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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145화 (145/277)

145화

"어디지?"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오직 흰색으로 뒤덮여 있는 드넓은 공간에 나 혼자 서 있을 뿐이었다.

말했듯 없어졌던 다리도 다시 생겨났다.

문제는 왼쪽 다리를 감싸고 있던 장비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것.

'다시 해밀턴을 귀찮게 할 수밖에 없겠어.'

사실 그렇지 않아도 61층에 올라가기 전, 해밀턴을 다시 한번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61층.

그리고 그 끝에 나오게 될 70층.

그곳이 바로 전생에 내가 죽었던 곳이니까.

'이제 진짜 다시 시작이다.'

지금까지는 이 순간을 위한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

61층에 올라가기 전,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다시금 마지막 박호량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놈의 마지막 목숨을 건 공격이었던 것 같은데.'

나로서는 정말 다행인 일이지만, 결국 박호량의 마지막 일격은 사실상 아무런 효과도 없는 셈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닌가.'

짧은 순간이나마 나에게 엄청난 고통과 큰 좌절감을 안겨주긴 했으니.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놈의 최후치고는 조금 허무한 건 사실이군.'

하지만 후회는 없다.

결국 마법 명가는 이제 탑에서 사라졌다.

내 손으로 놈들을 없애 버린 것이니까.

'역사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지.'

놈들에 의해 죽어가던 내가 놈들을 역사에서 지워 버렸으니까.

그토록 증오스러웠던 놈들을 지워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전생의 내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다른 명가들 역시 마법 명가와 다를 바 없는 녀석들.

그들을 모두 짓밟기 전에 나는 결코 멈출 수 없다.

물론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명가를 없애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 따위는 없다.

내가 전생에 아무런 능력도 없이 탑에 오르고 또 올랐던 건 이 탑이라는 것의 정상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몰른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

조금 전 떠올랐던 업적 메시지.

'저주를 받은 일족이라고?'

그 말은 분명 마법 명가를 가리키는 말인 게 분명하다.

'그들이 저주를 받은 거라는 말인가?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어쩌면 나는 혈계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탑의 비밀에 발을 내디딘 것일지도 몰랐다.

'믿을 수 없군.'

복수를 달성하겠다는 마음으로 마법 명가와 싸웠건만 그 사건을 계기로 이런 기회를 손에 넣게 될 줄이야.

꿀꺽

조금 긴장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은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지만, 이제 곧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 아아!"

저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목소리 들려? 아! 아아아!"

젊은 여자.

아니, 젊은 여자처럼 보이는 탑의 설계자였다.

"들리냐고오오오!"

"……."

설계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고.

흠칫

나는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멈춰!"

설계자의 말에 나는 눈을 바쁘게 굴리며 걸음을 멈췄다.

***

"자, 너도 앉아."

설계자는 자리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앉아, 앉아. 편하게 해, 임마! 그 뭐야, 다리도 아플 텐데. 얼른 앉으라니까?"

자꾸 나를 다그치는 설계자.

나는 조금은 머쓱한 기분으로 설계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야 임마. 그거 내가 고쳐준 거야. 알지? 말 잘 들어."

"……."

정말 저게 설계자가 맞는 걸까.

아직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쉽게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따악!

설계자가 손을 튕겼다.

그리고 그 순간 나와 설계자 사이에 작은 식탁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딱!

이번에는 소주와 소주잔 두 개가 나타났다.

처음이슬이라는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그 소주 말이다.

휘릭! 탁!

설계자는 능숙하게 소주병을 열었고.

두 개의 잔에 소주를 채우기 시작했다.

쫄쫄쫄

"뭐 하는… 겁니까."

내가 설계자에게 물었다.

대체 사람을 이곳에 불러 놓고 소주라니.

"하, 거참. 일단 받아. 너 이거 먹어 봤을 거 아니야?"

"안 먹어 봤습니다."

진짜다.

내가 각성한 게 19살.

그리고 곧바로 탑을 올랐으니, 밖에서 소주를 먹어 본 적은 없다.

처음 마신 술은 탑의 주점에서 마신 맥주가 처음이었다.

탑에 처음이슬과 같은 소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으음…. 사실 나도 처음이야. 잘됐네. 한번 마셔 보자."

그리고 내게 잔을 건네는 설계자.

챙!

설계자의 잔과 내 잔이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완샤아앗!"

그렇게 외치며 소주를 털어 넘기는 설계자.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설계자를 바라봤다.

그녀가 나를 보며 턱짓했다.

마시라는 뜻이겠지.

어쩌겠는가.

우선 까라면 까는 수밖에.

나는 소주를 입에 머금었다.

쓰다.

이런 알콜 냄새밖에 나지 않는 걸 왜 마시는 건지.

"크읍…."

소주를 넘긴 뒤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토해냈다.

뱃속이 뜨거워졌고, 내 입에서 진한 알콜 냄새가 흘러나왔다.

"괜찮은데? 나 이거 맘에 들어."

설계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조금 신경질이 났다.

"뭐 하자는 겁니까. 여기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부른 겁니까?"

조금은 쏘아 이듯 말했다.

한시가 급한 이 시점에 나를 불러놓고 고작 한다는 게 소주 마시기라니.

그때.

"그럴 리가."

"……."

내가 뭘 잘못 들은 걸까.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너무 너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어."

"……."

안다.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쉬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그리고 자는 시간도 아까운 게 당연한 일이다.

"너 그러다가 어디 가서 객사할지도 몰라. 조심해."

그녀는 다시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크으~ 쥑이네?"

그러면서 저런 감탄사까지.

"그럴 일 없습니다."

"자신감은…. 됐고 그거나 한잔 더 마셔."

설계자가 말했다.

"안 마십니다. 술은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에헤이! 그냥 술이 아니야."

설계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순간.

[설계자의 포션을 복용했습니다.]

[신체의 노폐물이 제거됩니다.]

[신체의 손상된 부분이 회복됩니다.]

[정신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집니다.]

"……?"

"내가 너한테 술이나 마시자고 불렀겠니? 그냥 흉내 한번 내 본 거야아…."

그렇다고 하기에 벌써 설계자의 혀가 꼬여가는 것 같았지만.

확실히 평범한 술은 아니었다.

그동안 누적되었던 피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으니까.

"선물. 선물이라고오… 흐흐."

얼굴이 조금 빨개진 설계자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네가 여기에 온 건, 아까 본 것처럼 탑을 정화하는 데 공헌했기 때문이야."

이제 본론인 모양이다.

나는 다시 소주 한 잔을 털어 넘겼다.

또 한 번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고, 몸이 한층 더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궁금하지? 아직 납득이 안 될 거야. 걔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거나, 네가 정화를 했다는 거나.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과 함께 설계자는 어느새 내 잔에 가득 차 있는 소주를 가리켰다.

채앵!

그녀는 술잔을 부딪치고, 다시 소주를 털어 넘겼다.

나도 홀린 듯 소주를 목구멍 너머로 흘려보냈다.

"이 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너희가 알고 있는 혈계라는 것이 무엇인지. 또 탑을 오르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네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

미간이 꿈틀댄다.

역시 이 만남은 결코 헛된 만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된 순간이니까.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알려 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내게 알려 달라는 말입니다."

설계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뭐부터 이야기를…. 아, 그래! 이것부터 이야기하는 게 맞겠네. 알다시피 나는 이 탑의 설계자야. 말 그대로 이 탑을 설계했지. 하지만 탑을 지은 건 내가 아니야."

"……."

조금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그럼 누가 탑을 지은 겁니까."

"누군가."

"뭐요?"

"못 들었니? 누군가가 지었다고."

이건 무슨 말장난도 아니고….

하지만 설계자가 말장난 따위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제부터 들려올 말이 내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과 관련 있으리란 확신이 든 것도 사실이다.

설계자는 다시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빨개질 대로 빨개졌다.

"설계자는 나 하나가 아니야. 나는 너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그리고 네가 오르고 있는 이 탑을 설계한 것뿐이지."

"각국의 탑마다 설계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까?"

"응."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건?"

"70층을 넘어선 순간부터."

"……."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내가 죽었던 70층.

그 너머에는 분명히 다른 국가의 플레이어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라마다 탑의 형태나, 각 스테이지의 테마는 달라. 다 자기 스타일이 따로 있는 거고 설계자들은 나름 경쟁을 하고 있는 거야. 누가 더 탑을 잘 설계했는지. 그래서 자신들이 배출해 낸 플레이어가 누가 더 강하게 성장할지를 두고 경쟁하는 거지."

"……."

"이 탑의 스테이지들은 내가 나름 고안해서 만든 건데. 네 생각은 어때. 괜찮게 만들어진 것 같아?"

"……."

나는 말을 아꼈다.

지금은 둘째치고서라도 전생에서 이 탑의 난이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비난했던 게 나일 테니까.

"흐흐…. 사실 이 탑의 난이도는 다른 탑에 비해서도 꽤 높은 편인 건 맞아. 내 교육 철학은 강하게 키우자, 거든."

이게 바로 탑의 비밀이라는 건가.

고작?

고작 저들의 경쟁 때문에 그 개고생을 하며 탑을 오르고 있다는 거라고?

그때.

"오해는 하지 마."

내 표정을 읽은 설계자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너희는 단순한 노리개가 아니야. 그리고 나와 설계자들 역시도 너희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처지기도 하고."

"무슨 말입니까."

꼴깍

설계자가 침을 한 번 삼켰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너희와 나는 협력 관계야. 생각해보면 내가 너희를 탑에 들어오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 않니?"

사실이다.

탑이 생겼을 뿐, 그 안에 걸어 들어온 건 지금의 플레이어들의 의지였으니까.

"내가 강요해서 강제로 탑에 집어넣었으면 할 말 없겠지만 결국 너희의 선택이었다는 거지."

"알고 있습니다."

설계자가 빙그레 웃었다.

"여기부터가 중요한 이야기거든. 혈계라는 게 왜 탑의 저주인지. 그리고 네가 어떻게 정화자가 되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내 말에 설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혈계는 바로 이 탑을 설계한 '누군가'의 짓이야. 이 탑은 그 존재의 일부고."

"예?"

"나와 다른 설계자들이 그 '존재'와 싸워 그 녀석의 신체를 잘라 탑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놓은 거야."

"그 무슨…."

솔직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이 탑이 어떤 존재의 신체라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그리고 내가 이 탑을 지은 게 아니라고 했던 건, 말했던 그대로지. 원래 존재하던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 존재의 거대한 에너지를 재구성하고 설계해서 지금의 형태로 조정해 놨을 뿐."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으음…. 그래. 이렇게 설명하면 좋겠네. 그 녀석은 또 하나의 세상.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하나의 우주인 녀석이었지."

"……."

갈수록 태산이다.

"그 녀석의 존재 목적은 수많은 세계를 집어삼키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의 덩치를 불리고 더 많은 세계를 집어삼키는 거지. 너희가 살고 있는 이쪽 차원도 먹힐 뻔했다는 말이야."

"그러면 당신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을 구했다는 겁니까? 그리고 이 탑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그 존재에게 먹힌 세계의 존재들이고?"

"그런 셈이지.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

고작 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수많은 차원을 집어삼킨 어떤 '존재'라니.

"그러면. 혈계는. 혈계는 대체 어떻게 생긴 능력입니까."

내가 물었다.

사실 탑의 존재만큼이나 궁금한 것이 바로 그 혈계니까.

결국 나름 죽음에 몰아넣었던 명가라는 녀석들이 존재하게 만들었던 혈계의 근원에 대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이야기일 테다.

그리고 설계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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