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박승균을 죽이지 않고 저들을 기다린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의 최후를 스스로 목도하게 하려는 것.
그리고 내 예상대로 박승균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 있는 장로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가주는 없는 건가.'
이들의 거점 저 깊은 곳에 아직도 가만히 침전해 있는 방대한 기운이 바로 가주일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때였다.
"흐억… 허어어억…!"
박승균은 격렬하게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처음의 각오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금 내 눈앞에 쓰러져 있는 박승균은 그저 초라한 한 마리의 강아지 같아 보일 뿐이었다.
"이게 다인가?"
내가 박승균을 향해 물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했건만, 박승균은 이미 녹초가 되어있었다.
내가 박승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걸까.
'아니. 그게 아니다.'
다만 내가 너무 강해졌을 뿐이다.
내가 여기에 오기 전에 내뱉었던 그 말은 진짜다.
나는 최강이고, 나는 지금 모든 플레이어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섰다는 그 말.
특히나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고 난 뒤 R등급의 효과가 적용되고 난 이상, 박승균 따위가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건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흐, 흐아아악!"
박승균은 다급히 몸을 일으키고 나에게서 벗어났다.
어깨를 들썩이며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 장로님들 이 녀석은 제가…."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말거라!"
박승균의 말을 잘라낸 장로 한 명이 소리쳤다.
"……!"
그 말에 박승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 때문이겠지.
그렇게 위풍당당하게 등장했을 때, 이미 누군가에게 호언장담을 한 채로 움직였을 테니까.
그런 것 치고는 지금 박승균의 꼴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그때 장로가 말을 이었다.
"너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제, 제가, 제가 할 수 있습…"
"닥치래도!"
"……."
"네 놈의 객기로 우리 가문이 무너지는 것은 내 결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의 손으로 네 놈의 목숨을 끊어낼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장로의 목소리.
박승균의 몸이 얼어붙었다.
"네가 가문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면, 다른 이야기는 저자를 쓰러트린 뒤에 하기로 하자."
조금 누그러진 장로의 목소리에 박승균 역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빠르게 자신의 몸을 추스르며 다시 전투를 위한 준비에 돌입하기 시작했으니.
'2라운드 시작인가.'
하지만 문제는 없다.
수가 조금 많아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
강민이 마법사의 숲에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탑의 최상층에서는 역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상 화랑과 위드, 검술 명가의 삼파전이나 다름없다.
그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검술 명가다.
그들의 실력은 화랑이나 위드 명가가 감히 비벼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검술 명가 다음으로 가장 크게 활약하고 있는 게 화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검술 명가 다음으로 가장 빠르게 64층 탑을 돌파할 것으로 생각되는 길드는 바로 위드였다.
실력 면에서는 검술 명가에 비하여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현재 위드는 탑의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발한 방법으로 64층을 조금씩 돌파하고 있는 중이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길을 만들어내는 검술 명가와 있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 길을 찾아내어 기묘한 방식으로 나아가는 위드 길드.
그 사이에서 화랑 길드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포지션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상해.'
그러던 중 문득 화랑 길드의 철기영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그의 예상대로였다면, 검술 명가와 함께 탑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으로서 화랑이 올라서야 정상이었을 텐데.
지금의 상황은 그의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검술 명가야 이미 확고한 위치에 올라섰지만, 남은 한 개의 균형의 추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드 길드, 64층의 진척에 있어 큰 성과를….]
[위드 길드, 반드시 검술 명가보다 먼저 탑을 돌파해 내겠다는 다짐을…]
매일같이 쏟아지는 기사의 타이틀들.
탑의 언론들이 주목하는 건, 화랑이 아닌 위드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64층에서 미적지근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화랑과는 달리 위드 길드는 정말로 자신들만의 방식을 통해 검술 명가와도 비슷한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지금 64층의 돌파 소식은 대한민국의 탑 내부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다.
이미 62층을 돌파한 위드 길드와 63층을 돌파했던 검술 명가.
그 두 세력 중 64층을 먼저 뚫어내는 게 누구일지에 대한 궁금증은 모든 플레이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차고 넘칠 수밖에 없다.
혹자는 정말로 위드 길드가 64층을 돌파해 낼지도 모르겠다는 예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근거는 충분했다.
앞서 말했듯, 힘으로 뚫어내는 검술 명가에 비해 위드 길드는 영리하게 탑을 나아가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으니까.
위드에 비해 검술 명가가 소모하는 체력과 자원의 양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만약 놈들이 정말 64층을 뚫어내면…!'
철기영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철기영의 입장으로서는 낭패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이 이용해먹기 위해 랭킹 3위에 올려놓은 위드 길드가 오히려 자신들을 잡아먹어 버리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정말이지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
철기영은 위드 길드의 길드장인 박명철을 떠올렸다.
확실히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부드러운듯하면서도 이 순간에도 세력이 커지고 있는 위드 길드를 완벽하게 통솔한다.
물론 내부에 불만이 없을 순 없겠지만, 다른 거대 길드들에 비하면 위드 길드는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언론에서 조사하는 길드원들의 만족도에 있어서도 모든 길드를 제치고 늘 1위에 자리하고 있는 정도였으니까.
철기영이 이를 악물었다.
자신 역시도 64층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도무지 위드와 검술 명가를 좇을 수 없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만이 쌓여가고 있는 중이다.
'그 녀석을 만나봐야 하는 건가….'
박명철.
그를 만나서 얻어낼 무언가가 없을지.
철기영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지금 위드를 키운 건 사실상 내가 한 일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위드 길드를 랭킹 3위에 올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드가 존재할 수나 있었겠느냐고 말이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다.
시간이야 조금 더 걸렸겠지만, 위드는 충분히 상위에 랭크될 잠재력을 가진 길드였으니까.
물론 철기영의 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일 뿐.
하지만 철기영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는 지금의 상황을 역전시킬 한 방이 절실하게 필요할 따름이었다.
'그래. 네 놈이 나에게 일말의 감사라도 느낀다면 그렇게 혼자서 꿀을 빨면 안 될 일이지.'
결국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시킨 철기영은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건 당연히 위드 길드의 길드장인 박명철이었다.
***
어느새 장로와 박승균은 다시 전투를 위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자신의 신체 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고오오오!
단 순간에 여러 명의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하며 마력의 폭풍이 나와 장로, 그리고 박승균을 감싸기 시작했다.
'저 녀석부터.'
첫 번째 목표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최대한 빠르게 속도를 줄이는 것.
그렇다면 이 중에서 가장 약한 녀석을 먼저 처치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나에게 걸린 첫 번째 표적은 바로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장로였다.
꽈악!
검을 움켜쥐었고.
콰아아앙!
지휘관의 외침을 사용했다.
그와 함께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커흑!"
"크흡!"
마력을 모으고 있던 장로들의 몸이 크게 휘청였고, 개중에는 마력이 역류하는 듯 코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첫 번째 사냥감으로 삼은 장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중에서도 가장 크게 흔들리고 있었으니.
파앗!
그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장로들은 내 움직임을 눈으로도 좇지 못했고.
파직!
검을 휘두른 순간 장로의 팔이 떨어져 내렸다.
"크아아아악!"
장로가 비명을 내질렀다.
잘려나간 자신의 팔을 붙든 채로.
그 순간.
"커허어어억!"
장로가 입에서 피를 쏟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마력을 끌어올리며 폭주하고 있던 찰나에 지휘관의 외침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더 나아가 팔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크헉! 크허어어억!"
쉴 새 없이 피를 쏟아내는 장로를 뒤로한 채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노오오옴!"
그때 나를 향해 날아드는 장로들의 마법.
총 두 개의 불 마법과 한 개의 얼음 마법.
'와라.'
겁낼 것 없다.
검을 크게 한 바퀴 돌리며 우선 한 개의 불덩이를 쳐냈다.
콰아아앙!
허공에서 불덩이가 터져 나가며 남아 =있는 마력이 내 몸을 휩쓸었다.
하지만 버텨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다.
이어서 남은 한 개의 불덩이마저 잘라낸 나는.
파앗!
발을 굴렀다.
나는 순식간에 다른 장로 한 명의 뒤쪽에 도달했고.
"허엇!"
나를 따라오던 얼음 마법이 그를 공격한 것이다.
쩌저저적!
장로의 마법은 또 다른 장로의 몸을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잘 가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움직였다.
콰그그극!
얼어붙은 장로의 몸이 오러 블레이드에 잘려나가며 산산이 박살 났다.
"크어어억!"
장로의 몸이 부서져 내렸다.
"둘."
순식간에 두 명의 장로가 쓰러졌고.
마력을 포식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 명의 장로에게 무려 20에 가까운 마력을 포식할 수 있었다.
'남은 건 넷.'
박승균까지 총 다섯 명.
그 순간 초감각의 범위에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다섯 개의 마법이 포착됐다.
피할 수 있는 건 피하고, 피할 수 없는 마법은.
나는 곧바로 지휘관의 외침을 다시 한번 사용했다.
콰콰콰쾅!
지휘관의 외침을 이용해 나를 향해 날아들던 마법을 허공에서 막아냈다.
콰직!
멈추지 않고 움직인 검은 장로 한 명의 몸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셋."
"이노오오오옴!"
저쪽에서 장로의 분개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렇게 뒈지고 싶으면!"
나는 다시 한번 순식간에 그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흐어어어억!"
장로가 눈을 부릅뜬 채 괴성을 내질렀다.
푸훅!
그의 복부에 박힌 오러 블레이드.
장로는 핏대가 선 눈으로 나와 오러 블레이드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진한 회한이 느껴지는 눈이었지만.
그딴 감상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다.
푸학!
검을 뽑아냈다.
그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넷."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명의 남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박승균과 한 명의 장로다.
"싱겁군."
나는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