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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169화 (169/277)

169화

금속이 뿜어내는 빛은 점점 더 강해졌고, 이내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렇게 내 시야는 완전히 붉은색으로 뒤덮였다.

***

"……."

"주인님… 이게 뭐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와 몰른은 지금 대기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와 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장소는 알 것 같았다.

다만 내가 모르겠다고 한 건, 이 상황이 대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건 탑의 1층이다.'

모를 리가 없다.

이미 두 번이나 거쳐 왔던 곳이다.

이전의 몸으로 한 번.

지금의 몸으로 또 한 번.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르다.

분명 탑의 1층이지만, 지금의 몸으로 보고 있는 탑의 1층과는 또 다르다.

'분명히.'

과거다.

아주 먼 과거.

탑의 1층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고블린이 떠돌고 있다는 것 뿐.

그 외의 모든 것은 내가 알고 있는 탑의 1층과는 많이 달랐다.

'설마.'

문득 스쳐 지나간 생각.

내가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건, 조금 전 알 수 없는 빛에 휩싸인 뒤였다.

'그 빛의 근원인 알 수 없는 금속. 그게 혈계의 근원이고. 그 금속의 빛을 통해 내가 여기에 와 있는 거라면.'

지금 나는 혈계의.

동시에 어쩌면 탑의 시작점에 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아직 성급하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였다.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 어떻게 하죠?"

"우선 가야지. 그렇게 큰소리치고 들어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잖아."

"돌아갈 수는 있고? 이미 탑의 문은 닫혔어. 돌아갈 방법도 없다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걸음 소리와 말소리는 점점 나와 가까워졌다.

'저들은 분명… 이 탑에 처음 발을 디딘 이들일 거다.'

대화를 통해 유추해 낸 결과였다.

확실하다.

그리고 그 말은.

'저들이 바로 혈계를 처음 손에 넣었다는 최초의 5인들.'

지금의 명가를 있게 한.

명가의 선조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들의 발소리가 코너를 돌아 내가 있는 곳에 가까워진 순간.

"……!"

그들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후욱… 후욱… 뒈지겠군. 대체 고블린들이 얼마나 많은지."

"조금 쉬었다 갈까요?"

뭐지?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저들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혹시.'

저들은 나를 보지 못하는 건가?

긴장된 마음으로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가방에 챙겨 온 음식을 꺼내 나누기 시작했다.

'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그들의 바로 옆으로 다가갔음에도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웅!

나는 그들의 몸조차 만질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환상이라는 뜻이다.

붉은 금속의 알 수 없는 빛이 보여주는 환상.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이 탑의 시작점으로 내가 와 있다는 말이겠지.

'맙소사.'

"주, 주인님…."

몰른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고.

"쉿."

나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지금은, 조금 더 저들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김판호, 박계석, 최창현, 구지민, 예석준.

그리고 그 외의 다섯 명.

그들은 바로 대한민국의 플레이어들 중 최초로 탑에 발을 내디딘 이들이었다.

이 탑이 생기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탑에 오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 지구에 솟아난 여러 개의 탑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이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디딘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외국에서 들려오던 소식들이 진짜였어요."

"…진짜였겠지."

"이렇게 우리도 여기에서 죽게 되는 걸까요? 외국에서도 아직 그 누구도 탑 밖으로 나온 플레이어는 없다고 했잖아요."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열 명의 플레이어들은 빵쪼가리를 뜯어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들을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탑에 올랐다.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이 탑의 비밀을 밝혀내고, 다시 지구로 귀환한다면 그들을 영웅으로 추대하고 대대로 그들의 이름이 뻗어나갈 수 있게 도와준다는 약속을 받은 상태다.

"영웅은 개뿔. X발! 그냥 뒈지게 생겼잖아!"

"약한 소리 하지 마. 나갈 수 있어. 조금만 더 힘내 보자."

열 명의 의견은 정확히 반으로 나뉘었다.

절망해서 포기하기 시작한 다섯과, 그들을 독려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는 다섯 명.

"그래.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한 남자가 말했다.

그의 이름은 홍석훈이었다.

그는 이 무리의 실질적 리더였고.

그가 다른 아홉 명을 독려한 덕분에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X발! 아직도 여기가 별천지 같아? 동화 속 같냐고! 현실이야! 현실! 우리는 X됐다고! 제발 정신 좀 차려!"

한 사람이 소리쳤다.

김판호다.

그가 바로 훗날 검술 명가의 선조가 될 남자였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크게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

"파, 판호야. 흥분하지 마!"

홍석훈이 김판호에게 말했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자신의 커다란 덩치와 패기만을 믿고 탑에 들어온 김판호는 고작 고블린이라는 몬스터 앞에서 커다란 벽에 가로막혔다.

타고난 장사라고 불리던 그 힘조차 고블린 앞에서는 어린애나 다름없었으니.

그가 느끼고 있는 절망감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 죽을 거야. 우리는 다 죽을 거라고…. 죽고 말 거야…."

그 옆에서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채 좌절에 빠져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계석이다.

"하…. 오빠. 우선 우리라도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우지혜라는 플레이어가 홍석훈에게 말했다.

"……."

홍석훈은 복잡한 시선으로 절망에 빠져 있는 다섯 명을 바라봤다.

"얘들… 여기에 두고 가면 다 죽을 거야."

"…그렇다고 우리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같이 가야지. 우리가 나 혼자 살자고 여기에 들어온 건 아니잖아. 나는 반드시 너희 모두와 함께 탑 밖으로 나갈 거다. 반드시."

홍석훈이 말했다.

그 말에 우지혜는 인상을 찌푸렸다.

동시에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는 다섯 명을 흘겼다.

"그럼… 우선 팀을 나눠서 여기를 수색해 봐요."

그때 한 남자가 말했고.

"그래. 그게 낫겠다. 먼저 이 주변을 조금 살펴보자. 최대한 고블린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판단되면 여기에서 하룻밤 정도 묵기로 하고."

"예. 좋아요."

홍석훈의 판단에 아직 멀쩡한 네 명의 플레이어가 동의했다.

그렇게 그들은 팀을 나눠 그 근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

"괜찮아요. 이 근처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저쪽도 마찬가지야. 하루 정도는 쉴 수 있겠어."

하나 둘 수색을 떠났던 플레이어가 도착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이거… 이거 한번 볼래?"

혼자 수색하러 떠났던 홍석훈이 조금은 당황한 기색으로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금속 하나가 들려 있었다.

붉은색 금속이다.

지구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속이었고.

"이게 뭐…죠?"

"글쎄. 혹시 탑에서만 구할 수 있는 보석 같은 게 아닐까? 게임으로 치면…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라던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문제는.

"옆에 정보창이 떠 있기는 한데 이상한 글씨밖에는 보이지 않아. 용도를 전혀 알 수 없어."

홍석훈이 미간을 좁혔다.

김판호 역시 흐릿한 시선으로 홍석훈이 들고 있는 금속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두근!

"……?"

김판호는 홍석훈에 손에 들린 금속을 마주했고.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 그…."

김판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금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응?"

홍석훈은 김판호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금속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저 녀석 눈이 풀려있어.'

제정신이 아니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판호야. 잠깐."

김판호를 막아선 홍석훈.

하지만.

"내, 내놔! 내놓으라고!"

김판호는 다짜고짜 홍석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왜 이래!"

우지혜는 화가 나서 김판호를 밀쳤다.

덩치는 작지만, 레벨이 김판호보다 훨씬 높았던 우지혜는 쉽게 김판호를 떨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꺼지라고! X년아!"

김판호가 우지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를 어깨로 밀쳤다.

"꺅!"

갑작스러운 충격에 바닥에 자빠진 우지혜와.

"내, 내놔! 내놔아아아아!"

김판호가 다시 홍석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동공이 풀려 있었고,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린 것 같았다.

그 순간.

[내게 와라.]

김판호의 귓가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김판호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으으아아아!"

김판호가 괴성을 내질렀다.

"……?!"

그때 홍석훈은 볼 수 있었다.

순식간이지만, 붉게 물들었던 김판호의 눈을.

그리고 생각했다.

'버려야 한다.'

이 금속은 희귀한 재료 따위가 아니다.

사악한 힘을 가진 물건이다, 라고.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로 금속을 쪼개려던 순간.

"하지마아아아아!"

푸훅!

"……?!"

홍석훈의 복부를 관통하는 차가운 감촉.

"꺄아아아악!"

"이 미친 새끼야! 뭐 하는 짓이야!"

"이 새끼 떼어 내! 당장 떼어 내라고!"

다른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 다급히 김판호를 떼어 내기 위해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 안 움직여!"

"힘이 너무 세!"

그들 넷은 김판호 하나를 떼어 낼 수 없었다.

갑작스레 다 죽어가던 김판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괴력이 솟구친 것이다.

"파, 판호… 너…."

홍석훈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복부에서 피가 솟구쳤다.

기어코 입에서도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으니.

"끄어… 끄어억…."

풀썩

홍석훈의 몸이 쓰러져 내렸다.

"흐흐… 흐흐흐흐…."

하지만 김판호는 홍석훈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오빠! 석훈 오빠!"

"석훈아아아아!"

네 명의 플레이어가 다급히 쓰러진 홍석훈을 향해 다가갔다.

그 순간에도 김판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또르륵-

홍석훈의 손에서 떨어져 나와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붉은 금속이었다.

결국.

홱!

김판호는 붉은 금속을 손에 넣었다.

"으하하하… 으흐하하하하하!"

김판호가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네 명은 두려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김판호를 바라봤다.

동시에.

[나를… 나를 네 가슴에 품어라.]

다시 김판호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의 그 목소리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굳이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아, 아아…."

김판호는 귀신에 홀린 듯 붉은 금속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고.

콰득! 까드드득!

붉은 금속이 김판호의 가슴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

나는 다시 내가 원래 있던 대기실로 돌아왔다.

"……."

"주, 주인… 주인님…."

조금 전 눈앞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보며 나와 몰른은 말을 잃었다.

김판호라는 남자는 결국 붉은 금속을 완전히 흡수했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네 명의 플레이어를 순식간에 도륙했다.

'…분명 혈계의 능력이다.'

나 역시 흡수해서 가지고 있는 그 천골지체.

붉은 금속을 흡수한 순간 김판호에게 그 혈계의 능력이 생겨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전 우지혜라는 플레이어에게 밀려났던 김판호가 한순간에 저런 괴력을 내뿜을 수 있는 게 말이 되질 않았으니까.

"이게 바로…."

혈계가 시작된 첫 순간의 모습들.

설계자가 내게 말했던 그 이야기의 실체를 마주한 것이다.

그 이후로 펼쳐진 장면에 대한 환상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다른 네 명도 김판호와 마찬가지로 혈계를 손에 넣었고, 결국 탑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

역사는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 테지.

저들은 탑 밖으로 나가 영웅이 되었고.

다른 다섯 명에 대한 이야기는 완전히 지워 버렸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전생은커녕, 이 시점에서조차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

다시 한번 그들의 가증스러움에 역겨움이 치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은 녀석들도 쓸어버려야겠어.'

아직 남아 있는 세 개의 명가.

조금 유예 시간을 주려고 했지만.

이 장면을 보고 나니, 명가라는 존재들에 대한 역겨움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박명철 : 강민 씨. 55층 마을로 내려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박명철의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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