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고오오-
떠오른 메시지와 함께 보스존 내부를 마기가 감싸기 시작했다.
'똑같아.'
전생에서 느꼈던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 불쾌하고 음습한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마기 말이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갑군.'
그렇게 나는 홉 고블린이 소환되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주받은 홉 고블린이 나타납니다!]
메시지가 떠올랐고.
쿠우우우웅!
굉음과 함께 거센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리우고 있는 저 너머에 거대한 신형이 나타났다.
'놈이다.'
잠시 후, 연기가 걷히고 저주받은 홉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4m에 육박하는 거구.
온몸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양손에는 커다란 도끼 칼을 들고 있는 단어 그대로 괴물이다.
'무시무시한 건 그대로군.'
마주하고 있으면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무시무시한 겉모습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치는 녀석의 모습은 조금 커다란 고블린과 다르지 않다.
'이런 녀석에게 그렇게 겁을 먹었었다니.'
조금은 우습다.
그때였다.
크르르르!
저주받은 홉 고블린이 거친 숨을 내쉬었고.
카앙! 카아앙!
두 개의 도끼칼을 부딪치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거대한 도끼칼 두 개가 충돌하는 것만으로도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거기에다 매 순간 꿈틀대는 무지막지한 근육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위압감을 주는 건 사실이었지만.
콰륵!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백색의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냈다.
그리고 동시에.
파지직!
뇌전검을 사용했으며.
우우우웅!
그 위에 다시 한번 충격파를 덮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격.
일격으로 저 녀석을 끝낼 수 있을까?
물론 나 역시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지만, 저 녀석은 무려 71층의 보스 몬스터다.
다른 플레이어들 열이 모여야 간신히 한 마리 사냥할 수 있는 그런 몬스터라는 뜻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재 나의 스펙은 탑의 정점에 서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설령 검술 명가의 직계들조차, 나보다 강한 이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쉬이 들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어떻게 보면 무리하게 비쳐 보일 수 있을 생각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정말로 저 녀석을 일격으로 처치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 줄 수 있으리라.
이 탑에서 독보적으로 강한 게 나일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검술 명가의 가주인 김원호와, 그의 아들 김준석보다도.
그리고 지금의 검술 명가를 일궈낸 그 장로들보다도 더 강할지 모른다는 그 추측.
'성공한다면, 그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 될 수 있어.'
내 전생에서조차 그 누구도 저주받은 홉 고블린을 일격으로 처치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까.
검술 명가의 가주도, 그 어떤 장로들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독보적인 경지 말이다.
'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낮췄다.
몸을 살짝 굽혔다.
복근과 허벅지, 그리고 등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오기 시작했다.
궁신탄영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자세.
'이 추진력을 이용한다.'
그런 나를 보며 저주받은 홉 고블린이 포효했다.
크어어어어!
그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보스존 전체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육중한 저주받은 홉 고블린.
그리고 나는.
'가자.'
작게 굽혔던 몸을 펼치며 궁신탄영을 사용했다.
타아아앙!
내 몸이 활짝 펼쳐지며 엄청난 탄력과 함께 저주받은 홉 고블린이 달려오는 방향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궁신탄영을 사용하기 전, 내 전신에 가한 회전력 덕분에 내 몸은 허공에서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오러 블레이드는 공기를 찢어 발기며, 허공에 막대한 양의 오러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나와 저주받은 홉 고블린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크륵…?!"
그 순간 내 눈에 비친 건, 크게 당황한 듯한 홉 고블린의 눈동자.
동시에 나는 확신했다.
'가능하다.'
라고.
놈과 조금 더 가까워진 그 찰나의 순간에 추진력을 바탕으로 검을 움직였다.
휘르르르륵!
백색의 오러가 빠르게 회전하며 새하얀 원을 하나 그려냈다.
그리고.
서걱!
오러 블레이드가 홉 고블린의 가슴팍에 닿았다.
부드럽다.
오러 블레이드는 질기고 두꺼운 홉 고블린의 가죽과, 두껍고 단단한 가슴뼈를 종잇장처럼 가로질렀다.
그게 시작이었다.
내 몸과 오러 블레이드에 가해져 있는 회전력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니.
콰가가가각!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그대로 홉고블린의 신체 내부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에도 오러 블레이드는 믹서기처럼 회전하며 검 끝에 닿은 모든 것들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었으니.
"크라라라라락!"
홉고블린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매 순간 검 끝으로 살과 뼈, 내장이 찢겨져 나가는 감각들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터어어엉!
1초?
아니, 그 반.
어쩌면 그 반의반도 안 되는 시간.
나는 홉 고블린의 몸 반대쪽으로 솟구쳐 나왔고.
"그륵…."
짧게 터져 나오는 홉 고블린의 신음이 귀를 두드렸다.
타앗
나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착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직도 오러 블레이드가 만들어 낸 회오리 모양의 잔상은 허공에 남아 있었으며.
그 위로 사정없이 튀어 오른 홉 고블린의 뼈와 살, 그리고 장기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동시에 백색의 잔상 위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는 이 싸움이 끝이 났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투둑 투두두둑
무언가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끈적하군.'
내 전신은 불쾌하고 끈적이는 액체에 뒤덮여 있었다.
홉 고블린의 피겠지.
그리고 군데군데에 달라붙어 있는 덩어리들은 놈의 살과 뼈일 테고.
나는 몸을 돌렸다.
쿠우우웅!
상체 위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하체가 고꾸라지며 굉음을 일으켰다.
훅!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됐군.'
이 탑에서 가장 강해졌다는 나의 추측은 추측이 아니었다.
[저주받은 홉 고블린을 일격에 처치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업적의 보상이 강화됩니다.]
[업적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저주받은 고블린의 자수정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저주받은 고블린의 호박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다이아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인장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업적 보상은 막대한 양의 경험치와 반지 네 개.
레벨은 한 번에 무려 10이 올랐다.
그렇게 현재 나의 레벨은 89가 되었다.
'이 속도라면 90에 포식 슬롯이 열리지 않아도 문제는 없겠는데.'
100레벨을 달성하는 것조차 이제는 시간 문제일 뿐이니까.
'마침 반지를 바꿀 때도 되긴 했는데, 잘 됐어.'
현재 내가 끼고 있는 반지는 골렘의 사원에서 얻었던 반지.
올스탯을 증가시켜주는 반지였다.
반지를 모두 합해 총 30의 올스탯을 증가시켜 주는 아이템.
'그 당시에는 좋아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티도 안 날 정도지.'
모든 스탯이 1000을 훌쩍 넘은 상황이다.
고작 30 따위는 있으나 마나 한 수준.
그렇게 나는 새로 얻은 반지를 확인했다.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인장 반지]
>등급 : S
>효과 : 올스탯 + 50
>세트 아이템
1.저주받은 고블린의 자수정 반지
2.저주받은 고블린의 호박 반지
3.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다이아 반지
4.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인장 반지
>세트 효과 :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외침
'호….'
솔직히 처음 반지 네 개를 봤을 땐, 업적 난이도에 비해서 보상이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지의 옵션을 확인하고 나자 그런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먼저 각각의 반지가 모두 올스탯을 50씩 증가시켜줬다.
덕분에 단번에 200의 올스탯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짜는 바로.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외침.'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외침]
>등급 : AAA
>효과 : 능력 사용 시, 저주받은 고블린을 20마리를 소환한다.
>저주받은 고블린의 공격력과 체력은 각각 시전자의 힘 스탯과 체력 스탯에 비례한다.
-시전자의 스텟의 1/4
바로 이것이다.
사실 저주받은 고블린을 소환하는 것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어쨌든 저주받은 고블린 자체가 그리 강한 몬스터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중요한 건, 저주받은 홉 고블린이 내가 강해질수록 같이 강해진다는 거지.'
새로 얻은 반지를 착용하고, 그동안 포식한 스탯이 다 더해진 결과, 현재 내 힘과 체력은 1700에 육박한다.
'그렇다면 사실상 내가 소환한 20마리의 저주받은 홉 고블린은 각각이 웬만한 플레이어 이상으로 강하다는 뜻이지.'
훌륭하다.
한순간에 내 손에 엄청난 능력이 들어오게 된 순간이었고.
[보스 존이 해제됩니다.]
[61층의 클리어 조건을 완수했습니다.]
[62층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번 층의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
다들 넋이 나가 있다.
하긴.
내가 홉고블린과 대치한 지, 이제 10초 정도가 지났을 테고.
저들은 조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인지조차 못 했을 테니까.
***
저주받은 홉 고블린을 쓰러트린 강민이 플레이어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오호호호!"
그 모습을 보며 몰른이 소리쳤다.
사실 플레이어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대략 20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강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61층에 오르기 전, 한동희에게 단단히 경고를 받은 참이었다.
'여러분들이 대단한 건 맞습니다. 61층에 올라갈 자격을 얻었다는 건, 이미 탑의 1%에 속했다는 거니까요. 하지만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61층은 결코 만만하지 않아요. 알겠죠? 인생은 실전이라고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직접 마주한 저주받은 고블린은 강했으니까.
그래.
비록 강민이 강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강민 혼자서 홉 고블린을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게 뭔데?'
'말이 돼?'
'왜?'
'어떻게?'
그런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들이 본 저주받은 홉 고블린은 검 몇 번 휘두른다고 쓰러트릴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동안 위드 길드가 쌓아 올린 데이터로 보건대, 저주받은 홉 고블린의 전투력은 플레이어의 레벨로 치자면 500에 육박했으니까.
여기 있는 이들의 레벨이 300초, 중반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500레벨의 저주받은 홉 고블린이 얼마나 강할지는 붙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저걸….'
'1초? 아니 1초도 안 걸린 것 같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눈으로 볼 수도 없었잖아.'
규격 외.
혹은 천외천.
지금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강민은.
그들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되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갑시다. 다음 층으로."
강민의 너무도 태연한 한 마디에 플레이어들은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