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늦지 않았군.'
이미 한참 전부터 바위산 내부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초감각 덕분이고.
어쩔 수 없이 몰른을 떨어트린 채 나 혼자 빠르게 속도를 높여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명가의 플레이어들.'
아무래도 내 흔적을 찾아 이곳까지 도착한 모양이다.
'결국 벌어지게 될 일이긴 했지.'
아무리 내가 흔적을 숨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나의 행적은 숨긴다고 완벽하게 숨겨질 만한 건 아니었다.
'여기까지 숨긴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도 사실이지.'
그렇다고 하여 내 정체가 탄로 난 건 아니다.
어차피 여기 있는 녀석들만 사라지고 나면 나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
들키지만 않는다면 암살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결국 흔적만 지우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뜻.
"걱정 마라. 살아 계신다."
나는 툰테른들을 향해 말했다.
현자가 크게 다친 건 맞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물약을 꺼내 현자의 입에 흘려보냈고.
잠시 후 현자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킨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고생했군."
툰테른들의 꼴을 보아하니 나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녀석들이었지.'
처음에는 조금 배타적일지라도 한 번 자신들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녀석들.
다른 야만인들과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종족이다.
그리고.
"저, 저게…."
"차, 창민아!"
"창민이 형니이이임!"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죽어 있는 플레이어를 향해 달려가는 플레이어들.
조금 전 내 검에 죽은 플레이어가 궁술 명가의 예창민이었던 모양이다.
'쓰레기 같은 것들.'
지금 명가 녀석들을 보고 있는 내 시선은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에도 놈들을 증오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 놈들의 근원에 대해서 알게 되지 않았나.
'결국 한낱 시스템의 버그에 기생하고 있는 녀석들이.'
마치 자신들이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 것마냥 떵떵거리며 이런 짓들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알량하고 역겨운 것인지.
진심으로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꼴을 보아라.
죄 없는 툰테른들을 저런 꼴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의 동료 한 명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역겹다.
진심으로 역겨웠다.
"마, 망할… 망할 새끼가!"
"너 실수한 거야!"
플레이어들이 나에게 또 한 번 소리쳤다.
궁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체술 명가, 그리고 창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었다.
'대충 스물.'
우습지도 않다.
스물이 아니라 이백 명이 몰려와도 저 녀석들은 더 이상 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지금 탑에서 그나마 나와 대적할 수 있는 건, 검술 명가의 직계 정도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잘 됐어."
어차피 나의 노선도 확실하게 정해졌다.
정화자인지 뭔지, 솔직히 그딴 호칭 따위는 관심 없다.
다만 저들이 앞으로 나의 탑 등반에 있어서 훌륭한 거름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사실만이 나의 흥미를 돋울 뿐이다.
그리고 나는 몸을 움직였다.
콰르르륵!
검에서 백색의 오러 블레이드가 맹렬한 기세로 솟구쳤다.
"뭐, 뭐…!"
"X발 저게 뭐야! 저 새끼 검술 명가야?"
"미친놈아! 저게 어떻게 검술 명가야! 그 새끼들 검기 파란색인 거 몰라?"
"그럼 저건 뭔데!"
"몰라! 모른다고!"
오러 블레이드를 본 순간 플레이어들이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 놀라움을 마음껏 즐겨라. 너희 생에서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감정일 테니."
"무, 무스…"
콰아아아아!
"커헉!"
"크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
검기의 파동도 아니다.
그저 한 번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을 뿐이건만,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6단계 오러 블레이드의 힘이다.
그나마 내가 얼마 전 싸웠던 마법 명가의 장로와 박승균은 버텨내기라도 했지.
이들에게 있어서 6단계 오러 블레이드는 재앙이나 다름없을 것이 분명했다.
단 한 번에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이들은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 자신감들은 어디 갔나."
내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 알량한. 같잖은 명가라는 자부심은 대체 어디 갔느냐는 말이다."
내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분하겠지.
분통이 터지겠지.
하지만 저들 역시 알고 있으리라.
지금 이 순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명가'라는 이름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죽어라."
그리고 다시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으, 으아아아아아!"
"막아! 막으라고! 죽여 버려! 빨리이이이!"
플레이어들의 절규에 찬 비명과 함께.
콰아아아아!
허공을 수놓은 백색의 오러는 플레이어들을 가로지르고 붉은 핏줄기들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콰콰콰쾅!
간혹 나를 향해 날아드는 궁술 명가의 공격이나 체술 명가, 창술 명가의 공격들은 내게 그 어떤 피해도 입힐 수 없었다.
그저 놈들의 마지막 알량한 발악에 불과했다.
콰직! 콰득! 콰콰콰쾅!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폭발음과 파육음이 이어졌고.
플레이어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결국.
푸훅!
"꺼, 허윽…."
마지막 남은 플레이어가 쓰러졌다.
***
"고맙… 고맙… 소."
이제 정신을 차린 현자가 말했다.
현자와 다쳐 있는 툰테른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물약을 나눠준 결과 그들의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다.
'죽은 이들은 어쩔 수 없지만.'
"별것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답하며 현자와 족장, 그리고 족장의 아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들은 지쳐 있었고, 조금은 자괴감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모험가들 중에서도 강하기로는 손에 꼽을 정도인 인물이니."
내 나름의 위로였다.
족장이 약해서.
그리고 툰테른들이 약해서 당한 게 아니라, 단지 그들이 조금 더 강했을 뿐.
그리고 헛된 위로는 아니다.
진실이니까.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강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대는…."
현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더 강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당신들을 위협하는 야만인들을 모두 소탕하고 온 길입니다."
"아아…!"
현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를 보는 현자의 시선에는 복잡하고 오묘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원하신다면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고 와도 괜찮습니다."
"아니, 아니오. 그런 몰염치한 짓까지 할 수는 없지."
몰염치라니.
당연히 의뢰 결과에 대해서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그리고 이미 그대는 다시 한번 우리를 구하지 않았소! 더 이상 그대를 번거롭게 할 수는 없지. 고맙소. 정말 고맙소."
현자가 나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전했다.
그 옆에 서 있는 족장 역시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 앞에서 최대한 예우를 갖추며 감사를 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툰테른 현자의 의뢰를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툰테른 현자는 플레이어 '한강민'에게 큰 감사와 존경심을 느낍니다.]
[툰테른 현자는 플레이어 '한강민'에게 보답하기를 원합니다.]
'보답?'
확실히 전생에서는 본 적 없는 메시지다.
'어쩌면….'
히든피스다.
내가 예상치 못했던.
그리고 당연히 전생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히든피스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마법사의 숲에서 너무 많은 것을 얻어 가는데.'
마법 명가의 육체 개조를 획득했고, 설계자와의 만났다.
거기에 툰테른의 히든피스까지 손에 넣게 되다니.
"받으시오."
현자가 내게 건넨 건, 목걸이였다.
"우리 일족의 보물이오."
"보물…? 그런 걸 내게 줘도 괜찮습니까?"
"물론이오. 그대가 없었다면 우리 일족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 그리 생각한다면 이따위 목걸이 하나 못 내어 줄 이유가 없지."
솔직히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어쨌든 이들이 곤경에 처했던 건 내 탓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준다는 것을 거절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내게 일족의 보물이라는 목걸이를 주겠다는 것도 저 현자의 판단이지 않은가.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현자가 건네는 목걸이를 받아들었고.
[툰테른 일족의 목걸이]
>등급 : S
>효과 : 공격력 + 100 / 방어력 + 100
>추가 효과 : 툰테른의 분노 (S) 사용 가능
공격력과 방어력이 각각 무려 100씩 증가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오러 블레이드 6단계의 효과가 적용되면 공격력은 이미 하늘을 뚫을 지경인데, 거기에 무려 100이 추가된다니.
'게다가 방어력까지.'
기본 옵션만을 두고 봐도 사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는 아이템이다.'
툰테른의 가호.
무려 S등급의 능력.
과연 일족의 보물이라고 할 만큼 훌륭한 아이템이었다.
S등급이라는 등급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곧바로 툰테른의 가호라는 능력에 대해서도 살폈다.
[툰테른의 가호]
>등급 : S
>효과 : 피해 반사 30%
>패시브
'맙소사.'
대체 무슨 이딴 능력이 존재할 수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치밀었다.
패시브 스킬임에도 내가 입은 피해의 30%를 반사한다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군.'
이 정도라면 검술 명가가 아니라, 정말로 71층 이후에 타국의 플레이어들을 만나도 무서울 게 없을 정도다.
"마음에 드시오?"
현자가 내게 물었다.
"이런 귀한 물건이 어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행이오. 그대 같은 위대한 모험가에게 주기에는 조금 초라한 물건이기는 하나…. 나의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주길 바라오."
다시 한번 겸손의 말을 전하는 현자.
그리고.
"고맙다. 위대한 전사여."
족장이 내게 말했다.
"위대한 전사는 당신이겠지요."
내게 위대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그런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럼 이만."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몸을 돌렸다.
그들은 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했지만, 거절했다.
그들의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다만 지금 나는 그보다 더 빨리 처리하고 싶은 일이 남아있었을 뿐.
'탑의 파편.'
알 수 없는, 도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 재료 아이템을 손에 넣지 않았나.
'탑의 파편이 해밀턴의 손을 거치면 도대체 어떤 사기적인 아이템이 튀어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는 툰테른들의 바위산을 벗어난 뒤 층간 이동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해밀턴의 공방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군.'
해밀턴의 공방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방의 크기는 처음에 비해서 10배 이상은 커져 있었고.
점원과 그의 수제자로 보이는 이들이 바쁘게 대장간 내부를 오가고 있었다.
당연히 대장간 내부에 플레이어들로 가득 차 있는 건 두할 말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나는 대장간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저, 손님?"
점원으로 보이는 이가 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하하. 저희 해밀턴 공방에 처음 오신 모양입니다. 보시다시피 많은 손님들이 대기 중이시라… 번호표를 뽑으셔야 합니다요."
"아, 그렇습니까."
나는 그렇게 답하며 번호표를 뽑기 위해 데스크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점원이 나를 이끌고 데스크로 향하던 중.
"어?!"
저쪽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임마!"
"흐, 흐아악?!"
커다란 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경기를 일으키는 점원과.
한 남자가 다급히 나와 점원 방향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새끼가!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번호표를 뽑게 해? 어? 너 뒈질래? 짤리고 싶어?"
점원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해밀턴이었다.
가게는 커졌어도 성질머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