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마법사의 숲은 하나의 필드로 이루어진 층이다.
이름이 '숲'이라고 되어 있어 조그마한 맵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법사의 숲의 크기는 웬만한 대륙에 버금가는 드넓은 영역을 자랑한다.
지구의 아마존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클리어 조건도 꽤나 까다롭지.'
다른 층처럼 하나씩 층을 돌파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마법사의 숲은 다른 층과는 다르게 조금 특이한 특성 하나를 가지고 있다.
'랭커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시험 관문 중 하나.'
탑에서 정해준 룰은 아니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규칙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마법사의 숲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직접 마법사의 숲에 존재하는 원주민들에게 그에게 임무를 받아 수행해야 한다는 클리어 조건 때문이었다.
어떤 인물을 발견해야 하는지.
또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오직 스스로가 찾아내야 한다.
이전과 같이 시스템 메시지로 클리어 조건을 안내해 주는 것이 아니다.
'터무니없지.'
처음 듣는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 클리어 조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이곳은 정말 운과 실력이 겸비되어야만 클리어 할 수 있는 스테이지다.
마법사의 숲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물 중, 의뢰를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의뢰를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의뢰도 아무 의뢰나 수행해서는 안 된다.
의뢰를 통해 채워야 할 '점수'가 존재하고, 그 점수에 미치지 못하면 백날 의뢰를 수행해 봐야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음식점에서 백날 천날 설거지 따위 같은 임무를 수행해 봐야 충분한 점수를 쌓는 건 불가능해.'
실제로 내게 있었던 일이다.
마법의 숲에 살고 있는 원주민에게 낚여 '임무'라는 이름으로 설거지를 세 달간 했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런 임무를 수행해도 점수가 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임무로 층을 클리어할 만큼의 점수를 모을 수는 없었다.
'생각도 하기 싫은 기억이야.'
물론 그때의 나는 그만큼 절박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전생에서도 마법사의 숲에 대한 정보는 공유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명가와 거대 길드일수록 그런 규칙은 더욱더 엄격했다.
그 이유는 말했듯, 랭커로 진입하는 관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니 대중에게 공개된 정보가 있을 리는 만무.
간혹 정보를 사고파는 일도 벌어졌지만, 거의 대부분이 고급 정보는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나도 개고생했었던 거지.'
마법사의 숲에 진입하고 얼마나 막막했었는지.
그 심정은 말 할 것도 없다.
이렇다 할 세력도, 소속된 길드도 없으니 함께 정보를 공유할 사람 따위는 없었다.
그저 이 드넓은 숲을 헤매고 또 헤매며 내게 임무를 줄 만한 사람을 찾아서 무작정 떠도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해냈지.'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막막함이란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내 전생에서 임무를 줬던 인물이 이 시점에도 같은 임무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임무를 준 건 한 개인이 아니었다.
한 집단이 맡긴 의뢰를 수행했고, 그 집단이라면 분명 이 시점에도 존재하고 있다.
꽤 역사가 있는 집단이라고 했으니까.
'그들을 찾아가면 분명 의뢰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들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할 일은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건네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뿐.
'그리고 그 전에.'
나는 박명철을 바라봤다.
마법사의 숲의 의뢰를 수행하고 그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마법 명가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서."
박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숲 북부에 마법 명가 플레이어로 보이는 이들이 보였다고 하더군요."
"북부…."
"예. 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저희가 탐색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북부였거든요. 만약 다른 곳부터 수색을 시작했다면 결코 찾아낼 수 없었을 겁니다."
"겸손할 것 없습니다. 분명 근거를 가지고 북부에서부터 수색을 시작하셨겠지요."
"하하…."
내 말에 박명철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그것도 맞습니다. 마법 명가가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마법사의 숲에 숨어 들었으면 어디부터 시작했을지… 생각을 해봤었죠."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은 안했지만 사실 박명철이 북부부터 수색한 건 적절한 판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쪽, 아니면 남쪽에 거점을 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마법사의 숲에서 극지대에 위치한 남쪽과 북쪽에는 마력이 풍부했고.
또 그 풍부한 마력을 머금고 자라난 생물들이 자생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 중에서도 북쪽을 선택한 건 박명철의 감이었겠지.'
어쨌든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 박명철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했다.
'그러면 이제.'
북쪽으로 움직일 차례다.
그렇지 않아도 전생에서 나에게 의뢰를 맡겼던 집단 역시 중앙과 북쪽 사이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으니.
'잘 됐어. 만약 녀석들이 남쪽에서 있었으면 꽤나 골치 아팠을 텐데 말이야.'
나는 박명철과 다시 작별을 나누고 몸을 일으켰다.
"곧 61층에서 봅시다."
내가 말했다.
"최대한 천천히 오셔도 좋습니다. 벌써 강민 씨에게 다 따라잡혔다고 생각하니, 이거 제가 다 민망해서…."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하하…."
박명철의 어색한 웃음을 뒤로한 채,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 무렵 55층의 마을.
고풍스러운 마룻바닥 위에 무릎 꿇고 있는 한 남자가 말했다.
그는 바로 김준석이었다.
현재 검술 명가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직계 중에서도 실세인 남자.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것은, 현재 검술 명가의 가주인 김원호다.
"곧 63층을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호…."
62층을 위드 길드가 돌파해 낸 이후로 검술 명가는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탑의 상황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은 채 63층을 돌파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붓고 있었으니.
이제 막 그 결과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저나 요새 꽤나 밖이 시끄럽더구나."
김원호가 말했다.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의 한 마디에는 많은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명가라고 하여 다 같은 명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네 말도 맞는 말이다. 허나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그들의 역할에는 분명 천인들을 통제하는 기능이 있었다. 허나 그들을 이토록 무시하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천인.
그것은 일반 플레이어를 이르는 말이었고, 그들은 당연히 다른 명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김준석은 묵묵히 답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특히 체술 명가라는 녀석들의 작태를 본다면… 치가 떨릴 지경입니다."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가 어비스에서, 그리고 개미굴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은 이미 명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였다.
"궁가와 창가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그들과 선을 긋지 않는다면 우리마저도 똥통에 빠져버리는 꼴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으음…."
김원호도 김준석의 말에 딱히 이렇다 할 반박은 할 수 없었다.
현재 명가의 위상은 탑의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바닥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화랑이라는 이들과 공모하는 것은 너무 급진적인 결정이 아니었나 싶구나."
김원호가 말했다.
강민과 박명철이 추측했던 그대로, 현재 검술 명가와 화랑은 밀담을 나눈 상태였다.
물론 협력을 한다거나 서로 동맹을 맞은 것 따위는 아니다.
다만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서로의 자치를 인정하기로 한 것뿐.
검술 명가는 명가로서의 존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화랑은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여기에서 저의 결정이 최선이라는 사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확실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정한 '명가'로서의 자부심을 세우는 것이지요."
김준석은 더 이상 기존의 질서는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명가라는 집단으로 묶여 있기에 자신 검술 명가와 다른 명가의 격차는 너무 컸으니까.
그들에 대한 처리를 화랑에게 맡긴 채 고고하게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탑을 정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밀담의 결과가 현재 탑의 상황을 이끌어 낸 것이나 다름없다.
블랙의 퇴출과 위드의 급부상.
검술 명가가 화랑의 독주를 견제하지 않으니 다른 명가들조차 화랑을 쉽사리 건드릴 수 없었고.
반대로 화랑은 검술 명가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작업을 시행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김원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준석의 결정은 타당하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왜인지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리고 김원호가 다시 김준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허나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토록 탑의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결코 마법 명가와 같은 전철은 우리의 역사에서 없을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래야 할 것이야. 그들이 그렇게 몰락하게 되리라고는… 그 누가 알았겠느냐."
김준석은 다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김원호만큼이나 검술 명가를 독보적인 세력으로 길러내고 싶은 김준석의 마음은 커다랬다.
'더 나아가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를 외국의 플레이어들도.'
현재 탑에서는 외국의 플레이어들에 대한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강민의 전생과 마찬가지다.
70층 이후에 외국의 탑과 연결점이 생긴다는 추측들이다.
'이미 타국에서는 국가 간에 교류를 시작하는 곳도 있다고 하였으니까.'
이미 강대국들은 70층을 돌파한 시점이었고, 그들 중 외국의 탑과의 교류를 시작한 이들이 있다는 정보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
'우리가 뒤처진 건, 이 안에서 명가 놀음 따위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김준석이 다른 명가를 떨쳐내고 독주하고 있는 이유였다.
'화랑… 너희 벌레들을 짓밟은 것은 그 이후다. 너무 오만방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당연히 그렇다고 하여 타고난 명가라는 자부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유일한 강자로 올라서겠다는 마음과 함께 그의 명가에 대한 자부심은 더욱더 크기를 키울 따름이다.
***
여긴가.
내 앞에는 높은 탑 하나가 서 있었다.
'마법사의 탑.'
플레이어들.
그러니까 마법사의 숲의 이방인들이 마법사의 숲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탑에서 임시 신분증을 부여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높은 등급의 신분증을 부여받아야 마법사의 숲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하는 임무를 받아낼 수 있지.'
만약 높은 등급의 신분증이 없다면 반복적으로 의뢰를 수행하며 신분증의 등급을 높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단번에 최고 등급의 신분증을 받아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나는 마법사의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주변에는 꽤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물론 나를 알아보는 플레이어는 없다.
'역시 이쪽이 훨씬 자유로워.'
실력을 뽐내며 관심받는 것은 관심 없다.
내 목적은 오로지 명가를 쳐부수고 탑의 정상에 오르는 것.
'이제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선 셈이지.'
지금까지가 곁가지를 쳐내며 중심으로 진입하는 과정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폭풍의 중심에서 이 모든 사태를 관망하는 위치에 올라선 셈이었다.
"가자, 몰른."
나는 몰른과 함께 마법사의 탑 내부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