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책임질 수 있겠냐고?"
김민석이 눈을 부릅떴다.
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고작 일개 길드 따위가.
이제 탑에서 조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길드 주제에.
'감히 내 앞에서?'
비록 다른 명가들이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검술 명가는 아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역사를 통틀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명가 사이에서 그들은 더욱더 빛나고 있었고.
탑을 오르며 강해지는 플레이어들과 그들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건만.
'네놈들 따위가, 감히?'
물론 그도 알고 있다.
위드 길드가 현재 검술 명가의 발끝까지 추격하고 있고, 명가 내부에서도 위드에 대해서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너희와 우리는 근본이. 그리고 역사가 다르다.'
그들의 뿌리.
그들을 있게 만든 선조와.
그들이 이룩해 온 업적들.
더 나아가 현재의 자신들이 이어받아 개척해 나가고 있는 현재의 역사.
'이것들은 고작 탑 몇 개 클리어 했다고 너희가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사실 김민석도 알고 있다.
자신의 도발이 터무니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로 이번 사건의 범인을 파헤칠 생각 따위는 없다.
이미 다른 명가와 선을 그은 이상, 그들이 몰락하건 말건.
검술 명가로서는 일말의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
김민석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책임이라…."
다시 한번 그 단어를 읊조렸다.
그는 박명철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내가 묻지."
존대는 없다.
김민석의 자존심이 흔들린 이상, 상대를 존중해 줄 이유는 없다.
"……."
박명철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김민석을 바라봤다.
"그 말. 감당할 수 있겠나."
꿀꺽
김민석의 한 마디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감당할 수 있겠냐는 말이 의미하는 건 하나다.
검술 명가.
현재 탑의 지존의 위치에 놓여 있는 그 거대한 배경을 감당할 수 있겠냐는 물음이다.
"……."
"흐읍…."
세 명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없다.
이전에는 몰라도, 지금이라면 절대로 검술 명가에게 대들 수 없다.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파멸, 혹은 멸망.
철기영 역시 마찬가지다.
'미치겠군.'
괜히 이 자리에 나왔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그저 다른 명가들과 힘을 합쳐 박명철을 압박하고, 조금 짓밟아 주려고 나왔건만.
'이게 뭐야, X발. 진짜.'
박명철을 압박하기는커녕, 잘못했다가는 검술 명가에 찍혀 버릴지도 모른다.
'닥치고 있자.'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
괜히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는 진짜로 X돼 버릴지도 모른다고, 철기영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되뇔 뿐.
그러거나 말거나.
박명철과 김민석은 한참이나 시선을 마주한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묻지."
김민석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감당…. 해야 된다면 해야겠지."
박명철이 말했다.
역시 존대는 없었고.
짧은 말이지만, 그 한 마디에.
"커흡!"
"어억!"
"무, 무슨…."
남은 네 사람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눈으로 박명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하…."
그 말에 김민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그리고 박명철에게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마음대로 날뛸 수 없다는 것을 노린 건가.'
현재 검술 명가로서도 위드 길드를 무작정 공격하는 건 큰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자신들이 가진 정보를 길드원과 공유하며, 탑의 그 어떤 세력보다 빠르게 플레이어들을 육성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현재 위드 길드의 위상 때문이라도 검술 명가가 쉽사리 움직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 그 말. 잘 기억해 두겠어."
김민석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설 검술 명가는 아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자신에게 모욕을 준 위드 길드를 남겨 둘 수는 없는 일.
"그 말을 후회하게 해 주지."
그 말만을 남기고 김민석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이들은 인상을 구긴 채 말없이 침만 넘겨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
"좋아! 이제 완전히 적응 됐어!"
"여기 끝났습니다!"
"여기도!"
저주받은 고블린 던전의 중반을 넘어선 무렵, 고블린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제 놈들은 '무리'가 아닌 '군대' 수준으로 쏟아져 나왔으니.
쉴 틈도 없이 쏟아지는 고블린을 계속해서 사냥해야만 했다.
하지만 저 대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플레이어들은 빠르게 상황에 적응했고.
더 이상 미숙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건, 이미 증명된 이들이라는 뜻이다.
재능과 학습력, 끈기 등.
모든 면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플레이어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처음이야 미숙할지라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 금세 터득할 정도의 재능을 가진 천재들.
하지만.
"또…."
"진짜 말도 안 돼…."
"길드장님이 그렇게 아끼는 이유가 있구나."
저들의 재능이란 결국 내 실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기 일쑤였다.
아무리 속도가 빨라지고, 고블린 사냥에 능숙해진다고 해도.
나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모두가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래도 많이 빨라졌습니다. 이대로라면 오늘 내로 61층을 돌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요."
플레이어들을 돌아보며 내가 말했다.
"예…?"
"농담이죠…?'
"그럴 리가."
내가 답했다.
박명철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3주 내에 71층에 올라서겠다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61층 따위에 시간을 길게 쏟을 여유는 없다.
그리고 당연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 듣기로는 61층 클리어 하려면 일주일은 걸린다고…."
"마, 맞아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고블린 수가 엄청 늘어나서 무리했다가는…."
그렇게 말하는 플레이어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고 입을 다물었다.
"쩝…."
"될 거 같은데?"
내 주변에 산처럼 쌓여 있는 고블린들의 시체.
수백 마리의 고블린을 처치하는 데에는 채 1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
"혹시 너무 빠르다고 생각된다면 따라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굳이 모두를 데려가야 할 의무는 없다.
다만 나와 거리가 벌어지면, 이들은 나 없이 쏟아지는 고블린들을 상대해야 할 테지만.
"아, 아닙니다."
"같이 가셔야죠. 제가 배부른 소리를 했어요."
"미안합니다, 강민 씨."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뺨을 두드리며 정신 차리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럼 갑시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내 레벨은 80에 가까워졌고.
그동안 포식한 모든 스탯은 수백을 훌쩍 넘었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하지만 안심은 되지 않는다.
앞으로 만나게 될 이들이 얼마나 강할지 예측을 할 수 없으니까.
'강해지고 또 강해져야 한다.'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는 만큼.
오를 수 있는 만큼, 끝없이.
***
"정말로…."
"하루…."
지금 막 나와 플레이어들은 고블린 던전 마지막에 도착했다.
이제 남은 건 보스 몬스터인 저주받은 홉고블린뿐.
'궁금하군.'
지금의 내가 마주할 홉 고블린은 내 눈에 어떻게 비칠지.
전생에서는 끔찍할 만큼 두려웠다.
사실 전생에서도 이쯤 와서는 나도 탑의 네임드에 속했고, 파티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물론 파티의 핵심인원은 아니었다.
나의 역할은 몬스터의 어그로를 담당하며 다른 플레이어들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그나마도 전생의 나에게는 감지덕지였으니 최선을 다해 다른 플레이어들을 보조했다.
그랬던 내 눈에 비친 저주받은 홉고블린은 정말이지 두려운 상대였다.
단 한 번도 근처에 접근할 수 없었고, 공격을 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제는 아니지.'
나는 홉 고블린과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이 파티의 핵심인원이다.
아니, 핵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하겠지.
내가 없으면 이 파티는 한순간에 와해될 만큼 이 파티의 전부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 혼자 상대한다.'
당연히 업적 때문이다.
홉고블린을 혼자 처치하면 달성할 수 있는 업적이 존재했고.
그것을 위해서라도 나는 홉고블린을 혼자서 처치할 생각이다.
'어차피 저들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조금 전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과거에 그토록 두려웠던 홉 고블린을 혼자서 마주할 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그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저쪽에서는 플레이어들이 그동안 강행군을 거치며 누적된 피로와 부상들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는 몰른이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류트를 연주하며 플레이어들의 피로를 녹여줬고, 동시에 몰른의 버프 효과에 플레이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박. 몰른 씨. 최고네요."
"역시. 강민 씨 동료는 평범하지 않다니까."
"언제부터 강민 씨랑 같이 다니셨나요?"
이런 질문들을 쏟아냈고.
몰른은 신이 나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다.
물론 몰른이 펫으로 등록됐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펫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몰른을 펫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몰른은 내 동료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 식량을 먹으며 배를 채우고 있었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딱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앞으로 홉 고블린과의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고.
플레이어들이 몸을 다 추슬렀을 무렵.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홉 고블린을 사냥하기 위해서다.
그때.
"어, 엇!"
"다들 준비해!"
플레이어들은 내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서는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 옆으로 모여들었다.
굳이 일으켜 세울 생각은 없었다.
말했듯, 나는 혼자서 홉 고블린을 사냥할 생각이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이제 저 선을 넘으면 홉 고블린이 등장할 겁니다."
우리의 조금 앞을 가로막고 있는 투명한 막 하나를 가리켰다.
저곳이 바로 보스 존.
저 안에 들어가는 순간 홉 고블린이 소환되는 구조다.
"그리고 저 안으로는 나 혼자 들어갑니다."
내가 말했다.
"어, 어…?"
"예, 예?!"
당황한 플레이어들의 목소리.
"하, 하지만… 홉 고블린은 엄청나게 강하다고 했어요."
"파티를 이루지 않으면 절대 사냥할 수 없다고 교육받았는데…."
그걸 모를 리가 있는가.
내가 위드 길드에 넘겨준 정보인데.
"뭐… 혹시 제가 위험하다면 그때 와서 도와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
"어, 음…."
"그러니까…."
너무도 담담한 내 말에 오히려 플레이어들이 당황했다.
그럴 리가 없을 것 같다는 표정들이다.
"혹시 제가 혼자 들어가는 것에 불만이 있으시다면… 먼저 들어가십시오. 선수를 양보하겠습니다."
같이 들어갈 생각은 없다는 의견을 확실히 피력했고.
플레이어들을 돌아봤다.
"어…."
"하하…."
서로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는 플레이어들.
나 없이 들어가고 싶은 플레이어는 없는 모양이다.
그러면.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투명한 막을 넘어 발을 내디뎠다.
[보스 존에 입장했습니다.]
[보스 몬스터 저주받은 홉고블린이 소환됩니다.]
두 번째 저주받은 홉 고블린과의 만남이 성사되려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