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콰직!
오러 블레이드가 예진희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콰콰콰콰쾅!
하지만 오러 블레이드가 닿은 건, 고작 예진희 한 명뿐만이 아니었고.
그 뒤로 서 있는 궁술 명가의 플레이어들 전부가 오러 블레이드의 마압에 휘감긴 채 목숨을 잃었다.
그 위로 쏟아지는 수많은 민첩성 포식 메시지와 함께.
"끄아아아아악!"
"미, 미쳤어! 미쳤다고오오오!"
"이, 인간이 아니야! 도망쳐! 도망쳐어어어어!"
간신히 공격 범위에서 빗겨나 있던 플레이어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놈들을 곱게 살려 보내 줄 생각 따위는 없다.
콰아아앙!
도망치는 이들의 꽁무니를 향해 지휘관의 외침을 사용했다.
굉음이 울려 퍼지며, 내가 서 있는 땅을 중심으로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은 풍경이었으니.
"그아아아악!"
"커허어어억!"
한순간에 플레이어들이 나자빠지고 뒤엉키기 시작했다.
"미, 미친… 미친 새끼!"
"허, 허어어억…."
살아남이 있는 체술 명가의 최강혁과 화랑 길드의 철기영.
"너희 둘만 남았군."
사실상 그동안 탑의 균형을 고착화했던 이들.
모두가 사라지고 고작 둘만 남아 있는 상태였으니.
"가라. 너희는 역사의 잔재로 사라져야 할 놈들이다."
나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감히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타이밍 미쳤네."
"그러게."
그 무렵 55층 마을에 있던 모든 플레이어들은 45층의 마을로 대피한 상태였다.
박명철은 진즉에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
처음 단상에 올라 그동안의 질서를 부정한 발언을 한 순간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명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즉시 후속 조치를 취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괜한 싸움에 휩싸이기 싫으면 달아나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동시에 강민에게 55층의 마을로 와달라는 메시지를 전송한 것이다.
명가의 마지막 몸부림을 짓밟을 수 있는 건 강민 밖에는 없다는 판단 덕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꿀꺽…."
"야, 이 새끼야. 꿀꺽을 지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아, 쫌."
김민희와 한동희는 괜히 긴장되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투닥대고 있었다.
현재 그들은 45층의 마을에 있는 위드의 건물에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다들 집중해."
아직도 혼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한동희와 김민희를 향해 박명철이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펄럭!
박명철은 서류 뭉치를 꺼냈다.
"이게 앞으로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야. 강민 씨가 미리 내게 언급했던 내용들을 그동안 내가 정리해 놓은 거야."
"……."
"다들 표정이 왜 그래? 강민 씨한테 다 맡겨 놓고 우리는 뒤에서 꿀만 빨면 된다, 뭐 그런 생각들 하고 있던 거야?"
그 말에 한동희와 김민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네버."
그들 역시 알고 있다.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누가 만들어 낸 결과물인지를 말이다.
"우리는 명가가 몰락했다는 가정을 두고 앞으로의 일들을 추진할 거야."
"예."
아직 강민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강민의 패배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은 박명철의 단호한 결정이다.
"가장 먼저."
펄럭!
박명철은 설계도를 펼쳤다.
"이 탑에 설치될 시설들이야. 탑의 1층에서부터 10층까지. 매 층마다 신규 플레이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설치해 놓을 거야. 거기에서 물약이나 장비 등을 구매하고 수리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춰 놓을 거다."
"인력 충원은요? 당장 그 인력을 충원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김민희의 날카로운 질문에 박명철이 눈을 빛냈다.
"이 부분들은 명가 산하 길드에서 당분간 책임지기로 했어."
"아, 그건 명가 산하 길드들이 책임지기로 했어요."
김민희의 질문에 답한 건, 한동희다.
"그런 셈이죠. 지금이야 무급이지만,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수익도 창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음…. 나쁘지 않네."
김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 동희. 너는 플레이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관리하게 될 거야. 우리가 가징 정보들을 제공할 수 있도록 더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고."
"예."
"그리고 민희 너."
"예. 시켜만 줘요."
"너는 직접 발로 뛸 일이 많을 거다."
그 말에 김민희가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좋아할 줄 알았어. 동희가 시스템을 구축하면, 너는 직접 발로 뛰면서 그것들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체계를 확실히 잡아야 될 거야. 특히 명가 산하의 길드들이 적어도 당분간은 헛짓거리 못 하게 꼼꼼히 체크해야 될 거고."
"그런 거 제가 또 잘 할 수 있죠."
김민희는 자신의 팔뚝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두 사람 다 인력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말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충분히 지원해 줄 테니까."
현재 인력이 넘칠 정도로 많아진 위드 길드다.
게다가 다들 열정 또한 넘쳐나는 상황이었으니, 두 사람의 지휘아래 탑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거야."
박명철이 서류를 다시 넘기며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 서류로 집중됐다.
"……."
그 서류 가장 윗부분에는 [국가, 기업과의 협조]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탑 밖과… 교류하겠다는 말이죠?"
"그래."
"현재 우리 길드에 탑에서 태어나 곧 성년이 되는 플레이어들이 몇 명이나 있지?"
"지금까지 서른 명이요."
"서른…. 조금 더 모았으면 좋겠는데."
"다른 길드들에게도 협조를 구해 볼게요. 적어도 백 명은 넘길 수 있을 거예요."
"오케이."
탑에서 태어나 성년이 된 플레이어들.
탑의 원주민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탑에서 태어난 이들은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성인이 되는 순간 플레이어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한다.
탑의 원주민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탑 밖으로 나간 뒤 다시 1층부터 탑을 오를 것인지.
"앞으로도 탑에서 태어난 플레이어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야 해."
"맡겨 주세요."
"그래. 그들을 집중적으로 교육시킬 생각이다. 그 사람들이 탑 밖과 소통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니까. 그렇게 탑 밖과 교류하며, 우리 대만힌국의 탑의 발전을 도모해야 해."
"말은 좋은데…말처럼 쉬울까요?
"쉽진 않겠지. 하지만 해야 할 일인 것도 맞아."
박명철이 다시금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생각해 봐. 우리가 처음 탑을 오를 때 얼마나 개고생했는지."
"……."
순간 두 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동료들을 잃어야 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들을 넘겨야만 했는가.
그때마다 슬픔을 삼키고 절망에 빠져야만 했다.
아무리 죽음에 그 누구보다 가까운 플레이어들이지만.
죽음이란 결코 쉽게 익숙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 시스템이 잘 정착만 되면… 불필요한 죽음은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동시에 우리 길드는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거고요."
"그렇지."
당연히 정보를 아무 대가 없이 제공할 생각은 없다.
그 정보를 제공하는 세력이 위드라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탑 밖에서부터 위드라는 이름을 듣게 될 플레이어들이 탑에 진입한 뒤 가장 먼저 찾게 될 길드가 어디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좋아요. 해봐요."
"해볼 만한 것 같습니다."
김민희와 한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불가능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만한 일이다.
지금 시점에서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사실상 오랜 시간 교류가 끊긴 탑 내부와 바깥 세계다.
이 제안을 탑 밖에서 어떻게 생각할지조차 미지수였으니.
하지만 박명철의 말 그대로다.
충분히 해 볼 만한 일이었고.
한 편으로는 꼭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앞으로 늘어날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그리고 동시에 위드의 세력이 훨씬 더 거대해질 수만 있다면.
탁!
박명철이 탁자를 내리쳤다.
"앞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다. 지금도 바빴지만… 몇 배는 더 바빠질 거야. 각오는 됐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과.
"오케이. 그럼 바로 움직여."
"예."
"알겠습니다."
김민희와 한동희는 자신들에게 맡겨진 서류를 들고 박명철의 집무실을 바쁘게 떠나갔다.
그리고 박명철은.
풀썩.
자신의 의자에 몸을 눕혔다.
"하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 역시 정신이 없는 상태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다.
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제대로 잠을 잔 게 언제인지조차 생각나지 않을 지경이다.
하지만 쉴 수가 없었다.
강민을 생각하면, 피곤하다가도 잠이 싹 달아나곤 했다.
'그 사람도… 인간이잖아.'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이 조금 낯설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하긴. 너무 말도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해.'
같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강민이 보여 왔던 행보들은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절로 자아냈다.
'그 사람도 가끔은 외롭고… 그럴까? 아니지. 외롭겠지. 어떻게 사람이 안 외롭겠어.'
박명철이 쓰게 웃었다.
단 한 번도 힘든 내색 따위는 하지 않았던 강민이다.
힘든 내색은커녕, 자신이 하는 일에 비하면 몇 배나 고되고 고통스러울 만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곤 했다.
'어쩌면 나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당연히 강민이 해내리라고.
당연히 강민이 해결해 주리라고.
'당연히라….'
정말 당연한 일이었을까.
복잡한 생각들이 뒤엉켰다.
"하하…, 참."
조금 허탈한 웃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톡- 톡- 톡-
박명철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리고 강민과 처음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운이 좋았어."
그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한동희와 김민희가 강민을 찾았고.
강민이 자신을 선택해준 그 날.
"열심히 해 보자. 언제 뒈질지 모르는 인생. 끝까지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런 말들을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는 점점 박명철의 집무실과 가까워졌고.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
옅은 미소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이 굳게 서 있는 남자.
그 남자를 본 순간, 박명철은 또 한 번 생각했다.
'그래. 원래 저런 사람이었지.'
그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내는 사람.
이런저런 계산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
그의 앞에 서면 머릿속을 유영하던 복잡한 생각 따위는 단칼에 정리되곤 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각이 정리됐다.
강민 앞에서는 그저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오셨군요."
언제나 그랬다.
담담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예."
저 짧은 대답 한 글자가 얼마나 힘이 되었던지.
강민의 대답에 박명철은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