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젠장. 맵 한 번 더럽게 만들어 왔군.'
벌써 몇 번이나 중얼거린 말인지 모르겠다.
사실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지금까지 항상 그랬듯, 몬스터들은 내 공격을 일격조차 버텨내지 못했고.
사방에서 놈들이 기습을 하더라도 피해 반사 때문에 오히려 제 놈들이 고꾸라지기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70층의 지형이었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는 70층의 지형은, 같은 곳을 몇 번이나 오갈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
70층의 클리어 조건인 '모든 몬스터 처치'라는 조건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개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설계자도 정말….'
도대체 플레이어들을 얼마나 강하게 육성하려고 했는지 그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긴. 이런 던전을 클리어하고 난다면 괴물이 될 수밖에 없겠어.'
전생에서 내가 70층을 헤맸던 기간이 두 달이었다.
첫 한 달 반 정도는 명가들도 나를 최대한 지원했다.
그들도 함께 몬스터를 사냥했고, 맵의 지형을 분석했다.
그렇게 그들이 어느 정도 던전 파악을 끝냈다는 판단을 한 뒤 내가 버려졌다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반 이상 클리어했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의 내가 판단해 보건대.
전생에서 한 달 반 동안 명가들과 협조를 통해 밝혀낸 70층은 70층 전체에서도 1/4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죽고 나서도 놈들은 절대 70층을 클리어하지 못했을 테지.'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설계자는 정말로 나한테 고마워해야겠어.'
자만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난이도로 설계해 놓은 이상.
나 정도 플레이어가 없었으면 정말 70층의 클리어는 10년, 20년 이상 늦춰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탑이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내가 습득한 정보들을 위드 길드에게 건네고 있었으니.
나 하나로 인해서 이 탑의 클리어 속도는 최소 십 년, 이십 년 정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을 테지.
'다른 녀석들이 궁금하군.'
타국의 플레이어들.
어떤 탑을 오르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말이다.
이제 곧 70층의 클리어가 가까워졌지.
'확실한 건 하나다.'
결코 저 위층은 별천지가 아니라는 것.
'어쩌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치열한 전쟁터가 펼쳐지게 될지도 모르지.'
같은 국가에서 태어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 탑에서조차 수많은 분파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고 싸워왔다.
하물며 타국의 플레이어와 조우하게 되는 저 위쪽이라면 어떻겠는가.
'게다가 설계자들의 경쟁까지 뒤엉켜 있다면….'
말 할 것도 없겠지.
거기에 어떤 환경이 펼쳐질지 예측할 수도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때.
콰콰콰쾅!
[체력 9를 포식했습니다.]
[민첩성 8을 포식했습니다.]
.
.
.
[힘 9를 포식했습니다.]
다시 한번 스탯 포식 메시지들이 쏟아졌고.
초감각 범위 내에 더 이상 그 어떤 몬스터도 포착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인가.'
나는 이제 정말로 70층의 마지막 부분에 도착해 있었다.
막상 도달한 70에 대해서는 딱히 이렇다 할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전생의 내가 죽었던 자리를 지나쳤을 때에도 그랬다.
괜히 이런 저런 감상에 빠졌던 것이 민망할 지경이다.
어쨌거나.
이제 여기에 남아 있는 몬스터는 한 마리뿐이다.
'보스 몬스터.'
최후의 던전이라는 70층의 테마에 맞게 이번 층의 보스 몬스터 역시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저 녀석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까지는 낱낱이 꿰뚫을 수는 없었지만.
'이 실루엣은 분명….'
거대한 도마뱀의 형태였다.
감히 곧 모습을 드러낼 보스 몬스터의 모습을 예상해 보건대.
놈은 분명히 드래곤일 것이다.
판타지 소설에서 등장하는 최상위 포식자.
"후우…."
나는 한 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컨디션은 최상이다.
***
[최종 보스 몬스터, 레드 드래곤 카이락카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보스존에 진입한 순간 떠오른 메시지다.
꽈아악!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압축된 마력이 내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흐윽…."
결국 나조차도 신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쿠우웅!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의 거대한 몸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늘한 붉은 안광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그륵…."
그 순간 드래곤이 나를 바라봤다.
놈의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먹잇감을 바라보고 있는 포식자의 눈빛일 뿐이다.
'쉽지 않겠어.'
다른 보스존에 비해서 열 배는 더 거대한 70층의 보스존이다.
이토록 거대한 보스존의 한구석을 완전히 메울 만큼 드래곤의 크기는 거대했다.
'장난이 아니군. 이딴 걸 사냥하라고 만들어 놓은 건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야 저 괴물 도마뱀을 사냥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정말이지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양반이야.'
설계자의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또 한 번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시 한번 만난다면 시원하게 욕지거리라도 한 번 뱉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어쨌든, 저 녀석을 쓰러트려야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다.'
진정한 이 탑의 본질에 닿을 수 있는 무대.
그리고 또 다른 강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을 새로운 세상.
'반드시 올라선다.'
물론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저 도마뱀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생각해 놓은 참이었다.
'덩치에 속을 필요 없다. 나는 충분히 강하니까.'
동시에 나는 내가 가진 능력 한 개를 사용했다.
가장 먼저 사용한 능력은 바로.
'홉 고블린의 외침.'
저주받은 고블린 열 마리를 소환할 수 있는 능력.
홉 고블린의 외침을 사용한 순간, 저주받은 고블린 열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륵! 키륵!
놈들은 드래곤을 눈앞에 두고서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저 나로부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하지만 아직 놈들을 움직일 생각은 없다.
그 다음으로 사용한 능력은.
지배자의 권능이다.
지배자의 권능은, 탑의 61층부터 70내에 존재하는 몬스터들을 무작위로 소환하는 능력이다.
나는 이어서 지배자의 권능을 사용했고.
'자, 나와라.'
그리고 지배자의 권능을 사용한 순간 몬스터 열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륵! 크르륵!
컹! 컹!
지배자의 권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열 마리의 몬스터는 바로 가이오스.
탑의 68층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다.
주로 이빨과 손톱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몬스터다.
하지만 가이오스는 평범한 짐승이 아니다.
가이오스는 마계의 생명체였고, 늑대처럼 생겼지만, 무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가이오스의 이동 속도는 웬만한 늑대 따위와는 감히 비교도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런 가이오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쾌재를 불렀다.
'잘 됐어.'
마침 가이오스는 내가 원하던 몬스터 중 하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환한 모든 소환체의 신체 능력이 30% 증가합니다.]
지배자의 권능의 버프 효과가 적용됐다.
고오오오!
모습을 드러낸 총 스무 마리의 소환체들이 모종의 기운을 느끼며 자신들의 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움직여라.'
나는 곧바로 소환체들에게 나의 의지를 전달했다.
키륵! 키르륵!
컹! 컹!
고블린과 가이오스는 내 의지를 전해 받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내 의지에 따라 수행하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가이오스의 등 위로 올라탔다.
초등학생 정도의 키를 가진 고블린과 대형견 정도의 크기인 가이오스.
가이오스에 올라탄 고블린의 모습은 꽤 그럴싸하다.
패애애앵!
가이오스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온통 근육으로 이루어진 여덟 개의 다리는 절묘하게 교차하며 땅을 박찼다.
한 번에 수 미터를 족히 도약하며 전광석화와 같이 쏘아져 나가는 가이오스들은 드래곤을 마주하고서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다.
키르르르륵!
가이오스의 등 위로 올라탄 고블린들은 허벅지의 힘만으로 자신들의 몸을 지탱했다.
양손으로는 각자의 무기를 허공에 휘두르며 엄청난 속도로 드래곤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도로 위로 날뛰는 폭주족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크으으!"
드래곤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땅 아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드래곤의 마법 중 하나겠지.
쾅! 콰콰쾅!
보스존 전체가 커다랗게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마법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놈의 마법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초감각을 통해 마력의 움직임을 포착해 놓은 상황.
놈의 마법을 한발 앞서 꿰뚫은 채로 가이오스들에게 내 의지를 전달했으니.
콰앙! 콰콰쾅!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불기둥 사이로 종횡무진하는 가이오스들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가이오스들은 절묘하게 드래곤의 마법을 피해냈고, 단 한 마리도 다치지 않은 채 드래곤을 향해 도약하고 있을 뿐이다.
쿠르릉!
드래곤도 조금 당황했는지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파아앗!
그와 동시에 거대한 날개를 펼쳐냈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가이오스와 고블린이 달려드는 순간, 드래곤 역시 꽤나 성가시리라는 것을 직감했을 테지.
하지만.
'그렇게 날아오르도록 놔둘 생각은 없다.''
우우웅!
나는 오러 블레이드 위로 마력을 불어 넣었다.
강하게 응축된 마력이 오러 블레이드 위로 일렁이기 시작했고.
"받아라."
놈을 향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놈의 날개를 향해 검기를 쏘아 보냈다.
콰아아아아!
검기의 파동이 맹렬한 기세로 정확히 놈의 날개를 향해 쇄도했고.
곧이어.
'반대쪽도 한 방.'
두 개의 검기의 파동은 한순간에 놈의 날개에 가까워졌다.
콰콰콰콰쾅!
놈의 양쪽 날개에서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크아아아아아!"
드래곤이 포효했다.
제 아무리 검기의 파동이라고 할지라도 놈의 날개를 단번에 절단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놈의 날개 일부분이 찢어졌고, 껍질이 벗겨진 곳에서는 뼈가 드러났다.
"크르르르륵!"
놈이 신음을 흘려냈다.
놈의 입가에서 불기운이 일렁였다.
드래곤이 입을 쩍 벌렸다.
놈의 입가에 일렁이던 불기운은 순식간에 그 크기를 몇 배로 불렀다.
동시에 놈의 입에서 브레스가 뿜어져 나오려던 그때.
커헝!
키르르륵!
가이오스와 고블린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이오스와 고블린은 어느새 드래곤의 뒷다리에 도착해 있었고.
'갈가리 찢어버려라.'
나는 나의 의지를 녀석들에게 전했다.
고블린과 가이오스들은 망설임 없이 드래곤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작됐다.
푸학! 파직! 콰직! 콰드득!
고블린은 양손에 들고 있는 검을 이용해 드래곤의 피부를 잘라내고, 살점을 베어냈다.
가이오스도 발톱과 이빨로 드래곤의 살점을 마구 뜯어냈다.
내 신체 능력을 공유하고, 지배자의 권능의 버프 효과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크아아아아아!"
드래곤이 다시 한번 괴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놈의 양쪽 뒷다리는 군데군데에서 뼈가 드러났고, 흘러내린 피는 강을 이루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드래곤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덩치만 크다고 다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