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말도 안 되는 옵션들이다.
우선 마나 번.
상대가 가진 마나의 99%를 일시적으로 태워 없앤다는 건, 마력을 이용해 전투하는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특히 마법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라면….'
말이 99%일 뿐, 사실상 모든 마나를 없앤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일 것이다.
'물론 괴물같이 마력 스탯을 쌓은 녀석이 있다면 그 1%만으로도 충분한 변수를 만들어 낼 순 있겠지만….'
적어도 날 위협할 정도로 강력한 스킬이라면 고작 1% 남은 마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30분이라는 쿨타임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성가신 한 명을 확실하게 보내 버리는 데에는 충분한 능력인 것은 분명하다.
그다음으로 마력 보호막.
이것 역시 탐나는 능력이다.
무려 50%의 피해를 흡수하는 능력.
'게다가 패시브라면.'
웬만큼 훌륭한 장비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라.
장비라는 것은 결국 파괴되기 마련이지만, 저 능력만 손에 얻는다면 내 몸 자체가 훌륭한 방어구가 되어 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다음으로는 마력 자기장.
이것 역시 탐난다.
이미 나에게는 다수의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지휘관의 외침이라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마력 자기장은 완벽히 지휘관의 외침의 상위 호환이야.'
그렇지 않은가.
지휘관의 외침은 일시적인 능력이지만, 자기장은 지속적으로 상대에게 꾸준한 피해를 입힌다.
게다가 공격력이 마력 수치에 비례한다는 옵션을 보라.
2500이 넘는 마력이면, 대체 얼마나 강력할지 정확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군.'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차려 놓고서 단 하나만 고르라니.
이제 곧 있을 검술 명가와의 싸움 따위는 이미 안중에서 사라졌다.
이미 그들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
'과연 마력의 초월 스탯이라는 건가.'
육체 스탯에 비해서 쌓아 올리는 게 몇 배는 힘든 마력.
그런 마력이 2500에 도달한 순간 쏟아지는 선물.
'후우.'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 번은 아깝지만 제외한다.'
우선 30분이라는 쿨타임 때문에 잘 손이 가질 않는다.
훌륭한 능력인 건 분명하다만, 앞으로 어떤 괴물들을 만날지 모르는데 30분이라는 쿨타임은 리스크가 크다.
'그러면 남은 건, 공격이냐 방어냐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답은 금방 좁혀졌다.
'방어력.'
지금 내 공격력은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
오러 블레이드와 뇌전검, 충격파.
거기에 탑의 부산물로 만든 검.
거기에 오우거의 신체까지 더해진다면, 감히 측정할 수도 없을 정도의 공격력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물론 방어력도 뛰어나긴 하지만, 50% 피해 흡수라는 옵션이 너무 탐나는 것도 사실이지.'
심지어 물리, 마법 모두에 해당하여 50%를 흡수하는 능력이다.
'그래. 마력 보호막으로 하자.'
나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 순간.
[상태창에 마력 초월 스탯 마력 보호막이 각인됩니다.]
[마법 피해의 50%를 흡수하는 보호막이 생성됩니다.]
동시에 내 몸 위로 투명한 막 하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내 몸을 간질이던 막은 금세 내 몸과 하나가 되었다.
'좋군.'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격변한 상태창을 펼쳐냈다.
>스탯
-육체
힘 : 2614.231
[초월 - 방어 무시 50%]
민첩성 : 2631.765
[초월 – 치명타 확률 70%]
체력 : 2643.34
[초월 – 피해 반사 50%]
-정신
마력 : 2530.29
[초월 – 마법 보호막 물리/마법 피해 50% 흡수]
>마력 저항력
+ 50%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온다.
마법 저항력과 피해 흡수라는 옵션은 엄밀히 따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우선적으로 마법 보호막이 마법 피해의 50%를 흡수하여 완화하고.
50% 감소된 피해에서 다시 마법 저항력이 그 절반을 막아낸다는 의미.
'내게 가해지는 피해는 반의반 수준.'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마법 방어에 대한 이야기.
이미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는 내게 새로운 초월 스탯의 물리 피해 흡수 50%가 더해진다면, 사실상 물리 공격에 있어서는 '면역'에 가까운 수준에 올라선 것이나 다름없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격변과 함께, 나는 앞을 바라봤다.
'보스존.'
64층의 보스 몬스터인 리치왕이 기다리고 있는 보스존이었다.
***
"그아아아아!"
쾅! 콰콰쾅! 콰!
쏟아져 내리는 리치왕의 분노.
각종 마법이 나와 내 주변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끼요오오오!"
"흐에에에!"
"히아아악!"
뒤쪽에서 몰른은 비명을 내지르며 폴짝대고 있었다.
하지만 몰른은 어차피 피해를 입지 않는다.
펫은 죽지 않으니까.
하지만 우스운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다.
"크아아아아아!"
놈의 공격이 나를 스칠 때마다 오히려 스스로가 피해를 입으며 괴로워 하고 있는 리치왕의 모습은 마치 콩트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름 64층의 보스 몬스터라서 그런지 이 녀석은 나도 일격에 처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자가 회복 능력마저 가지고 있는 리치왕은 내 오러 블레이드에 몇 번 공격당하고서도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그래 봐야.'
이제 놈은 곧 죽는다.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몸을 가르고 지나갈 때마다 놈의 신체가 잘려 나간다.
이미 죽어 없어진 몸이기에 피가 튀거나 살이 찢겨나오진 않는다.
그저 거대한 뼈가 잘려나가고, 놈의 마력이 그 위를 뒤덮으며 다시 뼈를 이어 붙이는 과정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카아아아아!"
리치왕의 포효가 이어졌다.
광포한 마나가 보스존 전체를 휘감으며 막대한 기운을 뿜어낸다.
콰콰콰콰쾅!
다시 한번 이곳 저곳에서 폭발이 이어지며 놈의 마력이 나를 강타했지만.
"크아아아아!"
이번에도 피해 반사와 함께 오히려 놈이 더 괴로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움직였다.
마력을 끌어올렸고.
오러가 더욱더 중후해짐과 동시에 길게 뻗어 나왔다.
족히 3m는 훌쩍 넘을 정도로 뻗어 나온 백색의 오러는.
휘익!
허공을 가르며 움직였다.
길게 뻗은 오러의 끝자락에 리치왕의 상체가 닿았고.
파직!
오러 블레이드는 리치왕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갔다.
쩌적!
리치왕의 상체를 지탱하던 거대한 뼈들이 갈라지기 시작했으니.
콰가가각!
이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어… 어어억…."
리치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리치왕을 처치했습니다.]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레벨업 메시지와.
[혼자서 리치왕을 처치했습니다.]
[네 번째 보스 몬스터를 모두 혼자서 처치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연속으로 달성했습니다.]
[업적 –'보스 몬스터 정복자'를 달성했습니다.]
[업적 달성 보상이 주어집니다.]
[지배자의 귀걸이를 획득했습니다.]
[지배자의 귀걸이]
>등급 : S
>효과 : 능력 '지배자의 권능' 사용 가능
[지배자의 권능]
>등급 : S
>효과 : 랜덤으로 몬스터 10마리를 소환한다. 몬스터의 스탯은 시전자의 스탯의 일부를 공유한다.
-시전자의 스탯의 1/4
>추가 효과 : 소환한 소환체의 스탯이 30% 증가한다.
'…….'
또 한 번 나타났다.
'소환.'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외침에 더불어 두 번째의 소환 능력.
'거기에 소환체의 공격력을 증가시키는 버프까지.'
이것 역시 S등급이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R등급으로 측정되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능력이다.
'저주받은 고블린과 더한다면 무려 20마리의 소환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건데.'
이렇게 된다면 어중간한 플레이어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전투를 펼칠 수 있게 된 셈이다.
특히나 감정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를 가진 플레이어들보다는 오직 내 명령에만 따르는 소환체들이 훨씬 편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소환체들이 내 스탯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면.'
그들이 전투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건 말 할 필요도 없다.
내 소환체들이 웬만한 플레이어들보다 강하다는 건 이미 한 번 증명된 사실이지 않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업적들을 숨겨 놓다니.'
문득 설계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상 달성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이지 않은가.
'하긴. 그러니 업적 달성으로 S급 능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그럼 이제.
[64층의 클리어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다음 층의 대기실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드디어.
현재 탑의 최정상인 65층에 올라서기 한 걸음 전.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다음에 분명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란 점이었다.
***
"씨발. 이게 뭐야, 대체…."
궁술 명가의 예진희.
그녀는 말 그대로 멘붕에 빠졌다.
그녀가 충격에 빠진 이유는 당연히 위드 길드의 '선전포고' 때문이다.
"이것들 미친 거야, 진짜로?"
같은 명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예진희도 명백히 알고 있다.
자신들과 검술 명가는 '급'이 다르다는 것을.
한때 다른 명가들과 힘을 합쳐 검술 명가를 넘어 보자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미 그 계획이 일그러진 지는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위드 길드의 행보는 그녀로서 감히 납득하기 힘들 만큼 충격적이었으니.
'역시 한강민 때문인가….'
두려웠다.
이 사태가 끝나고 난 뒤, 대체 이 탑의 구도가 어떻게 뒤바뀌게 될 것인지.
'만약 위드가…, 아니. 한강민이 이기게 된다면….'
파국이다.
그것은 명가의 몰락을 알리는 종말의 서문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젠장. 젠장….'
그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쩔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온 이상, 그녀는 검술 명가를 지원하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위드 길드가 이기고, 일반 플레이어 놈들이 으스대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술 명가의 아래임을 인정하고, 기존 명가들이 지배하는 탑의 구도를 유지하는 편이 그동안 명가로서 누렸던 특혜와 권위를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밖에 누구 있어?"
예진희가 문밖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뭐야! 아무도 없냐고!"
다시 한번 예진희가 소리쳤지만.
콰앙!
대답 대신 들려오는 건,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뿐이었다.
"뭐, 뭐… 뭐야!"
문을 열고 플레이어 몇몇이 걸어 들어왔다.
"너, 너희…."
그들의 정체는 바로 궁술 명가 산하의 길드였다.
"오랜만입니다, 소가주… 아니, 예진희 씨."
"뭐, 뭐…?!"
원래 같았으면 소가주라며 떠받들어 주며 짖으라면 짖는 시늉까지 하던 산하 길드의 플레이어들의 태도에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너, 너희 미친 거 아니야?"
"미쳤을 리가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예민하고 이성적으로 이 탑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인데요."
그렇게 말한 플레이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 시간부로 우리 길드는 궁술 명가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독립적인 세력으로서 우리의 권한을 행세하겠습니다."
"이, 이… 이이이!"
예진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 그리고. 어디 가실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이미 이 밖은 우리 길드와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아, 물론 체술, 창술 명가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싸늘한 플레이어의 눈빛에 예진희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