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예, 예? 아, 아니… 누, 누구신지…?"
잔뜩 당황하고 겁먹은 점원이 말했다.
"이, 이…!"
해밀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해밀턴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해밀턴. 그만하시죠. 그리고 그 성질머리는 조금 고치면 안 되겠습니까."
"으허! 으허허허허!"
내 말에 해밀턴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나를 보며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지, 저 사람?"
"세상에, 해밀턴이 저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사람은 처음인데?"
"해밀턴 공방 대주주 아니야?"
이런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들어갑시다. 보여줄 게 있습니다."
귀찮아지기 전에 빨리 몸을 숨기고 싶었다.
"오호…."
내 말에 벌써부터 해밀턴의 콧구멍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시게. 따라 오시오."
그렇게 말하며 해밀턴은 나를 이끌고 자신의 개인 공방 내부로 이끌었다.
다시 한번 나를 향한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들이 쏟아지긴 했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해밀턴의 뒤를 따랐다.
***
"이게, 이게 뭐요… 대체…?"
내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탑의 파편.
그 양은 인벤토리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방대했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설계자에게 들은 대로라면, 해밀턴 역시 탑의 근원에게 먹힌 세상의 존재라는 뜻일 텐데.
사실 설계자는 아직 내게 그 이후의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잡아먹힌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굳이 탑을 만들지 않았을 테고, 자신들끼리 경쟁하며 플레이어들을 육성하지 않았을 테니까.
'…….'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탑의 원주민들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건 아니다.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나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고, 영웅 같은 것은 더더욱 될 생각조차 없다.
다만 나를 도와주거나, 혹은 나에게 정을 준 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만큼은 결코 달갑지 않다.
내 앞에서 탑의 파편을 보며 코를 벌렁거리는 해밀턴도 그렇고.
내 옆에서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몰른도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지금 나와 함께 있지는 않지만, 나와 교류했던 그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올라야 할 탑이라면.'
그리고 이 탑을 올라 정상에 섰을 때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저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맹목적으로 탑을 올라가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낫지 않겠는가.
"하!"
그때 해밀턴의 입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거요!"
그런 뒤에 나를 바라보며 다시 소리친다.
"내, 내 평생 정말 이런 물건은 처음 본다는 말이오! 저번에 가지고 왔던 물건과는 감히 비교도 안 되어 보이는군."
그러는 순간에도 해밀턴의 눈은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탑의 파편을 이용해 어떤 식으로 장비를 만들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는 중이겠지.
내 예상은 맞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이렇게 하면 되겠고… 옳지. 이 부분은 미스릴과 엮으면… 그리고 여기는 오리하르콘을 덧대고…. 그래. 그거야."
솔직히 말해서 해밀턴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순간에도 해밀턴의 머릿속에서는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며 나는 감히 생각지도 못 할 그림들이 그려지고 있을 테지.
역시나 저것은 해밀턴이라는 천재의 영역일 뿐.
내가 할 일은 그저 해밀턴을 믿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좋아. 내게 시간을 조금만 주시오. 아무래도 이건 정말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저도 재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 그래. 이번에도 기대해 보시오. 내가 정말로 최고의 작품으로 보답할 테니. 흐하하!"
해밀턴의 호탕한 웃음과 함께.
"거기 밖에 누구 있나!"
해밀턴은 공방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예, 예!"
그러자 그의 수제자로 보이는 이들이 다급하게 개인 공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고.
"자, 어서 이것들을 날라라. 그리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절대! 그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예!"
군기가 바짝 든 수제자들은 해밀턴과 함께 탑의 파편을 용광로 옆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도 슬슬 다음 스테이지를 위한 밑작업들을 시작할 차례다.
'처음은 박명철과 위드 길드.'
그들을 만나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서 논할 생각이다.
나는 곧바로 박명철을 향해 메시지 하나를 작성해서 날려 보냈다.
***
"어이가 없네."
박명철이 미간을 좁힌 채로 자신 앞에 도착해 있는 편지 몇 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화랑의 철기영으로부터 도착한 편지들이다.
"진짜 나를 개 호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참…."
철기영이 보낸 편지의 내용이란 결국 64층의 클리어를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현재 위드 길드를 이렇게 키워 줬으니 그 대가로 이번에는 탑의 클리어를 양보하라는 것.
'게다가 이건 뭐….'
박명철의 심기를 가장 크게 거스르는 것은 철기영의 편지의 어투다.
부탁을 하더라도 거절할 판인데, 철기영의 편지는 부탁이 아니라 명백한 강요였다.
곳곳에 숨어 있는 철기영 특유의 어투나 말투들이 이 편지를 작성한 게 철기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으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구만.'
박명철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한 달 전이었으면 박명철도 어쩔 수 없이 화랑에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지, 이 새끼야.'
벌써 몇 번째 도착한 편지에 답장하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현재 박명철과 위드의 위상이 화랑의 턱밑까지 추격해 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즉, 박명철이 배짱을 부리고 있음에도 화랑에서는 편지를 보내는 것 말고 이렇다 할 제스처를 취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박명철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화랑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64층 클리어 앞으로 이틀 이내에 가능할 듯. 검술 명가보다 빠른 속도임.]
김민희로부터 도착한 짧은 쪽지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에서 위드가 검술 명가를 제치고 64층을 돌파하게 된다면?
'화랑 너희들은 이제 내 발아래에 놓이게 될 거라는 말이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김민희의 말대로 앞으로 이틀.
아니, 저 쪽지가 도착한 게 하루 전이었으니 이제는 고작 하루가 남았다.
'내일이면 이 탑은 뒤집어질 거다.'
이런 상황에서 화랑에게 굽힐 이유가 없다.
박명철이 할 일은 김민희의 쪽지처럼 승전보를 기다리며 이제 곧 61층으로 올라오게 될 강민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뿐!
'이제부터가 진짜다.'
강민이 60층대에 합류하게 되는 그 순간 말이다.
그때부터 위드 길드가 완전히 새로운 길드로 탈피하게 되리라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지금에도 빠르게 성장하는 위드 길드에, 한강민이라는 독보적인.
아니, 독보적이라는 수식어로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플레이어가 합류한다는 건.
'게임 끝이지.'
그리고 박명철 역시 약속을 지켜냈다.
강민이 말했던 그대로 그는 이제 위드 길드를 독보적인 세력으로 일궈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순간.
띠링!
그의 눈앞에 도착한 메시지 하나.
[한강민 : 지금 막 60층 클리어했습니다. 한 번 보시죠.]
강민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으흐하하하하하!"
그 메시지를 본 순간 박명철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앉으시죠."
박명철은 내 메시지를 받자마자 내가 있는 25층의 마을로 급히 달려왔다.
마치 내 메시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다.
"하하하. 그동안 강민 씨를 만났던 것 중에서도 정말 손에 꼽을 만큼 반갑네요."
박명철이 웃으며 답했다.
나는 지금 25층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여관방 안에 박명철과 앉아있었다.
이제 박명철은 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으니,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박명철은 자리에 앉으면서 얼굴에 두르고 있던 복면과 온몸을 칭칭 감고 있던 후드를 벗어 던졌다.
"후아. 이거 진짜 답답하네요."
박명철은 목이 뻐근한지 스트레칭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많은 게 달라졌군요."
내가 박명철에게 말했다.
나와 박명철이 처음 만났을 그때와 비교하면 나도, 박명철도, 위드도.
그리고 대한민국의 탑도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그렇죠. 그리고 이 모든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이 바로 제 앞에 앉아있는 거고요."
박명철이 웃으며 말했다.
"제 앞에도 앉아있군요."
"흐하하!"
내가 맞받아친 말에 박명철은 머쓱한 웃음을 터트려 냈다.
"하지만 알고 계실 겁니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것을요."
"예. 당연하죠. 그리고 전해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박명철은 내게 종이 몇 장을 건넸다.
편지 몇 장과 작은 쪽지 하나다.
"뭡니까."
"직접 읽어보시는 게 더 좋으실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명철이 건넨 종이를 훑어 내려갔다.
"철기영…."
그 편지는 화랑의 철기영이 보내온 편지였고.
"재미있군요."
"진짜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길드 쪽은 웬만하면 건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화랑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한 번 손을 봐주는 것도 맞겠습니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쪽지도 한 번 보시죠."
박명철이 가리킨 작은 쪽지 하나.
'……!'
그 쪽지를 본 순간, 내 입꼬리가 절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결국….'
그리고 박명철의 눈을 바라봤다.
자부심과 뿌듯함, 그리고 나를 보며 칭찬해달라는 듯한 눈빛을 한 박명철을.
"해냈군요"
"흐흐흐. 입이 어찌나 간지럽던지. 어쨌든 저도 약속 지켰습니다. 강민 씨가 했던 그 말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도, 걱정한 적도 없다.
그러니 나는 온전히 탑의 등반에만 신경 쓸 수 있기도 했고.
"강민 씨."
박명철이 내 이름을 한 번 불렀다.
"마음껏 날뛰어 보십시오. 제가 그 모든 책임은 다 떠맡을 테니까요. 이제 내일이면 탑의 그 누구도 우리를 견제할 수 없을 겁니다. 화랑? 웃기지도 말라고 하십시오. 명가들? 개밥으로 주라고 하세요. 검술 명가…는 조금 무섭긴 하지만."
잔뜩이나 들뜬 채로 떠들고 있는 박명철의 모습을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한 달."
"……?"
"3주 안으로 70층을 돌파하고 71층으로 올라설 겁니다."
"어, 어…?"
박명철의 눈이 바쁘게 굴러간다.
해밀턴이 말했던 일주일을 제외한 3주.
나는 그 3주 동안 61층부터 70층을 주파할 생각이다.
'여기부터는 내 기억 속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는 층이기도 하지.'
내가 마지막에 죽었던 그 스테이지니까.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현재 71층에 있는 위드 길드 플레이어들 명단을 넘겨주십시오. 앞으로 일주일 후 바로 합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