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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121화 (121/277)

121화

쿠우웅!

다시 한번 전장이 출렁인다.

하지만 역시나 내 마음은 고요하게 침전했다.

'앞으로 한 번.'

그저 놈의 빈틈이 드러나길 차분히 카운트할 뿐이다.

[우주적 존재 '피의 살육자'가 분개합니다!]

[우주적 존재 '고요한 바다의 지배자'가 시선을 돌립니다.]

이 순간에도 쏟아지는 우주적 존재들의 메시지.

실망감이 가득하다.

몇몇은 이 전장을 떠나려는 기색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급해져서는 안 된다.

완벽한 기회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그리고 동시에 침착하게 내가 잡은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조급한 마음으로 움직여서는 결코 내 계획을 이뤄낼 수 없다.

"후웁…."

숨을 한 번 들이켰다.

1초도, 아니 그 반도 되지 않을 짧은 찰나를 파고들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했으니까.

부우웅-

그리고 동시에 거인의 도끼가 움직였다.

오른쪽 위에서부터 나를 향해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

그 모든 순간이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 도끼의 모든 움직임이 내 눈에 담겼다.

흡-

숨을 짧게 들이켰고.

'지금.'

움직였다.

지금까지 뒤로 움직이며 놈의 공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쐐애애액!

거대한 도끼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들었다.

사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도끼.

하지만 반대쪽 도끼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이전 같았으면 벌써부터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을 테지만.

'내 예상대로다.'

녀석은 숨을 고를 준비를 하고 있는 거다.

내 예상이 정확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이 싸움의 승기는 내게 넘어 온 것이나 다름없다.

우우웅! 파지직!

충격파와 뇌전검이 활성화되었다.

콰르륵!

오러 블레이드가 강렬한 기세를 내뿜으며 검 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우주적 존재 '태산의 노령'이 턱을 어루만집니다.]

[우주적 존재 '빙산의 고룡'이 휘파람을 붑니다.]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내니 우주적 존재들이 이제야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놈을 향해 움직이는 순간 슬슬 우주적 존재들의 관심이 다시 쏠리기 시작했으니.

'자, 봐라.'

콰아아앙!

도끼가 바닥을 두드렸다.

그리고 놈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숨을 들이켜는 것이다.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고.

파앗!

놈의 오른편으로 이동한 순간이었다.

놈의 오른쪽 도끼는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곳, 그러니까 놈의 왼쪽 방향으로 향해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내가 도착한 놈의 오른쪽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

놈의 호흡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내가 이 순간 보인 움직임은 그동안과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었으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리고.

콰아앙!

땅을 디디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고.

파직!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발목을 갈랐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도대체 가죽이 얼마나 질기고 뼈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오러 블레이드로 베었음에도 발목이 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효과는 있다.

"크어어어어!"

놈이 포효했다.

그새 호흡을 고른 녀석의 오른팔이 움직였고.

도끼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삐끗!

아주 미세하지만 놈의 균형이 흔들렸다.

발목을 공략당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럼에도 놈은 역시 엄청난 하체 힘과 질긴 근육으로 놈은 흔들리지 않고 도끼를 움직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나는 다시 움직였다.

도끼의 밑으로 파고들었다.

머리 위로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도끼가 움직였다.

콰아아앙!

도끼가 바닥을 내리쳤다.

쉬지도 않고 반대쪽 도끼가 나를 향해 움직였지만.

다시 한번 오른쪽 발목을 두드렸다.

콰드득!

'들어갔다.'

확실히 느낌이 왔다.

"크아아아아!"

대족장이 포효했다.

놈의 발목에서 엄청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콰아앙!

도끼가 바닥을 두드렸다.

이전보다 훨씬 약해진 위력이다.

그때.

[소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어비스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1,0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백만.

소수라고 했지만, 역시 단위가 다르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점점 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니.

'됐어.'

저들은 내가 짠 시나리오에 점점 몰입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꽈득!

놈이 이를 갈았다.

발목이 아작 났으니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몸을 지탱하는 힘이 약해졌으니 공격의 위력과 속도도 눈에 뛰게 느려졌다.

'이제부터는 농락해 줄 시간이지.'

어비스 포인트를 끌어모을 시간이 다가왔다.

***

[1,0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2,3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7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 합니다.]

.

.

.

수없이 쏟아지는 후원 메시지.

파직!

"크아아아아!"

어느새 대족장의 온몸에는 혈흔이 낭자했고, 놈은 폭주하여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눈먼 공격이다.

처음엔 조금 위협적이기라도 했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되지 못한다.

전장을 흔들기는커녕 제 몸도 가누기도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물론 그런 거인족의 모습을 보며 우주적 존재들은 폭소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인 나와 마찬가지로 거인족 대족장 역시 저들에게는 광대일 뿐이다.

허우적거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우주적 존재들은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벌써 2500만.'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어비스 포인트다.

대족장과의 싸움을 통해 1000만에 가까운 어비스 포인트를 모았고.

아직도 후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렇게 되면 내가 싸움을 끝내기가 곤란하지.'

최대한 많이.

얻을 수 있을 만큼 끌어모아야 한다.

이미 지혜의 수문장을 만나기 위한 최소한의 커트라인은 돌파했다.

그럼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비밀 상점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까.

'어떤 아이템이 있을지, 또 얼마나 많은 어비스 포인트가 필요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어.'

그리고 다시 한번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대족장을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그래서 어떻게 더 많은 어비스 포인트를 끌어모을 수 있을지.

'슬슬 꺼낼 때가 되었나.'

검기의 파동 말이다.

'자, 봐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물러났다.

우주적 존재들이 의문을 표했다.

누군가는 어서 다시 싸우라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고.

막대한 포인트를 후원하며 기대감을 내비치기도 했으니.

"크어어어어!"

멀리 떨어진 나를 보며 대족장이 괴성을 내질렀다.

귀청이 따가워질 정도로 커다란 포효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안쓰러운 절규에 가까웠다.

'그럼 팔 한 쪽부터.'

우우우웅!

오러 블레이드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오러 블레이드가 검기를 뿜어냈다.

반달 모양의 파동이 푸르게 물들며 거인족을 향해 날아들었고.

콰아아앙!

'이크.'

오른팔을 잘라내려고 했건만, 조준이 잘못돼 놈의 가슴팍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효과는 뛰어났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거인 대족장을 보며 우주적 존재들이 다시 한번 폭소를 터트렸으니.

[1,0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4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

.

검기의 파동 한 번으로 500만에 가까운 어비스 포인트가 내 손에 들어왔다.

이로써 3000만 포인트.

'미치겠군.'

자꾸 나를 이렇게 흥분시키면 멈출 수가 없지 않나.

'그래. 조준 따위야 뭐가 문제겠나.'

포인트만 쓸어 담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나는 다시 검기의 파동을 쏟아냈다.

조준은 포기했다.

한두 번으로 숙달될 난이도가 아니었으니.

그 대신 속도전이다.

1초에 세 개가 넘은 검기의 파동이 거인족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거인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나를 만난 걸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라.'

콰콰콰콰쾅!

무수한 검기의 파동이 거인족의 몸을 두드렸다.

놈의 구슬픈 외침이 전장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대족장을 농락하며 우주적 존재들의 만족감을 최대한 이끌어냈다.

***

쿠우웅!

결국 대족장이 쓰러졌다.

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거인족의 대족장 '칼라만'이 사망했습니다.]

[43층의 클리어 조건을 모두 충족했습니다.]

[44층으로 올라설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와 함께 우주적 존재들이 빠르게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 퇴장하지 않은 수십의 우주적 존재들이 내게 후원금을 쏟아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어비스 포인트는 어느새 8천만 어비스 포인트를 조금 넘어섰다.

'허탈하군.'

엄청난 양의 어비스 포인트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문학적이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얻기 쉬웠던 건가.'

과거에 고작 100만.

아니, 10만 포인트를 손에 넣고 눈물 흘렸던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재밌어. 정말로.'

상상도 못 했다.

나의 인생이 이렇게 바뀔 거라고는 말이다.

백만, 십만이 아쉬워서 빌빌 기었던 내게.

몇 번의 칼짓으로 수천만의 어비스 포인트가 손에 들어오게 될 줄이야.

그리고 그것을 '쉽다'라고 생각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그러면 이제 거인의 관문도 끝인가.'

그리고 44층으로 가기 전, 비밀 상점이라는.

아직 경험해 본 적 없는 히든피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주적 존재들이 큰 만족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주적 존재들의 만족감을 이끌어 냈습니다.]

[비밀 상점을 이용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잠시 후 어비스 관리자의 집무실로 이동합니다.]

이런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

"대단했습니다."

관리자가 내게 말했다.

"상당히 흥미로웠어요. 대족장은 꽤 강한 녀석이거든요. 사실 43층의 플레이어인 강민 님이 대족장에게 승리했다는 것만으로도 우주적 존재들께서는 충분히 만족하셨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족장을 직접 상대해 본 결과 확실히 40층 대의 플레이어가 압도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그런데 쓰러트리는 걸 넘어서 농락까지 해 버릴 줄이야. 아직도 그 화끈한 모습에 우주적 존재들께서 여운이 남으신 모양입니다."

아까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 녀석 말이 꽤 많다.

"아, 참참. 내 정신 좀 봐."

내 표정을 읽었는지 관리자가 다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비밀 상점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비밀 상점에는 꽤 괜찮은 아이템들이 많답니다. 강민 씨가 가진 포인트라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기겁할 만한 아이템들도 구매할 수 있겠군요."

"알겠다. 그러니까 빨리 보내줬으면 좋겠군."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비스에서 보내실 시간 동안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럼."

관리자가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했고.

다시 한번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비밀 상점으로 입장합니다.]

[비밀 상점에서 한 번 퇴장하면 다시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비밀 상점에 입장했습니다.]

그리고 내 시야가 바뀌었다.

"호오아아아!"

옆에서 몰른이 탄성을 터트렸다.

"저, 저것 봐요오!"

그리고 장비를 향해 달려가는 몰른.

장비를 만지작거리며 쉴 새 없이 탄성을 쏟아내고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선반과.

그 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각종 장비들.

대충 봐도 스펙을 몇 단계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 만한 장비들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진짜는 이게 아니겠지.'

진짜는 언제나 초라한 곳에 숨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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