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무슨….'
나도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준석의 기세가 갑자기 뒤바뀌었다.
아니, 기세뿐만이 아니다.
김준석의 몸 전체에서 이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는.
'그 녀석인가?'
그 녀석이란 바로 탑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탑의 근원이 되었던 그 존재.
혈계를 전해줬다던.
명가의 선조들에게 혈계를 넘겼다던 그 존재의 기운이 깨어난 것이라면.
'젠장.'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만큼 지금 김준석이 내뿜는 기세는 결코 무시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피해요!"
내가 박명철과 김민희를 향해 소리쳤다.
"가, 강민 씨는!"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여기에 휘말리면 다 죽을 겁니다!"
"아, 알겠어요!"
박명철과 김민희는 다급히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몰른 씨! 같이 가요!"
김민희가 몰른을 향해 외쳤다.
"시, 싫어요오오!"
"하, 하지만!"
"저, 저는 주인님 놔두고 갈 수 없어요오오!"
몰른의 외침에 박명철과 김민희는 시선을 교환했고.
"가, 강민 씨! 저희는 55층 마을에 가 있을게요!"
결국 몰른의 고집을 꺾지 못한 그들은 서둘러 길드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마력을 불어 넣음과 동시에 오러 블레이드가 다시 갈무리되며 맹렬하게 솟구쳤다.
뇌전검과 충격파의 기운이 길게 뻗은 오러 블레이드를 뒤감았고.
콰콰콰콰!
나를 향해 쇄도하는 김준석을 중심으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대기실 전체가 크게 흔들리며 천장과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조금 전 상대했던 김원호조차도 어린애로 보일 만큼 강대한 기운이었으니.
"죽어어어어어!"
김준석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검이 나를 향했다.
김준석의 검 위로 뻗어 나온 검기, 아니 검강은.
콰콰콰콰!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갈무리되지 않은.
훨씬 더 파괴적이고 폭발적인 검강.
그와 함께 검강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색.
푸르게 타오르던 검강이 완전히 붉은색으로 뒤바뀐 순간.
번쩍!
김준석의 눈동자가 완전히 붉게 뒤바뀌었고.
그의 전신에서 검강의 색과 같은 붉은 기운이 솟구쳐 나왔다.
"크으으아아아아!"
김준석이 포효했다.
마치 맹수가 울부짖는 것만 같은 포효였다.
그가 나와 지척으로 가까워졌다.
김민희와 박명철은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과 대기실을 벗어난 상태였고.
몰른만이 저 먼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나는 김준석을 바라봤다.
그의 검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와라."
내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도 빨랐다.
눈으로 포착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초감각 덕분에 그의 숨결 하나하나가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척!
발을 구르며.
부웅!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닿았다.
터어엉!
김준석의 붉은 검강과 나의 백색의 오러가 충돌한 그 순간.
콰아아앙!
나와 김준석을 중심으로 맹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쿠쿠쿠쿠!
충돌한 부분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파동은 지축을 뒤흔들었다.
대기실이 다시 한번 크게 진동했다.
"크으윽!"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가진 방어력을 꿰뚫고 이 정도의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크아아아아악!"
김준석의 전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가 나에게 가한 피해가 그에게 반사되었을 테니까.
콰직! 콰득! 콰지지직!
김준석의 신체가 뒤틀린다.
기괴하게 비틀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내.
"그르르륵!"
김준석의 몸이 다시 원래의 상태를 되찾기 시작했다.
'놈은 김준석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의 김준석이라면 조금 전의 충격으로 죽었어야만 했다.
아니, 그 전에 이 정도의 위력을 절대로 뿜어낼 수 없었겠지.
'일단….'
놈의 힘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발을 굴렀다.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을 갈랐다.
쩌어어어엉!
김준석은 어렵지 않게 내 공격을 막아냈다.
빠직!
다시 한번 김준석의 양 팔이 뒤틀렸다.
다리가 기괴하게 꺾였지만.
"그으으으윽!"
짧은 신음과 함께 뒤틀린 관절과 근육이 원상태를 회복했다.
'그렇다는 거지.'
대강 현재 놈의 상태를 파악했다.
신체 능력이 말도 안 될 정도로 폭증했다.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놈이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빨라지고,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아래니까.
'문제는.'
저 말도 안 되는 재생력.
몇 번이나 무너져내린 신체를 1초도 되지 않아 재생시키는 능력이라니.
'잘라내야 하는 건가.'
이런 물리적인 타격으로는 놈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베어낸다고 해서 그게 또 재생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해 보는 수밖에.'
계산을 마친 즉시 몸을 움직였다.
김준석의 검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엄청난 속도다.
하지만 초감각의 포착 능력으로 이미 놈의 공격 루트는 진즉에 파악해 놓은 상태다.
홱!
몸을 비틀었다.
놈의 공격을 피해냈다.
콰아아앙!
놈의 붉은 검강이 바닥을 내리쳤다.
출렁!
바닥 전체가 크게 일렁였고.
그 파동이 대기실 전체로 전해졌다.
쿠르르르릉!
다시 한번 흔들리는 대기실의 벽과 천장이 쏟아져 내렸다.
'엉망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휘릭!
오러 블레이드가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아직 김준석은 자세를 가다듬지 못한 상태였으니.
'들어갔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쩌어어어엉!
"……."
김준석은 그 찰나에 내 공격을 다시 막아냈다.
"어이가 없군."
조금 전보다 더 빨라졌다.
그리고 더 강해졌다.
붉은 검강은 더욱더 거대해졌다.
"해 보자는 건가."
나는 이를 갈았다.
그 순간.
[오라… 네놈을… 씹어 먹어… 주마…]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김준석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직감했다.
'먹힌 것인가.'
동시에 나는 혈계라는 것의 본질을 목격한 것이나 다름없다.
피를 타고 전해지는 그 능력의 본질은, 결국 이 탑의 본체인.
한 세계를 집어삼키는 괴수의 일부를 자손에게 전하는 일종의 유전병인 셈일 테지.
그게 바로 혈계가 피를 통해 전해질 수 있는 이유였으리라.
자신의 힘을 플레이어들의 몸에 심어 넣은 채, 설계자들에 의해 봉인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힘을 존속시키는 것.
'끔찍한 능력이야.'
그것도 모른 채 혈계라는 힘에 취해있던 녀석들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손으로 끝내주마.'
나는 다시 움직였다.
김준석의 맹공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나왔지만.
콰앙! 콰콰쾅!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번. 우선 한 번만 정확히 공격을 성공하면 된다.'
서두르지 말고 정확한 일격을 통해 놈의 몸통을 쪼개 버릴 생각이다.
***
그 무렵 탑의 55층 마을.
현재 마을 중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55층의 마을은 격변하고 있었다.
조금 전, 김준석이 본당을 떠나 어디론가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뒤를 따라 검술 명가의 직계, 방계 너나 할 것 없이 본당을 비웠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장로들 뿐이라는 소식마저 전해진 상황이다.
"미쳤어."
"이거, 이러다가 진짜로…."
위드 길드가 검술 명가를 무너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들이 점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텅 빈 검술 명가의 본당과.
체술, 궁술, 창술 명가를 포위하고 있는 위드와 전 명가 산하 길드의 플레이어들.
"이게 대체 무슨…."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그 와중에 화랑 길드는 조용했다.
철기영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같았으면 탑의 중대사에 있어서 절대 빠지지 않고 앞장서서 의견을 어필하던 철기영이었건만.
아직까지 철기영이 조용하다는 건, 플레이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황이 지속될수록 혼란만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추측은 또 다른 추측을 낳았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수많은 음모론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위드 길드랑 검술 명가랑 짜고 치는 거 아니야?"
"그게 뭔 개소리야!"
"생각해 봐! 검술 명가가 다른 명가 버렸다는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렇지. 그래서 뭐?"
"거기에서 검술 명가가 위드 길드랑 짜고… 둘이 편을 먹는 거지."
"그래서 얻는 게 뭔데?"
"뭐긴! 절대 권력! 지는 해인 화랑을 버리고 뜨는 해인 위드 길드랑 검술 명가가 다 해 쳐먹겠다는 거 아니야!"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측까지도 나돌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었음에도 위드 길드의 고위 인사가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잠시 모습을 감췄을 뿐, 그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으니까.
"말도 안 돼…."
"원래 올라가면 권력을 탐하게 되는 법이라고. 그동안 위드 길드가 좋은 이미지로 치장하고 있던 것도 이 순간을 위한 빌드업일 수도 있다는 거지!"
"미친!"
어느덧 말도 안 되는 추측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질 지경이었다.
물론 다른 추측들도 난무했다.
위드 길드가 검술 명가의 개가 되었다거나.
화랑 길드와 위드 길드가 하나로 합치려는 게 아니냐는 등….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탑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어가고 있었으니.
"위드 길드는 해명하라!"
"해명하라! 그동안 우리가 보냈던 지지와 응원을 이렇게 배신하면 안 되지!"
위드 길드에게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무리도 생겨났다.
그때였다.
저벅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55층 마을의 한 가운데.
그동안 화랑 길드의 철기영이 탑 내부의 상황에 대해서 공표하는 단상 위로.
"……!"
그의 망토에는 위드 길드를 나타내는 잡초 문양의 그림이 그려 있었으니.
"위드 길드다!"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그 말과 함께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 소식은 빠르게 탑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탑의 이곳저곳에서 탑을 돌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플레이어들도 한데 모였고.
55층에 올라올 수 없는 플레이어들에게는 지인들의 메시지를 통해서, 혹은 길드의 메시지를 통해서 이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아, 아."
단상 위로 올라선 남자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바로 한동희였다.
'젠장.'
태연한 얼굴과는 반대로 한동희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렇게 나대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하지만 어쩌랴.
지금 저 위쪽에서 검술 명가를 마주하고 있는 박명철과 김민희 대신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올 수밖에 없었으니.
"안녕하십니까. 위드 길드의 한동흽니다."
한동희가 말했다.
그의 말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침묵도 잠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말해 주세요!"
"정말 검술 명가 쪽으로 돌아선 겁니까!"
한동희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질문들.
'아오, 진짜. 내가 이래서 싫다고.'
한동희는 뒤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스타일이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은 영 내키지 않았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용히 해 주세요!"
그럼에도 소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전면에서 나서서 행동한 적 없는 한동희였던 만큼 사람들의 혼란을 잠재울만한 영향력은 없었던 것이다.
'아, 미치겠네. 어떡하지? 길드장님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한동희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때.
저벅
옆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아…?!"
그리고 그 남자를 본 순간, 한동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박명철이었다.
"위드 길드의 길드장, 박명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