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뭐야. 김호윤 표정이 왜 저래?"
"구철민은 또 어떻고?"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알아?"
대기실에 모습을 드러낸 나와 두 사람을 보며 플레이어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저들은 김호윤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하리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금 김호윤의 모습은.
'애처롭군.'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 표정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 누구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라도 김호윤이 우주적 존재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걸 느꼈으리라.
"그럼 누가 이긴 거지?"
"구철민이겠지. 구철민도 창술 명가잖아!"
"구철민? 근데 쟤도 얼굴이 썩어 있는데?"
"무슨 소리야. 김호윤이 표정 관리하는 거지. 원래 검술 명가 사람들 감정 안 드러내는 거 몰라?"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승리했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서운하거나 아쉽지는 않다.
나라고 해도 저 사람들처럼 생각했을 테니까.
그렇지 않은가.
한강민의 모습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주성이다.
이제 막 어비스에 등장해 우주적 존재들의 관심을 조금 받고 있는 플레이어였으니까.
오히려 이런 반응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하지.
게다가 딱히 그런 사실을 떠들어 대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어비스에서의 목표는 빠르게 어비스 포인트를 쌓는 것.
괜히 플레이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 없다.
우주적 존재들의 관심만 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쨌든 잠시 후 플레이어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들 역시 김호윤과 구철민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놈들이 방계라지만, 명가의 영향력은 일반 플레이어들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무… 나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구철민이 몸을 들리며 내게 한 마디 내뱉었다.
끝까지 자신의 가오는 지키려는 녀석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다.
그에 반해 김호윤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 녀석도 속에서 열불이 뻗치고 있을 거다.
다만 여기에서는 보는 눈이 많으니까.
자신이 정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릴 테니 참고 있을 뿐이겠지.
어쨌든 나 역시 얻은 것이 많다.
엄청난 어비스 포인트는 둘째치더라도 검술 명가 플레이어의 솜씨를 두 눈에 담았다는 것.
옆에서 몰래 훔쳐보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를 의식하는 상태에서 본인의 모든 힘을 끌어 내었던 모습을 말이다.
'이 경험은 추후 검술 명가와의 싸움에서 내게 큰 도움이 되어 줄 거야.'
그것은 확실하다.
지금 내가 탑을 빠르게 오르는 것은 물론 포식 능력의 도움도 크지만, 전생의 경험도 그에 못지 않게 크다.
과거의 실수를 보안하고 더 나은 선택지를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험의 힘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좋은 경험인 건 확실하지.'
어쨌거나.
이제는 거인족과의 마지막 한 번의 싸움만을 앞두고 있다.
'문제는 다시 두 명의 파티원을 구해야 한다는 건데.'
물론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도 나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한 플레이어들이 꽤 많았으니까.
당장 내게 말을 걸지는 못하고 있을 뿐, 내가 한 번만 콕 찔러 줘도 당장에 파티를 맺자고 나설 것 같은 표정들이다.
'사실 이쯤 됐으면 굳이 플레이어를 고를 필요도 없어.'
이미 조금 전 거인과의 싸움에서 우주적 존재들은 충분히 내게 열광했다.
더 이상 머리를 굴려 상대를 고르지 않아도.
이 상태만 무난하게 유지한다면 내 목표인 2000만 포인트를 달성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주적 존재들이 웅성대기 시작합니다.]
[우주적 존재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뭐지?'
플레이어들도 아니라 우주적 존재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는 건.
'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럴 일이 있을까.
여기에 모여 있는 우주적 존재들은 사실 한량이나 다름없다.
이미 각자의 세상에서 엄청난 위업들을 달성하고 일종의 '신계'에 올라선 이들이었으니.
저들에게 큰일이 날 일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
그리고 저런 메시지와 함께 플레이어들 역시 웅성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현상일 것이다.
나도 처음이었으니 저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테지.
그리고 다시.
[거대한 격을 지닌 우주적 존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나는 눈을 번뜩였다.
거대한 격.
43층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은 우주적 존재다.
'지혜의 수문장은 아닐 거다.'
지혜의 수문장의 격은 거대한 격 그 이상의 격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분명 거대한 격을 지닌 존재가 43층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례적인 일.
[낮은 격을 지닌 우주적 존재들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납니다.]
[높은 격을 지닌 우주적 존재들이 머뭇대며 거대한 격을 지닌 우주적 존재에게 자리를 내어줍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조용한 걸 보면 나에게만 떠오른 메시지인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격을 지닌 우주적 존재가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이런 기억은 없다.
확실하다.
내 전생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는 뜻이다.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솔직히 말해서 나도 숨을 급히 들이켤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제안 내용이 뭔지도 알려주지 않고 제안 수락 메시지가 떠올라도 되는 건가.'
적어도 힌트라도 하나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더 어처구니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안 거절 시 보유한 모든 어비스 포인트가 회수됩니다.]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내 참….'
이건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지 않은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굳이 저런 메시지가 아니어도 제안을 거절할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그래. 수락하겠다."
내가 말했고.
플레이어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진 채 온갖 추측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더 떠올랐다.
[잠시 후 어비스의 관리자의 집무실로 이동합니다.]
'미치겠군.'
관리자의 집무실.
이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관리자의 집무실은 바로 어비스에서 얻어낼 수 있는 히든 피스 중에서도 최고의 히든 피스 중 하나다.
***
그리고 그 무렵 탑의 55층 마을.
그중에서도 화랑 길드의 건물 내부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화랑 길드의 길드장인 철기영과 위드 길드의 길드장 박명철이었다.
"하하…."
박명철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조차도 어안이 벙벙한 심정이다.
"박명철 씨. 꼭 한번 뵙고 싶어 초청했습니다. 이렇게 초청해 응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철기영이 인사치레를 건넸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박명철이 답했다.
철기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철기영이 박명철을 초청했다는 건, 결국 그 역시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다.
체술 명가를 버리고, 위드 길드를 택하겠다는 결심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철기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박명철이 조금은 긴장된 기색으로 철기영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길드 랭킹이 다시 개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 말에 번뜩이는 박명철의 눈빛.
그는 그 순간 올 것이 왔구나, 라고 생각했다.
위드 길드가 탑의 전면에 드러나게 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길드 랭킹에는 많은 요소들이 개입됩니다."
박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명철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길드원의 수, 길드원의 평균적인 전투 능력, 자금력, 그리고 탑에서의 전반적인 입지 등.
많은 요소들이 길드의 랭킹에 관여된다.
그리고 그렇게 길드의 랭킹을 늘어놓는 것은 사실 Top3길드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다.
애초에 탑의 시스템이 정하는 요소가 아니었던 만큼, 그 안에는 많은 정치적인 술수나 각종 이해관계들이 얽히기도 했다.
다만 Top10 안에 속할 수 있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해당 길드에는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줬으니.
모두가 Top3 길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리고 저는…."
철기영이 박명철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위드 길드를 랭킹 3위의 길드로 만들고 싶군요."
"……?"
박명철이 숨을 급히 들이켰다.
"무, 무슨…."
물론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인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서 엎드려서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빌 정도로 파격적인 사건이었지만.
박명철이 납득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저희 길드의 랭킹은 고작 30위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3위라니요. 그건 당치도 않을 일입니다."
박명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30위권에서 10위권 안으로 진입하는 것만 해도 파격적일 텐데.
곧바로 랭킹 3위라니.
분명 다른 이들의 반발도 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박명철 씨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 저 역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철기영이 다시 한번 입꼬리를 비틀었다.
"현재 1위는 우리 길드 화랑이고 2위는 검술 명가 산하의 청검문입니다. 그리고 3위는."
"마법 명가 산하의 블랙…."
"그렇죠. 정확합니다."
철기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3위 길드가 밀려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이미 청검문과 합의를 마친 상태이며 블랙을 랭킹 리스트에서 '제거'하기로 했지요."
"허…!"
제거라니.
박명철은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것만 같았다.
위드를 3위로 만들겠다는 것 이상으로 충격적인 선언이다.
그 말은 즉, 마법 명가를 길드 측에서도 배제하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그 말은 혹시… 검술 명가 쪽에서도…."
"물론이죠."
말했듯 2위의 청검문은 검술 명가 산하의 길드.
그들의 결정은 명가의 인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고.
그들이 블랙을 제하기로 했다는 건 결국 검술 명가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뜻과도 같았다.
"맙소사."
박명철은 다시 한번 탄식을 쏟아냈다.
"아무래도 검술 명가 쪽은 다른 명가들을 버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검술 명가가 그동안 그렇게 조용했던 겁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본심이야 제가 알 도리는 없겠습니다만."
마법 명가의 몰락.
그리고 체술 명가 플레이어의 사망까지.
결국 검술 명가는 다른 모든 명가들을 명가의 '치부'라고 여기기로 결정했다.
즉, 그들이 탑의 최정상에 군림하는 독보적이고 유일한 '명가'로 남겠다는 뜻.
"다, 다른 명가들은 어떤…."
"그 역시 알 수 없지요. 아마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겁니다."
철기영이 관자놀이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이 순간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꿀꺽
"이제 우리의 탑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우리 플레이어들이 명가의 발아래에서 놀아나지 않는. 정말 플레이어들을 위한 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
동시에 박명철은 생각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강민 씨가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것들이 정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명가의 몰락.
'철기영은 상상조차 못 하고 있겠지.'
이 모든 일들이 강민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라는 것을.
마치 자신의 공인 양.
자신의 업적인 양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은 그 역시 강민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