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장내가 단 한 번에 조용해졌다.
한동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는 정반대의 장면이다.
'후아….'
한동희는 그제야 겨우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돌릴 수 있었고.
'야, 고생했다?'
그 옆으로 따라 올라온 김민희는 한동희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위쪽은 어때요?'
'…나중에 말해 줄게.'
김민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본 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김민희 역시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들이 본다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초인이었지만.
그런 김민희가 보기에도 강민의 모습은.
'…….'
몸에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다.
그게 정말 자신과 같은 플레이어가 맞기는 한 건지.
대기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에 봤던 그 장면은 도무지 잊히질 않았다.
김준석의 그 끔찍한 모습을 말이다.
김민희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을 때.
"많은 것들이 궁금하실 것으로 압니다."
다시 박명철의 입이 열렸다.
박명철의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억압적이지는 않지만, 박명철의 말에는 큰 무게감이 실려 있었으니.
"핵심부터 말씀드리자면, 더 이상 이 탑에 명가가 설 자리는 없어질 겁니다."
"……!"
그곳에 모인 수백 명도 넘는 플레이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명가의 설 자리를 없앤다니.
대한민국의 플레이어들이 탑을 오르기 전부터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던 것이 바로 명가였건만.
"며, 명가가… 말 한마디로 없어질 만한… 것입니까?"
누군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따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말 한마디라면 없어지지 않겠지요."
박명철이 답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 한마디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겁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발언에 다시 한번 충격받은 플레이어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여러분의 눈으로 명가의 몰락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폭탄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반박도, 질문도 말이다.
그저 멍한 눈으로 담담하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뱉어내는 박명철을 바라보고 있을 뿐.
"우선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혼란스럽게 해 드린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이 탑에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압제와 폭정 따위는 없습니다."
믿지 못하겠다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박명철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당연한 반응들이다.
자리가 사람이 만든다는 그 말 때문이다.
이 상태라면 위드 길드는 단연코 탑의 독보적으로 강성한 세력이 될 것이고.
그 길드의 수장인 박명철은 저들의 입장에선 왕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박명철은 자신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것 때문이다.
이 자리에 올라와 있는 것도.
명가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도.
자신의 업적이 아닌, 한강민이라는 사람의 업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정작 그 사람은 이따위 권력에는 욕심이 없어.'
신기한 사람이다.
동시에 경이로운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그 사람이었으면… 그럴 수 있을까?'
조금 전 봤던 강민의 그 압도적인 무력을 떠올려 봤다.
말도 안 되는 힘이다.
그런 힘을 가지고서.
아니, 그 절반만 되는 힘을 손에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강민처럼 순수하고 끝없이 힘만을 추구할 수 있을까.
그저 옆은 돌아보지 않은 채 끝없이 탑을 오르는 데에만 모든 열정을 쏟을 수 있을까?
'힘들겠지.'
박명철 역시 인간이고.
권력을 탐하며 명예를 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강민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부패하고 타락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자신이 그러지 않으리라고 확실할 수 있는 이유는 말했듯 강민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 자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위드 길드를 만든 건 자신이지만, 지금의 위드 길드 역시 사실상 강민의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강민 씨가 없으면, 나도, 이 길드도 없다.'
그것뿐이다.
그러니 강민과 함께 탑을 오르고 강민이 지시했던 대로 이 탑을 변화시키는 것만이 자신이 할 일이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저의 이 말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날 제 스스로 이 길드를 없앨 테니까요."
박명철이 그렇게 말했고.
꿀꺽
"……."
"하하…."
"허허허…."
여기저기에서 흘러나오는 짧은 탄식들.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겁니다. 많이들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명철은 고개 숙여 플레이어들에게 인사했다.
그렇게 단상 아래로 걸음을 옮기는 박명철.
휘청!
박명철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안 그래도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차에, 단상을 내려오며 다리의 힘이 풀린 것이다.
척!
한동희가 급히 박명철의 몸을 붙들었다.
"너무 긴장한 거 아니에요?"
한동희의 물음에.
"긴장? 내가 긴장을 했겠냐?"
박명철이 말했다.
"그럼 왜…."
"……."
"……."
그때 한동희는 박명철과 김민희의 표정이 똑같다는 걸 발견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지금 두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저 위쪽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라는 걸.
"아니, 대체 뭘 봤길래…."
"일단… 어디 앉을 데로 좀 가자."
박명철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
"흐음…."
엉망이다.
대기실은 무너지기 직전이다.
김준석을 따라왔던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은 이미 공격에 휩싸인 채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무너진 대기실은 설계자가 알아서 고쳐 주리라고 믿고.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김준석 말이다.
이미 놈의 몸은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미 초감각으로 파악하기로도 놈의 생명의 기운은 완전히 꺼져 있는 상대였다.
'언데드.'
그래.
지금 놈은 좀비와 같은 언데드의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베어도 죽지 않아.'
벌써 몇 번이나 놈의 몸을 베어냈지만, 잘려나간 부분은 1초도 되지 않아 회복되기 일쑤였다.
"후우…."
놈과 나는 잠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나를 이길 수 없다.
놈의 힘이 계속해서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만, 아무리 그래도 나를 따라올 수 없었다.
이미 힘은 3000을 훌쩍 넘었고, 다른 스탯들 역시도 2000중, 후반대를 넘나들고 있는 상태다.
전생의 김준석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수준이니, 지금 김준석이 강해져 봐야 내 손바닥 안이라는 뜻이다.
'이대로라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놈을 완전히 분쇄해 버리는 것이다.
재생되기 전에 잘라내고.
그렇게 잘라낸 부분이 또 재생되기 전에 다시 잘라낸다.
그것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한다면 결국 재생되지 않는 수준까지 분쇄해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해 보는 수밖에.'
그 즉시 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내가 움직이는 동시에 놈 역시 빠르게 반응했다.
콰아아앙!
두 개의 검이 충돌했다.
김준석의 몸이 다시 한번 뒤틀렸다.
역시나 빠르게 회복하려 했지만.
콰직!
나는 빠르게 놈의 몸을 베어냈다.
"크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는 김준석의 몸이 움직였다.
움직이는 동시에 몸이 재생되고 있었지만.
콰아앙!
다시 한번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공격을 막아냈지만.
빠직!
놈의 몸은 또 한 번 크게 뒤틀렸다.
쾅! 콰쾅! 콰득! 콰직!
벌써 몇 번이나 놈을 베어냈는지조차 모르겠다.
하지만 놈은 죽지 않았다.
내가 빠르게 베어낼수록 놈의 재생 속도는 더욱더 빨라졌으니.
'이게 대체 무슨….'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우웅!
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순간.
"그륵!"
김준석의 붉게 물든 눈이 한 번 껌뻑였다.
'아….'
생각해 보니.
이 검은 탑의 파편이다.
그리고 이 탑은….
'저 녀석의 몸체.'
나는 조금 더 속도를 높였다.
갑작스럽게 이런 반응이 왔다는 건, 분명히 어느 정도 끝에 도달했다는 뜻이 아닌가.
카직! 콰직! 파직!
베어내고, 또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그리고 다시.
우우웅!
검이 진동했다.
빠드득!
김준석의 몸 한가운데에서 작은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됐다.'
내가 공격한 부분도 아니었건만, 균열이 일어난다는 건.
분명 내 검과 김준석의 몸이 어떤 반응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의 공방이 오가고, 김준석의 몸이 셀 수 없이 잘리고 뒤틀리고 회복되기를 반목했을 무렵.
우우우웅!
검이 더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빠드드득!
김준석의 가슴팍에서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
금속이다.
붉은색 금속.
김준석의 검강과 똑같은 색의….
'어쩌면 저것이….'
혈계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급히 김준석의 가슴을 뚫고 나온 금속을 낚아챘다.
그와 함께.
"끄아아아아아아악!"
김준석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금속을 뜯어내기 위해 더욱더 힘을 줬다.
콰득! 콰드득!
"놔! 놔아아아아! 놔아아아아아!"
가슴팍에서 뻗어 나온 알 수 없는 물질이 금속을 꽉 붙들었지만, 내 힘을 버텨내지는 못했고.
파직!
결국 나는 금속을 떼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김준석의 몸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처럼 쪼개지고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김준석의 몸은.
투둑- 투두둑-
이내 가루가 되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김준석의 가슴에서 뜯어낸 금속만은 사라지지 않은 채 내 손에 남아 있었다.
확실하다.
이게 바로 혈계를 만들어 낸 근원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 탑의 비밀에 닿을 수 있는 증거물일지도 모른다.
[■□■■□]
[ㄵ■@#□!■$]
그 옆에 창 하나가 떠오르긴 했지만, 읽어낼 수 있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
'우선은 챙겨 둬야겠어.'
나는 금속을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었다.
다행히도 인벤토리에 수납하는 건 가능했으니.
"후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드디어.'
검술 명가를 무너트렸다.
물론 아직 놈들의 세력은 남아 있을 테지만.
가주와 소가주 두 사람이 내 손에 죽었다.
게다가 다른 직, 방계의 플레이어들 역시 사라진 이 시점에서 검술 명가가 다시 일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끝은 아니지.'
아직도 이 탑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사라진 것도 아니다.
'남은 명가의 플레이어들은….'
언젠가 처치해야 할 테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아직 그들을 통해 얻어낼 것들이 많아.'
어쨌든 그들 모두가 탑의 정상에서 오래도록 군림했던 이들.
그들이 가진 정보와 자금 등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빼앗은 뒤에 없앤다.'
그리고 이쯤이면 굳이 내 손으로 할 필요도 없으리라.
'위드 길드와 다른 길드들이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
우선은 탑을 오르는 게 먼저다.
내가 죽어야만 했던 70층.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질 새로운 세상.
'내가 직접 개척한다.'
그렇게 나는 걸음을 옮겼다.
65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하지만 그때.
두근!
"……?!"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뭐지?
몸이 지친 건가?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괴물 같은 녀석과 싸웠다면, 피로가 쌓였을 수밖에 없을 테니.
"우선 물약을…."
마시기 위해 인벤토리를 펼친 그 순간.
두근!
다시 한번 심장이 격동했다.
그리고 인벤토리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의 근원은.
"금속…."
조금 전 김준석의 가슴에서 뜯어냈던 그 금속이었다.
그때였다.
촤아아아악!
금속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