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조금 전.
"뭐? 그 미친 새끼가 그딴 말을 지껄였다고?"
창술 명가의 소가주인, 구준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돌았군. 제정신이 아니야."
그는 지금 막, 조금 전 박명철이 했던 말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래.
그도 인정한다.
명가의 세력은 크게 기울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검술 명가가 역시도 이전 같지 않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마법 명가는 이미 진즉에 몰락해서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감히? 네놈들이? 우리의 은혜를 입은 벌레 주제에?"
구준회가 말했다.
"벌레 같은 것들이 기어오를 나무를 모르고 이렇게 기어오르다니."
명가의 선조들이 이 탑을 개척해내지 않았으면.
그리고 그 이후로 명가의 플레이어들의 업적이 아니었으면, 이 탑은 존재할 수 없었으리라고.
그는 뼛속 깊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에게 있어서 일반 플레이어들이란 명가의 업적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명가의 설 자리를 없앤다고? 으하하하하하!"
구준회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동안 가만히 있어 줬더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끝까지 기어오르려는 위드 길드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박살을 내줘야겠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동안 나름 조용히 잠자코 있던 창술 명가였다.
육체 계열로서는 검술 명가 다음가는 창술 명가였지만, 참고 있었다.
검술 명가가 무언가 해 주리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더 이상 검술 명가는 없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잠자코 있다가는, 저 위드라는 기생충들이 얼마나 더 날뛸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내 눈으로 그 꼴을 볼 수는 없지.'
이때야말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검술 명가가 사라졌고.
한강민이라는 플레이어가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들과 대적하고 있을 이때.
'이 타이밍을 놓치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거다.'
한강민.
그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김준석, 김원호.
그 괴물 같은 두 명을 혼자서 쓰러트린다고?
적어도 구준회의 상식 안에서 그런 일은 가능할 수가 없다.
'설령. 정말 만에 하나라도 한강민이 이긴다고 해도.'
불구가 되어 평생 누워 있어야겠지, 라는 말을 곱씹었다.
'어쨌든 지금이다. 지금 이 타이밍에 우리 명가가 나서서 저 기생충 거머리 같은 것들을 짓밟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라고 확신했다.
쿠웅!
구준회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까득
자신의 창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준비해라. 우리는 놈들을 쳐부순다. 그리고 다른 명가 머저리들에게도 말해. 이대로 있다가 뒈질 건지, 내 뒤를 따라서 다시 일어설 것인지.]
***
"…그래."
체술 명가의 최강혁.
그리고.
"젠장."
궁술 명가의 예진희.
"…망할 박명철…."
마지막으로 화랑 길드의 철기영.
모두는 구준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이곳에 철기영이 껴 있다는 게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철기영으로서도 마지막 떨어져 나온 동아줄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정말로 막다른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여기서 반격하지 못하면, 끝이다.'
이미 화랑 길드의 대부분은 길드를 이탈했다.
아직까지 화랑 길드에 붙어 있을 만한 담력을 가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가자."
철기영이 말했다.
그와 함께 그의 옆에 남아 있던 플레이어들이 무장을 갖췄다.
"모두 죽여버려야 한다. 우리를 돌아섰던 놈들을 절대 용서하면 안 돼."
철기영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길드 건물을 벗어났다.
건물을 포위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
하지만.
"…뭐지?"
조금 이상했다.
수가 크게 줄었다.
아니, 사실상 포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민망할 정도.
그저 건물의 문 앞에 몇 명의 플레이어가 서서 '감시'하고 있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흣."
철기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벌써 겁을 먹고 도망친 건가?"
그렇겠지.
현재 창술, 궁술, 체술 명가.
그리고 화랑 길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위드 길드 역시도 그 사실을 분명 알고 있을 테다.
"으흐하하하!"
철기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쉽게 꼬리를 내릴 녀석들이 그딴 말을 지껄였다고?"
더 이상 랭킹이 없어?
명가가 없어?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아무리 길드 하나가 나댄다고 해도, 결국 균형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루 이틀 만에 고착화된 균형이 아니다.
그리 쉽게 무너질 균형이었으면 이미 진즉에 무너졌을 테다.
"가자!"
철기영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 외침에 그를 따르던 플레이어들도 조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 꼴만 보자면, 정말로 자신들이 무서워서 위드에서 꽁무니를 뺀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도, 도망쳐!"
"몰려나오기 시작했어!"
실제로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위드의 플레이어들이 철기영이 나타남과 동시에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화랑 길드를 둘러싸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모두 사라졌고.
다른 명가들에서 같은 소식이 전해져 왔다.
[현재 포위하고 있던 병력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55층 전체에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조금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는 중이다.
'확실히….'
이상하다.
철기영의 날카로운 촉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플레이어들이 사라지는 건….'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뭐지?'
불길한 예감이 스쳐오고 있었다.
그렇게 철기영은 마을의 한복판에 도착했다.
저쪽에서 명가의 소가주들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철기영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이게 뭐지?"
예진희가 말했고.
"…뭔가…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군."
구준회가 답했다.
"……."
최강혁은 입술만 잘근 깨물고 있었다.
"박명철. 박명철은 어디 있지?"
철기영이 말했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있는가.
그 대신 그에게 향하는 건, 명가 소가주들의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그때였다.
저벅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남자는 너무도 태연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명가와 화랑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모여 있는 그 한 가운데로.
그 수만 해도 수백에 가까울 지경이었건만.
남자는 눈곱만큼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씩, 그리고 한 걸음씩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으니.
결국.
"다들 모여 있었군."
남자가 말했다.
동시에 모두는 직감했다.
'한강민.'
저게 바로 강민이라고.
아직 강민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이들조차 모두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는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확실한 건.
'검술 명가가….'
'그 검술 명가가?'
'기, 김준석….'
'김원호까지…!'
모두 사라졌다는 것.
여기에 강민이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밖에는 없다.
'검술 명가의 몰락.'
그리고.
그 검술 명가를 무너트린 게 바로.
'한…강민….'
그 남자가.
지금 자신들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말도 안 돼…!"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은 구준회의 앞에.
"뭐가 말이냐."
"어…?"
구준회가 눈을 껌뻑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직도 그의 뇌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명히 자신 앞에 강민이 서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저기에 서 있었는데…?'
눈을 한 번 깜빡인 그 찰나의 순간.
족히 봐도 10m넘는 거리를 다가왔다는 말인가?
대체 어떻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빠아아아악!
"……!!!!!"
그의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때문이었다.
"꺼…어…억…!"
그는 눈을 부릅뜬 채 고통이 느껴지는 근원지를 바라봤다.
자신의 복부였다.
그리고 자신의 복부 위로 닿아 있는 건, 강민의 주먹이었다.
'고, 고작… 고작 주먹에….'
무기도 아니다.
고적 주먹질 한 번에 이 정도의 고통이라니.
차라리 그뿐이었으면 다행일 것이다.
"어억…?!"
콰아아아아앙!
구준회의 몸이 저 먼 곳에 날아가서 처박혔다.
굉음과 함께 거센 먼지가 피어올랐고.
"꺼어억…."
구준회는 눈을 까뒤집은 채 혼절해 버렸다.
그 순간에도 구준회의 귀와 코,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곧 구준회의 숨은 끊어질 게 분명했다.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경악했다.
일격이다.
단 일격으로 창술 명가의 직계를 골로 보내 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입을 떡, 하고 벌린 채 손발을 부르르 떨며 강민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반격?
그런 생각은 감히 떠올릴 수조차 없다.
그런 건 애초에 '승산'이 보이는 상대에게나 할 수 있는 행위다.
조금 전의 한 장면으로 이미 충분히 깨달았다.
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포식자라는 것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건.
얼마나 많은 수가 모여 공격을 하건.
아무 의미가 없다, 라는 것을 말이다.
"아, 아…."
"그, 그…."
떨리는 신음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을 무렵.
정작 강민은 평온했다.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다만, 이렇게 나직이 중얼댔다.
"다음은…."
그리고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네가 좋겠군."
그와 함께.
콰아아아아아!
강민의 검 위로 백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치솟았다.
그 순간.
꽈아아아악!
단순히 마력을 뿜어냈을 뿐인데.
"끄으으윽!"
"꺼어어억!"
"크아아아아악!"
플레이어들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마압.
일명 마력의 압력.
압도적인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그저 마력을 일깨운 것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지닌 이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존재감을 가리키는 말.
파직! 콰직! 카득!
"크아아아아악!"
일개 플레이어들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대로 절명해 버린 플레이어들을 소가주들과 철기영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무슨…."
저벅
강민은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다음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오, 오지… 오지 마…! 오지마아아아아!"
궁술 명가의 플레이어 예진희였다.
저벅
하지만 강민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도, 도망… 도망가야….'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꽈아아아악!
그녀의 몸을 무언가 강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에게만 중력이 비정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
"아, 아…."
그 순간에도 강민은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쿠웅! 쿠우우웅! 쿠우우우우우웅!
그런 강민의 발소리는, 예진희의 귓가에 마치 거인의 발걸음처럼 거대하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후웅!
예진희를 향해 강민의 손에 들린 거대한 백색의 기운이 향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