서구권의 플레이어들에게는 블러드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들.
한참이나 블러드에 대해서 떠들던 이들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시아 녀석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야 알 수 없지. 탑의 설계가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시아 원숭이들이 너무 약해 빠진 것일지도 모르고. 크큭."
그나마 그들이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아직 아시아의 플레이어들이 어비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어차피 그래 봐야 다 거기서 거기니까. 아직 어비스 1층조차 돌파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잖아."
"……."
결국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어비스를 개척하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건만, 그 절반조차 뚫어내지 못한 마당에.
비교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말은 정확한 지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아시아의 첫 번째 플레이어가 어비스에 입장했습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
'어비스.'
70층 이후에 드러난 곳은 71층이 아니었다.
어비스 1층.
'아무래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양이군.'
설계자가 71층이 아니라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곳도 1층이라는 걸 보면 원리 자체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타국의 플레이어들과 합쳐야 하기 때문에 어비스 1층이라는 이름으로 퉁쳤을 테지.'
그리고 상태창 한쪽에는.
[개척률]
1.미대륙 – 30.54%
2.유렵 대륙 – 28.65%
3.아프리카 대륙 – 27.89%
이런 글자가 추가되어 있었다.
'저걸 두고 경쟁을 한다는 것인가.'
아마 내 추측이 맞을 것이다.
국가별로 솟아난 탑은, 어비스에 도착함과 동시에 대륙 단위로 묶이는 모양이다.
'그럼 아시아 대륙의 탑은 모두 그 설계자가 관리하는 건가?'
그것에 대해서는 미처 묻지 못했지만.
지금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그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아시아 쪽에서는 아무도 탑을 돌파하지 못한 모양이군.'
그것도 납득이 간다.
대한민국 탑의 설계자가 아시아 쪽의 탑을 설계했다면.
그 난이도는 모두가 끔찍한 수준일 테니까.
'정말 악취미야.'
이미 설명을 들었음에도,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벌써 미대륙에서는 어비스의 30%를 개척해 냈고.
다른 대륙도 30%에 근접할 정도로 개척해 낸 상태다.
그런데 아시아에서는 이제 고작 나 하나가 어비스 1층에 진입했을 뿐이니까.
'그나저나.'
문득 지구에서 했던 게임이 생각났다.
전 지구를 대상으로 서비스하는 게임들의 경우에도 보통 이런 식으로 서버를 나누곤 했다.
대륙 단위의 서버들 말이다.
'또 한 번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것 같군.'
사실 뭐.
이미 1층부터 70층까지의 시스템 자체도 게임의 시스템과 유사했으니.
이런 식의 시스템이라고 해도 크게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성이다.'
말 그대로다.
나는 성 내부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어, 어으어…."
"저, 저거…."
내 앞에서 얼타고 있는 병사 몇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