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상태창이 달라졌다-172화 (172/277)

172화

풀썩

강민은 박명철의 맞은편에 앉았다.

강민의 갑옷을 깔끔했고, 옷과 머리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조금 전 한바탕 끔찍한 싸움을 끝내고 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이 단정한 상태였다.

"몰른 씨도 앉으세요."

박명철은 강민 옆에 서 있는 몰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에에. 고맙습니다아아."

몰른은 강민 옆에 자리했다.

***

박명철의 책상 위에는 서류 여러 장이 놓여 있었다.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군.'

내가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모든 내용들을 기억하고 벌써 문서로 정리해 놓은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모습을 보아하니 벌써 작업에 착수한 것 같고.

"이미 민희와 동희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 시선을 알아챈 박명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예."

나는 짧게 답했다.

굳이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일 생각은 없다.

박명철은 내 기대를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그때.

"강민 씨는 아마 십 년만 지나면 위인전에 이름이 실릴 수도 있겠어요."

박명철이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하하. 그렇지 않습니까. 이 탑의 역사는 강민 씨가 등장하기 전과 후로 완전히 달라졌잖아요."

"아…."

무슨 말인가 했더니.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런 일을 한다면… 대신 말려 주십시오."

진심이다.

내가 위인전 같은 것에 실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내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일개 플레이어일 뿐.

"이런 업적을 세워 놓고… 너무 자신에게 가혹한 거 아닌가요. 하하…."

박명철이 웃음과 함께 말했다.

"관심 없습니다. 다만, 아직 박명철 씨에게 말씀드리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나는 박명철의 말을 일축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탑에 신규 플레이어들을 위한 시설 건축에 대미를 장식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인물에 대한 소개다.

바로 해밀턴.

그가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만 있다면, 이 탑의 발전 속도는 과거와는 감히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질 수 있을 테지.

'그가 만든 기본 장구들만 제공되면… 적어도 10층까지의 생존율을 100%에 수렴할 정도로 끌어 올릴 수 있을 거야.'

문제는.

해밀턴이 이 제안을 수락하냐는 것이지만.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

"시간 괜찮으십니까."

내 말에 잠시 박명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역시 굳이 의문을 더하지는 않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강민 씨 말씀이라면 없던 시간도 만들어야죠."

박명철이 답했다.

나는 그런 박명철과 함께 층간 이동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

나와 박명철이 도착한 건, 25층의 마을.

해밀턴의 공방이 있는 층이었다.

"아…!"

내가 25층에 온 순간, 박명철도 대충 상황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이미 전에 개미 등껍질을 이용해 장비를 만들 때, 내가 해밀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박명철도 알고 있었을 테니.

"아아아…!"

박명철은 다시 한번 탄성을 터트렸다.

나는 말없이 박명철을 이끌고 해밀턴의 공방으로 향했다.

역시 해밀턴의 공방 앞에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박명철 역시 해밀턴의 공방 앞에 도착한 순간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확실히… 해밀턴 씨라면 우리 계획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명철이 말했다.

날이 갈수록 유명세를 더해가는 해밀턴의 명성은 이미 탑의 초고층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졌을 정도니까.

"그렇죠."

"문제는… 저 해밀턴 씨가 과연 우리 계획에 동참해 주느냐는 것인데."

역시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는 박명철이다.

"저도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해밀턴의 고집은 그 누구도 꺾을 수가 없으니… 저 역시 진즉 말씀드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죠."

박명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선 가보죠."

내가 말했고, 나와 박명철은 해밀턴의 공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허, 헉!"

해밀턴의 공방 앞에 모여 있던 플레이어들이 박명철의 얼굴을 본 순간 숨을 급히 들이켰다.

아직 내 얼굴은 탑의 저층 플레이어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박명철은 그렇지 않았다.

위드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이름으로 벌써 수차례나 탑의 일간지에 얼굴이 오르내렸으니.

그런 박명철의 얼굴을 모르는 플레이어는 사실상 없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때.

"으, 으어어억!"

한 남자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가 놀란 건, 박명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잘 지냈습니까."

나는 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바로 해밀턴의 수제자였다.

"자, 잘… 지냈습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잔뜩 군기 잡힌 목소리로 해밀턴의 공방 안으로 달려갔다.

그의 그런 태도를 보며 플레이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하하. 진짜 대단하십니다."

정작 박명철을 보고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수제자였건만.

나를 보고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다른 플레이어들이나 박명철에게는 조금 놀라운 모양이다.

그렇게 잠시 후.

"썩 꺼져! 오늘 장사 끝났어!"

"가,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제, 제발 제 장비만…!"

"세, 세 달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꼭 해 주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아아아!"

"세 달? 삼 년 기다리게 해 줘?"

"아, 아닙니다아아!"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해밀턴의 고함 소리와 뒤엉킨 플레이어들의 절규였고.

"하하하하…."

박명철은 다시 한번 머쓱한 웃음을 터트렸다.

***

"드십시오."

해밀턴의 수제자가 나와 박명철, 몰른에게 차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나는 차를 받아 들고 냄새를 맡았다.

향긋하다.

저번보다 더 고급스러운 차다.

"스승님이 요새 차 수집에 맛을 들리셔서…."

수제자가 내게 속삭였다.

웃음이 나왔다.

해밀턴에게 이런 고상한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닥쳐라, 이놈아."

그런 수제자를 향해 거친 말을 내뱉은 해밀턴.

하지만 수제자는 기죽지 않았다.

"어찌나 차를 좋아하시는지… 제가 대장 기술을 배우는 건지, 찻집에서 일을 배우는 건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오히려 한 수 더 나가는 수제자.

"이놈이!"

"으하하하!"

확실히 수제자도 해밀턴과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수제자는 짓궂은 웃음과 함께 해밀턴의 방에서 금세 모습을 감췄다.

"흠흠…."

수제자가 떠나간 뒤, 해밀턴은 목을 가다듬었다.

나와 박명철은 우리 계획에 대해서 해밀턴에게 이미 간략하게 설명을 해 놓은 상태였고.

홀짝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밀턴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뿐.

해밀턴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댔다.

전생의 해밀턴이었으면 이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욕이나 먹지 않았으면 다행이었을 테지만.

이렇게 해밀턴이 고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해밀턴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신중한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해밀턴의 장인정신 말이다.

그는 무슨 장비를 만들건,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만 상품으로 판매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나와 박명철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장비를 '양산'하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더라도 기본 장비를 적정 수준에서 타협하며 흩뿌리게 된다는 말이다.

어쩌면 나의 제안은 그의 신념을 부정하는 무례한 제안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일이다.

"원치 않으시면 거절해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나 역시 해밀턴의 신념을 존중하고 싶으니까.

하지만 나는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뒀다.

전생과는 달라진 지금의 해밀턴.

그리고 지금의 공방 역시 과거의 규모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만약 해밀턴이 과거처럼 계속해서 작은 공방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으면 나 역시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묘한 기류가 흘러가기를 잠시.

탁!

해밀턴이 탁자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해 보겠소."

"……!"

"헛…!"

나와 박명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괜찮겠습니까."

나는 다시 해밀턴의 의사를 확인했다.

"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아니,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지. 그렇지 않아도 내 재능을 이렇게 썩히는 것보다 조금 더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거든. 으하하하!"

해밀턴이 특유의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확실히… 많이 달라졌어.'

아니, 어쩌면 이게 해밀턴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당신 덕분이오."

해밀턴이 나를 보며 말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느끼기 시작했소. 그리고…."

해밀턴이 말끝을 흐렸다.

"스승님도 예전에 내게 그러셨지."

스승.

내가 15층의 마을에서 만났던 그 노인 대장장이 말이다.

"진정으로 훌륭한 대장장이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대장장이라고 말이오."

해밀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 조금은 아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소. 이전까지 나는 대장장이란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며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요새 들어 예전 스승님의 그 말씀이 머리를 떠돌았소."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때에 마침 그대가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해 왔온 것이지. 내심 놀랐소. 그대가 내 머릿속을 꿰뚫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로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답했다.

나는 그저 일말의 가능성에 배팅한 것뿐이다.

"어쨌든 그대는 정말 나의 은인이로군. 게다가 이제 마음먹었소."

해밀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훌륭한 기본 무구를 만들어내고, 그 무구를 가지고 스승님을 찾아뵙기로 말이오."

해밀턴을 그의 스승이 있는 곳에 데려갔을 때, 그가 그러지 않았던가.

언젠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무언가를 만들어냈을 때, 스승을 찾아가겠노라고.

이건 나로서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그였다면, 가장 화려하고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스승을 찾아갔을 텐데.

가장 기본적인 장비를 만들고, 그것을 들고 스승을 찾아가겠다는 이 발언은.

충분히 놀랄 만한 발언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요, 그대는. 나의 고집은 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인데. 그대와 대화를 나누면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기분이라니까."

그런 말을 하며 차를 한 모금 넘긴 해밀턴.

동시에.

"그러면…."

펄럭!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박명철은 품속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박명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밀턴에게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쏟아 놓기 시작했다.

해밀턴 역시 박명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장비를 보급하기 위해선 시설을 확충하고 장비를 보급할 유통망이 필요할 테니.

그 부분은 위드 길드에서 책임지기로 했다.

해밀턴은 온전히 장비 생산과 퀄리티 유지에만 신경 써 달라고 했고.

당연히 박명철은 이미 수익 모델도 구상해 놓은 상태였다.

해밀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