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위드 길드와 해밀턴이 합작하기 시작한 순간, 강민이 그리고 있던 청사진은 엄청난 속도로 현실 속에 구축되기 시작했다.
"여기! 이쪽으로!"
"아, 이 사람이! 그게 아니라니까!"
"으어! 조심! 조심해애애애!"
가장 빠르게 변하기 시작한 건 탑의 1층의 초입부다.
플레이어가 탑에 진입하는 스타팅 포인트를 중심으로 하여 각종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허억…. 이, 이게… 뭐죠?"
방금 막 탑 안에 들어온 신규 플레이어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한참 공사 중인 이들에게 되물었다.
"아, 신규 플레이어십니까."
그런 신규 플레이어들에게 전 명가 산하 길드 소속 플레이어들이 다가왔다.
신규 플레이어들의 눈에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기성 플레이어들은 마치 전설 속 영웅처럼 비치기에 충분했으니.
그런 플레이어가 무기를 잔뜩 들고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건.
마치 저승사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만 같은 장면을 방불케 하기에 충분했다.
"흐, 흐어어억!"
"사, 살려 주십시오!"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살려달라는 말이었다.
탑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신규 플레이어들이다.
그들에게 탑이란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으니까.
"아, 아아…. 죄송합니다. 우선은 하나씩 받으세요."
그러더니 기성 플레이어는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조심스레 신규 플레이어에게 건넸다.
"예, 예?"
"저, 저… 돈… 없는데요…."
"혹시… 이쪽에서도 지구의 화폐를 쓸 수 있는 겁니까?"
"조금 비싸 보이는데…."
신규 플레이어들은 잔뜩 얼빵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총합 10만 원가량.
당연히 탑 내부에서 탑 밖의 화폐는 휴짓조각이나 다름없다.
설령 화폐 가치가 있다고 해도 10만 원 정도의 돈으로는 저 장비 중 하나도 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냥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무기와 기본 장구류를 나눠주며 기성 플레이어가 말했다.
하지만 신규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무슨 꿍꿍이지?'
'공짜로 준다고? 혹시 이거 받으면 기절해서 어디 끌려가는 거 아니야?'
'믿을 수 없다. 아무도 믿으면 안 돼.'
신규 플레이어들은 쉽사리 무기를 받지 못하고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다짜고짜 무지렁이의 시선으로 봐도 훌륭해 보이는 장비를 공짜로 준다니.
밖이었으면 인신매매가 아닐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무슨 걱정이신지는 이해합니다만…."
기성 플레이어는 자신의 가방 속에서 종이를 꺼내 신규 플레이어들에게 건넸다.
"우선 한 번 읽어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
신규 플레이어들은 또 얼떨떨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고.
종이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탑에 입성한 것을 환영합니다.]
우선 탑에 발을 내딛기로 결심하신 여러분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또 지금 얼마나 두려우실지는 이미 탑을 오른 경험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충분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
.
.
… 그리하여 우리 위드 길드에서는 신규 플레이어들을 위해 기본 장비를 제공하고 … (중략) …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해 드리고자…
"이게 무슨…."
"위드 길드라고…?"
신규 플레이어들로서는 처음 듣는 길드의 이름이다.
"예. 읽으신 그대로입니다. 현재 이 탑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인 위드 길드는 신규 플레이어들을 지원하고자 이렇게 장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료로요."
다시 한번 충격에 빠진 플레이어들.
"위드…? 가장 큰 세력…?"
인지의 부조화가 온 순간이다.
그들이 알고 있기로는, 탑의 가장 거대한 세력은 당연히 명가여야 했건만.
위드라니?
"설명하자면 깁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적어도 이 탑 내부에 더 이상 명가는 없습니다."
"……!!!"
신규 플레이어들이 눈을 부릅떴다.
"거짓… 말…."
더더욱 기성 플레이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탑 밖에서 명가가 누리고 있는 권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니.
'도망, 도망가자.'
'이상한 사람이 분명해.'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뒷걸음질치기 시작했고.
막 달아나려던 순간.
"후아! 이거 진짜 좋은데?"
"그러게 말이야. 이 장비 없었으면… 저 고블린을 어떻게 잡았겠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몇몇 플레이어 무리가 스타팅 포인트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신규 플레이어들을 바라본 순간.
"어! 신규 플레이어 맞죠?"
"맞네, 맞아! 으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그거 빨리 받아요. 안 받으면 진짜 후회할걸요?"
어느새 탑에 적응한 선배들의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벅벅
기성 플레이어가 머리를 긁적였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곧 여러분들도 알게 되실 거고요."
그런 말과 함께 기성 플레이어는 다시 한번 신규 플레이어들을 향해 장비를 건넸다.
"그거 받고 이리 오세요. 저희가 대강 설명해 드릴 테니까."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규 플레이어와.
며칠 먼저 들어와 탑에 적응하기 시작한 중고 신입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았다.
***
[명가의 몰락…]
[위드 길드는 각 명가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창술 명가의 가주의 행방이 묘연….]
[궁술 명가의 소가주의 시신 확인…]
[체술 명가의 본당이 플레이어들의 손에 완전히 허물어져….]
펄럭!
김민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강민이 55층의 마을에서 명가의 플레이어들을 사실상 '몰살'시킨 이후로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던 기사들.
그리고 기사의 타이틀 그대로 명가는 몰락했다.
그들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고, 명가의 핵심 인물들은 처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결국 명가의 재산들은 온전히 신규 플레이어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자금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게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명가의 플레이어들도 뿔뿔이 흩어져 모습을 감춰 버렸다.
처음에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반신반의해 했다.
소문이야 무성했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탑의 기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발로 뛰었고.
결국 55층의 마을에서 싸움의 흔적을 직접 목격한 기자들은 매일같이 탑의 일간지를 통해 수많은 소식들을 쏟아내고 있었으니.
"이제 아무도 의심 못 하겠죠?"
"말이라고…."
명가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제 탑의 모든 플레이어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 되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혼란해 했다.
명가가 사라지고 균형이 뒤바뀌었다는 건, 한 편으로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사건이 벌어지고 첫 일주일 동안은 탑 전역에 불안감이 휩싸이기 시작했다.
위드 길드에 대한 불신과 그로 인한 불안감이 탑 전체에 팽배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그렇게 대략 2주가 지난 이 시점에서, 첫 일주일의 불안감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플레이어들의 여론을 진정시킨 건, 당연히 위드 길드의 행보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며, 탑의 1층부터 신규 플레이어들을 위한 시설들을 건설하기 시작한 행동들이 가장 큰 몫을 해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황이 완전히 정리됐다는 건 아니다.
아직도 혼란을 느끼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많았다.
위드에 대한 불신과 새로운 균형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그건 이제 그들이 결과로서 보여줘야 할 일이다.
그것이 현재의 위드 길드에게 맡겨진 책임이었다.
"정신없어."
일간지를 내려놓으며 김민희가 말했다.
김민희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어때요. 걔들은 잘해요?"
그런 김민희를 향해 한동희가 물었다.
전 명가 산하 길드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에 대한 관리는 김민희가 담당하고 있었으니, 그에 대해서 묻는 거다.
"뭐…. 잘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마음 놓지마요. 걔들은 업보가 있잖아요. 걔들이 못 하면 욕먹는 건 우리인 건 알죠?"
"얌마. 이 누나가 그런 거 허투루 할 사람이냐? 안 그래도 오늘도 몇 번이나 길드장들 만나고 온 길이야."
"흐흐."
한동희가 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냐, 그 웃음."
"헤헤…."
대답 없이 또 한 번 음흉한 웃음을 흘려보내는 한동희와.
그런 한동희를 보며 김민희가 미간을 좁혔다.
"나 고생하니까 좋다는 표정이다?"
그 말에 한동희가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내 머릿속 읽은 거야?"
"…너 일로 와 봐."
"싫은데, 싫은데에~!"
"야, 이 새끼야!"
"흐하하하!"
한동희가 다급히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그때.
벌컥!
문이 열렸고.
콰아앙!
"끄억!"
열리는 문에 한동희가 충돌하고 자빠졌다.
"뭐야?"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박명철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건 바로 강민.
"가, 강민 씨!"
"헉! 강민 씨다!"
김민희와 한동희는 강민의 모습을 본 순간,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
"진짜요? 벌써?"
"예."
강민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다. 진짜로 미쳤어."
"정말로… 69층 돌파한 거 맞아요?"
"그렇다니까."
"……."
한동희와 김민희는 입을 다물었다.
"일주일… 걸린 거 맞죠? 65층부터 69층까지."
"그래."
박명철이 강민 대신 답했다.
"대애…바아악…."
조금은 기계적인 리액션.
감탄사를 더 흘리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65층의 마을도 개발을 시작했어."
그리고 박명철이 말했다.
"어때요, 거기는."
"훌륭해. 원주민들도 다들 하나같이 대단한 녀석들뿐이고."
마을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건, 바로 해당 마을에 어떤 원주민들이 살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런 면에서 65층 마을의 퀄리티는 과연 최고였다.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관의 마을이었어. 엘프가 있고, 드워프가 살고 있는…."
"와아…."
아직 일이 너무 바빠 65층 마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한동희와 김민희가 감탄사를 흘려보냈다.
"아직은 그들과 친해지지 못했지만, 조금 더 관계가 좋아지면 우리 탑의 발전은 더 빨라질 수 있을 거다."
엘프들이 보유한 약초 생산이나 물약 제조에 대한 지식, 드워프들의 대장기술.
그들의 지식만 습득할 수 있어도 탑의 발전 속도는 지금의 몇 배로 뛰어오를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강민의 탑 돌파 속도.
아직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위드 길드의 수뇌부뿐이었지만.
첫 일주일 동안 잠시 몸과 마음을 추슬렀던 강민은 지난 1주일간 탑을 올랐다.
65층을 시작하여 69층까지.
그렇게 일주일 안에 다섯 개의 층을 돌파해 낸 강민은 이제 70층 하나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70층.'
그렇다.
전생의 강민이 죽어야만 했던 그곳.
그리고 명가와의 악연이 본격적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던 그곳만을 남겨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강민은 담담했다.
조금은 들뜨거나 흥분될 법도 하건만.
지금의 강민은 탑을 오르던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달라질 건 없다.'
그동안 했던 것처럼 탑을 오르고 또 올라서는 것뿐.
'하지만.'
그런 강민의 마음속에서도 무언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 다음 펼쳐질 그 세상.'
조금도 예측할 수 없는 곳이다.
확실한 한 가지는 그곳부터 타국의 플레이어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
'기대되는군.'
강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의 손은 벌써부터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