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 무렵, 55층 마법사의 숲 한 건물에는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창술 명가의 구준회, 그리고 체술 명가의 최강혁. 궁술 명가의 예진희다.
현재 심상치 않은 탑의 정세에 그들은 서로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검술 명가의 속셈은 확실시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창술 명가의 구준회.
남은 두 사람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축되어 있는 것은 체술 명가의 최강혁.
남은 세 명가 중에서도 가장 상황이 나쁜 것이 바로 체술 명가였으니까.
남은 두 명가의 플레이어들 역시 체술 명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 체술 명가가 끼어있다는 것도 불쾌했지만, 그들로서는 선택지가 없다.
마법 명가는 도대체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검술 명가는 그들과 완전히 선을 그어 버렸다.
아니꼽기는 하지만, 그들로서는 체술 명가 하나의 세력이라도 절실한 상황이었다.
최강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로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사태의 배후에 화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술 명가의 구준회가 다시 말했다.
현재 탑에서 검술 명가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세력이 바로 화랑이다.
다른 명가들을 모두 젖히고 화랑이 이제 독보적인 세력으로 올라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의견은 최강혁도 같았다.
그때 예진희가 말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음?"
예진희의 뜬금없는 발언에 구준회가 미간을 좁혔다.
"화랑. 분명 그들이 대단한 건 맞아요. 현재 탑에서 커다란 세력으로 자라난 것도 맞지요."
"그런데 뭐가 말입니까."
"내가 수상하게 생각하는 건, 위드. 위드 길드라고요."
"……?"
최강혁과 구준회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위드는 화랑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랭킹 3위에 올라선 건, 화랑과 검술 명가가 잔꾀를 부린 결과물일 뿐이라는 겁니다."
구준회의 반박.
하지만 예진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한강민. 기억하시죠."
그들의 기억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이름이다.
한때 탑을 들썩이게 했지만, 어느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름.
"알다마다. 일전에 명가의 회동에 이례적으로 호출했던 인물이었으니까."
구준회가 답했다.
과거 탑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명가들이 모였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강민이 참여하지 않는 덕분에 박명철이 참여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자가 바로 위드 길드의 소속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테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한강민이라는 자는 지금 아무런 소식도 전해지고 있지 않는 것을. 어디 가서 객사라도 했을지 누가 알기나 하겠습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예진희가 언성을 높였다.
"생각해봐요. 한강민이라는 이름이 탑에 들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가 얼마나 빠르게 탑을 올랐죠?"
"……."
대답할 가치가 없다.
독보적인 속도다.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탑을 올랐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해냈으니까.
"그런데 그 정도 실력자가 객사했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모두는 말을 잃었다.
예진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게 한강민이라는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어요."
"……!"
구준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마법 명가를 부수고, 현재 탑의 균형을 흩트린 게 한강민이 한 짓이라는 겁니까? 그 사람 혼자서?"
예진희를 쏘아붙이는 구준회.
"그…."
예진희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설령 위드 길드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들, 그 당시의 위드는 그저 그만한 중견 길드에 불과했습니다. 그 둘이 힘을 합쳐서 마법 명가를 부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고려해 볼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끼어든 최강혁.
그렇지 않아도 그도 그동안의 보고를 통해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으니까.
"우리 명가의 플레이어 한 명이 개미굴에서 죽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최강혁은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냈다.
그런 치부를 감수하고서라도 그의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마침 한강민 그 자가 개미굴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
"그리고 그가 빠른 속도로 어비스에 도달해서, 또 한 번 우리의 방계를 처치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들도 알고 있다.
한 사람이 두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를 처치했다고 하기에는 그 사이의 간격이 너무 짧다.
개미굴을 클리어하기 위한 시간을 고려해 본다면, 동일 인물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텀이다.
"하지만 한강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가 보였던 행보와, 속도로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뜻이다.
구준회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으니까.
"확실히… 추정되는 한강민의 행보와 현재까지 탑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쉽사리 확신할 수는 없다.
몇 번이나 거듭 말했듯, 그들의 상식선에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행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구준회가 예진희와 최강혁을 바라봤다.
"당신들의 예상대로라면. 당신들이 생각하는 한강민의 속도라면, 그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
그 물음에 최강혁과 예진희는 동시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서로 시선을 한 번 교환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의 숲.""
그들은 스스로가 대답하고 나서도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봤다.
"이것 참…."
구준회가 이마를 짚었다.
***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요!"
마부의 외침에 잠에서 깼다.
어느새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고, 옆에서 몰른은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져 있다.
"왜 멈추는 거지?"
내가 물었다.
"이 근방은 꽤나 위험합니다요. 산적 떼들이 날뛰고 있는 곳이거든요."
마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상관없다. 그냥 가."
"어휴, 큰일 납니다요! 요새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마부가 내게 한 걸음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소문?"
"예. 그렇습니다."
"어떤 소문이지?"
그는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산적 떼들이 마왕한테 영혼을 팔아 남겼답니다!"
"……?"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라는 말인가.
마왕이라니.
마법사의 숲에 마왕 따위는 없다.
흑마법사라면 몰라도.
아니, 잠깐만.
'흑마법사?'
그때 내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더 자세히 말해 봐. 마왕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나?"
"어이쿠. 제가 뭘 알겠습니까요. 다만 산적들이 말이 안 통한다고 합니다요. 그전에는 돈이나 패물을 넘기면 통과시켜 줬는데, 이제 그것들이 정신이 나간 건지 협상도 안 하고 사람들을 산 채로 잡아간다니까요?!"
"……."
어쩌면 내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법 명가 녀석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도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흑마법을 익히고 있는 것인가?'
이전에 녀석들은 흑암파를 육성했다.
생체 실험을 통해 신체 능력을 증폭시키는 방법을 통해서.
'이제는 자신들 스스로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마부의 증언을 조합해 보면 얼추 그럴듯한 추리가 완성된다.
특히나 산적들이 돈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사람들을 산 채로 잡아간다는 대목에서 나는 어느 정도 확신했다.
분명 산적들을 세뇌했을 것이고, 사람을 산 채로 잡아가는 건 이미 이전에도 놈들이 벌였던 짓이지 않던가.
'만약 사실이라면….'
나는 어쩌면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놈들에게 닿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 역겨운 심성은 어딜 가지 않는군.'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을 납치해 생체 실험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반드시 내 손으로 없애주마.'
나는 박승균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다시 마부를 바라봤다.
"출발해라."
"아,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미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요!"
"10골드를 주겠다."
"예, 예에에?"
화들짝 놀라는 마부.
하지만 이내 그는 다급히 손사래쳤다.
"안 됩니다! 10골드에 목숨을 버릴 순 없어요!"
"100골드."
"허, 허억…!"
이제는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침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 그으…."
"200골드 주겠다."
"커허억…."
그는 결국 손을 내밀었고.
나는 약속대로 200골드를 건넸다.
"걱정 마라. 네가 죽을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200골드라는 돈은 그에게 거절하기엔 너무도 큰돈이었을 것이다.
그때.
"진짜예요오오오! 주인님 말만 들으면 자다가도 케이크가 나온다니까요오?!"
몰른이 끼어들어 소리쳤다.
하지만 마부는 울상을 한 채로 다시 앞좌석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후.
"흐랴아!"
마부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우리는 어두운 숲에 진입했다.
확실히 숲에 진입한 순간부터 묘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일대 전체가 무언가에 오염되어 있다.'
마력 수치가 어느새 700을 넘어섰고, 진즉에 활성화해 놓은 초감각은 나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범위를 샅샅이 살펴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
'……!'
초감각의 포착 범위 안에 어떤 움직임이 포착됐다.
'꽤 많은 수다.'
마부가 말했던 산적인 게 분명했다.
"멈춰라."
내가 마부에게 말했다.
"허, 허억…? 예, 예에!"
마부가 질겁하며 말했다.
나는 다시 초감각에 집중하여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리를 살폈다.
'확실히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다.'
흑암파를 마주했을 때와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니 나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 명가의 소행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확실히 산적들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물론 박승균이나 마법 명가의 플레이어들을 직접 만나게 된 건 아니지만, 분명 저들의 본거지를 뒤져 본다면 무언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군.'
내가 되살아나 마법 명가의 흔적을 찾아내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지 않은가.
'많은 게 달라졌지.'
지금의 마법 명가는 그때의 마법 명가가 아니었고.
당연히 나 역시 그때의 내가 아니다.
'완전히 뒤바뀌었어.'
그들은 몰락하기 직전 발악을 하고 있었고.
나는 이제 탑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해졌다.
'결론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어.'
그리고 그때.
스릉-
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가만히 있어라. 괜히 쓸데없이 움직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몰른과 마부에게 말했고, 그 둘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파삭!
수풀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향해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