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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128화 (128/277)

128화

"그 전에 먼저 신분증에 대한 안내를 드리겠소."

역시 전생에서와 같은 대사가 흘러나왔다.

그때에는 몰랐지만, 지금도 똑같은 말을 시작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매뉴얼에 적혀 있는 모양이다.

"아이언. 그리고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마지막으로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발급하게 되어 있소."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골드 등급의 신분증을 발급받게 되오."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중에서 플래티넘 등급의 신분증을 발급받는 이들은 극소수요. 우리 마탑에서 상위 1%의 실력자라고 판단되는 이들에게만 부여되는 신분증이지."

플래티넘 등급.

그 등급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마법사의 숲 어디에 가서라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뿐인가.

당연히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건 물론이다.

'랭커의 최소 조건이기도 하지.'

말했듯 마법사의 숲은 랭커로 진입하는 시험 관문.

그 최소 조건이 바로 플래티넘 등급의 신분증을 발급받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랭커의 자격을 받게 되는 건 아니다.

말했듯 어디까지나 최소 조건일 뿐.

하지만 그 예외가 있었다.

바로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

"마지막 다이아 등급."

마법사는 다시 세 개의 서류를 훑었다.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은 감히 금전적 가치로는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증패요. 그리고 우리 역시 아무에게나 발급해 주지 않지."

그가 한 번 숨을 골랐다.

"조건은 꽤나 까다롭소. 세 마법사의 판단이 전원 일치할 것. 게다가 1년에 총 다섯 개밖에는 발급하지 않소. 물론 자격이 미달 될 경우 단 하나도 발급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 최근 몇 년간 다이아 등급 신분증을 발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소."

그리고 마법사는 세 개의 문서 가장 아래에 서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서명을 마친 순간.

"이걸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가시오. 그러면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발급받을 수 있을 거요."

꿀꺽

좌우 두 명의 마법사가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는 듯이 침을 크게 삼켰다.

조금 전 말했던 예외인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

그것이 바로 랭커의 충분조건이다.

그 어떤 다른 조건도 필요 없다.

단지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발급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랭커에 충분히 진입하는 것은 물론이요, 능히 상위 랭크 20 안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받으시오."

마법사가 내게 세 장의 문서를 건넸다.

"원래는 이 이후로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야 하오. 직접 실력을 검증하는 테스트가 있지만… 다이아 등급의 증패를 받게 되는 모험가들에게는 예외 사항이지."

말로만 듣던 이야기였다.

보통은 며칠이나 걸리는 실력 테스트지만, 다이아 등급을 발급받게 된다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

"건투를 비오."

그렇게 나는 세 장의 문서를 건네받았다.

"처음 그대에게 범했던 무례는 용서해 주길 바라오."

"이미 잊었다."

"고맙소. 그대와 같은 실력자라면 우리 마탑에서도 욕심이 날 정도로군."

스카웃 제안.

역시 들어 본 일이 있다.

평생 먹고 남아도 될 정도의 돈과 명예를 부여받고 마법사의 숲에 눌러앉았다는 이들.

"안타깝게 됐군. 나는 안락한 생활에는 큰 미련이 없거든."

"으음…. 그렇군."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문서를 품에 넣으며 나는 그들 뒤쪽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

그 이후로는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세 개의 문서에 적인 다이아라는 글자를 본 마법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나를 극진히 대접하기 시작했다.

나와 관계도 없는 이들이지만 마치 자신의 상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긴장한 기색으로 일을 빠릿빠릿하게 처리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 새로운 신분증이 발급되기까지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전생에 받았던 실버 등급의 신분증이 나오는 데까지 1주일이 걸렸던 것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나쁘지 않군.'

나는 내 손에 들린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결과기는 하지만, 막상 손에 넣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심지어 전생에서조차 이걸 손에 넣은 이들은 많지 않았지.'

그때 당시 검술 명가, 마법 명가의 가주.

그리고 거대 길드의 수장 몇 명이 전부였다.

'그중에는 철기영과 김준석도 포함되어 있었고.'

화랑 길드의 길드장과 현재 검술 명가의 실세인 김준석.

그 외에 날고 긴다 하는 랭커들도 손에 넣지 못한 게 바로 이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이었다.

'자, 그럼.'

다음 목적지를 향해 움직일 차례다.

나는 신분증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갑옷 안에 집어넣었다.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다른 플레이어들이 보게 된다면 귀찮은 일들이 생길 거다.'

아직은 내 실력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마탑의 로비로 내려갔고.

여전히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서 있던 몰른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몰른의 손에는 전투 식량이 가득 들려 있었다.

"사왔어요오오. 호오오오…."

살짝 취기가 오른 몰른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려보냈다.

"고생했다. 가자, 이제."

나는 몰른이 건네는 적투 식량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마탑을 벗어났다.

***

"통과되셨습니다. 다음 분."

성벽에 도착했을 때, 많은 플레이어들이 본격적인 모험을 위해 경비원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며 통과 심사를 거치고 있었다.

마법사의 숲의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마탑을 중심으로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성벽 내부.

이곳 여기저기에 명가, 혹은 거대 길드들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이전의 층과 같이 '5층 단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마법사의 숲에 진입한 모두는 즉시 마을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는 셈이다.

탑의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높은 클리어 난이도를 자랑하는 마법사의 숲인 만큼, 다른 플레이어들과 협력하기 편리한 환경을 마련해 놓았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리고 그때.

"그 다음 분."

경비병은 무료한 표정으로 플레이어들이 건네는 신분증을 검수했다.

신분증들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는다.

그저 대강 훑어보며 관심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반복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 다음이요."

그리고 마침 내 순서가 다가왔다.

나는 품 안에서 신분증을 꺼내서 그에게 은밀하게 건넸다.

그는 역시나 무료한 표정으로 내 신분증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내 신분증을 확인한 순간.

"어, 어…?!"

그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라. 시끄럽게 떠들어서 피곤하게 만들지 마."

내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허, 헉!"

그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게 바로 다이아 등급 신분증의 위력이다.

사실 나와는 일말의 관계도 없는 경비병이지만, 이 신분증은 나의 실력이 최상위급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표나 다름없었으니.

그 사실에 저도 모르게 위축되는 것이다.

"지,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내가 다이아 등급 신분증에 대해서 떠벌리길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경비병은 신분증을 다시 은밀하게 내게 건넸다.

그리고 내 말대로 그 이후로 어떤 과도한 리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의 몸은 어쩔 수 없었고.

"수고해."

나는 다시 신분증을 품속에 넣은 채로 성벽을 벗어났다.

성벽 밖에는 역시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신분증을 가슴팍에 달아 놓거나, 혹은 목걸이로 만들어 매달고 있기도 했다.

물론 아이언이나 브론즈, 실버 등급의 신분증은 예외다.

굳이 자랑할 만한 등급이 아니라는 건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골드 등급이십니까? 괜찮으시면 같이 파티를 맺으시겠습니까?"

"실버등급 플레이어 있습니다! 실력은 탈 실버급!"

"아, 젠장… 브론즈라니…."

성벽 밖에서는 신분증의 등급에 따라 새로운 권력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골드 등급 플레이어들은 사방에서 모셔가기 위해 안달이었고, 그나마 실버 등급까지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순 있었다.

문제는 역시나 브론즈 등급.

'저들은 답이 없어.'

물론 여기까지 올라온 건 대단하지만, 말했듯 전생의 나조차도 실버 등급의 신분증을 받았다.

"저기, 혹시…."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가슴팍을 한번 훑었다.

"아, 아닙니다."

그러더니 홱, 몸을 돌린다.

"저 사람은 왜 저래요오?"

옆에서 몰른이 물었다.

왜 저러긴.

신분증을 숨겨놓은 것을 보고 아이언, 혹은 브론즈 등급의 신분증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신경 쓸 것 없다. 가자."

그리고 나는 몰른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법 명가 놈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가기 전에 '그들'을 먼저 찾아가 봐도 괜찮겠어.'

어차피 마법 명가가 있다고 전해 들은 위치는 마법의 숲의 최북단.

그 전에 전생에서 나에게 의뢰를 주었던 집단의 거주지가 위치해 있다.

'지금 그들의 상황을 먼저 살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분명 그들에게서 괜찮은 의뢰를 받아낼 수는 있겠지만, 의뢰 내용이 무엇일지까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지금과 그때의 시간이 다른 만큼, 그들이 원하는 요구사항도 다를 테니까.

'미리 의뢰를 받아놓고 최대한 빠르게 클리어 할 수 있도록 동선을 짜는 편이 유리할 거야.'

물론 그들의 의뢰를 수행하는 건, 마법 명가의 박승균을 처리한 이후다.

지금 내게 있어서 중요한 건, 마법사의 숲을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박승균을 없애는 것이니까.

꽤나 긴 여정이 될 것이다.

말했듯 마법사의 숲은 대륙의 크기에 달하는 커다란 숲이니까.

'걸어가는 것은 무리일 거고.'

그렇다면 운송수단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근방에는 플레이어들을 호송하기 위해 마법사의 숲 전역에서 마차들이 모여 있었다.

파티를 맺은 플레이어들은 마부들과 협상을 시도하며 마차에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혼자 탑승하기 위해서는 가장 허름한 마차를 고르는 게 낫겠지.'

이쯤 되면 플레이어들의 주머니 사정은 꽤나 넉넉하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허름한 마차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굳이 있다면 나처럼 무슨 사정이 있는 이들 뿐.

사정이 있다면 역시나 굳이 다른 사람이 타 있는 마차에 합석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마부들을 둘러봤다.

역시 마부들도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고 커다란 마차일수록 앞쪽에 서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뒤쪽으로 움직였다.

뒤쪽으로 향할수록 마차의 크기가 줄어들었고, 슬슬 허름한 마차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싸게 갑니다! 싸게 가요!"

그때 가장 뒤쪽에서 목이 터져라 싸게 간다는 말을 외치고 있는 마부 한 명이 보였고.

'저게 괜찮겠어.'

그의 마차는 여기 있는 모든 마차들 중에서 가장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어디까지 가지?"

내가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고.

"소, 손님! 저, 저희 마차는 아룬든까지 갑니다요!"

'아룬든.'

잘됐다.

이곳에서 북쪽에 위치한 성의 이름이었고, 마침 내가 가려던 방향과도 정확히 일치했다.

"좋아. 가격은?"

"5, 5골드입니다요!"

5골드.

내게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액수였다.

나는 그에게 5골드를 건네고 마차 위에 올라탔다.

"최대한 빨리."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긴 채 마차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잠시 피로라도 녹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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