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오러 블레이드와 뇌전검은 빼고.'
특히나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가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면 오러 블레이드의 정체는 숨기는 게 좋다.
현재 탑에서 오러 블레이드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 내가 유일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주성의 모습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면, 저 녀석에게 내가 한강민이라는 사실을 광고하는 꼴이다.
'어쨌든 검술 명가는 쓰러트려야 할 적이니까.'
나의 진짜 정체를 알릴 생각도, 나의 전력을 노출할 생각도 없다.
장비 정도야 어디 가서도 튀어 보이는 장비는 없다.
미스릴이나 아다만티움을 구별할 사람도 없을뿐더러, 모양 자체도 투박하기 그지없었으니까.
무기도 마찬가지다.
검은색의 곡도는 널리고 널린 무기다.
그러니 히든 피스로 얻어낸 오러와 뇌전검만 숨긴다면 내가 한강민이라는 사실을 들킬 리는 없는 셈이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그 두 능력 없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인족과 가까워진 순간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거인족의 창술가 '코물리'에게 '위엄'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역시.
제 아무리 거인족이라고 해도 현재 내 능력치는 못 따를 정도라는 거겠지.
이렇게 위엄의 효과까지 더해진 이상 놈은 결코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막대한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플레이어 '이주성'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그렇게 떠오르는 메시지를 뒤로한 채, 거인을 바라봤다.
성인 남자의 몸통만큼이나 두꺼운 창.
그 길이만 해도 족히 3~4m는 이를 것 같았다.
거기에 놈의 팔까지 더한다면.
'접근하는 것 자체가 과제라는 뜻이지.'
더욱이 뇌전검의 속도 증가 버프도 받을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그거야 그거고.'
어차피 녀석의 움직임 역시 '위엄'의 효과 때문에 느려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꽈악!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충격파와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했다.
꾸득!
근육이 꿈틀대며 막대한 에너지가 신체 내부에서 느껴지기 시작했고.
'가 볼까.'
파앗!
몸을 날렸다.
거인족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리고 그 순간.
패애앵!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성과 함께 거인족의 창이 날아들었다.
엄청난 속도다.
게다가 내 예상보다 리치가 훨씬 길었으니, 순식간에 내 코앞에 놈의 창이 도달했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이 까짓거.'
콰아아앙!
검으로 놈의 창을 받아쳤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어어어!]
누가 보더라도 거인족의 창에 온몸이 일그러져야 할 건, 내 쪽이었을 테지만.
오히려 지금의 충돌로 거인족의 상체가 크게 들렸다.
오우거의 신체로 증폭된 나의 힘.
그리고 위엄에 의해서 위축된 거인족.
이 두 가지 효과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마치 물리적 법칙을 거부하는 것만 같은 장면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눈을 번뜩였다.
'지금이다.'
나는 이 싸움을 질질 끌 생각이 없었으니.
파앗!
드러난 틈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김호윤이 눈을 부릅떴다.
조금 전만 해도 이주성이 거인족을 향해 내달리는 모습을 보며 조소했던 그였다.
특히나 거인이 창을 내지르는 순간 그는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호윤 자신도 놀랄 만큼 거인의 창은 날카롭고, 빨랐다.
특히나 예측 할 수 없을 만큼 기다란 리치에 자신의 싸움이 아니었음에도 등골이 서늘해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거인을 향해 무작정 직선으로 달리는 이주성의 모습은, 마치 불나방 같았으니.
'멍청한 놈. 결국 스스로의 오만에 빠져 목숨을 내던지다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인 자신과, 조금 모자란 듯 보이지만 어쨌든 창술 명가의 플레이어인 구철민.
그 둘 사이에서 이주성이 큰 부담감을 느껴 무리수를 두었다고 판단했다.
허나 정작 이주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니, 누가 본다면 정말 목숨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무모하게 거인의 창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내가 저런 녀석에게 무엇을 기대했다는 말인가.'
김호윤이 탄식을 쏟아낸 순간.
콰아아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
"뭐, 뭐야!"
김호윤과 구철민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거, 거인이… 거인이 밀려났다니!"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1/4밖에 되지 않는, 거인 앞에서 어린아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강민이 힘 싸움에서 거인을 밀쳐냈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놈…!'
김호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고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들 명가에서도 늘 교육하는 내용 중 하나였으니까.
탑에서 싸우다 언제라도 자신보다 훨씬 커다랗고 강한 힘을 가진 상대와의 싸움을 상정한다.
분명 그런 기술을 통해 김호윤도 거인족의 힘을 흘려보내며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김호윤 자신의 실력으로는 가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힘 대 힘으로 거인을 밀어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괴력에 특화된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인 자신도 거인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주성이 그런 일을 해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그렇다면 정말 괴물의 힘을 흘려냈다는 것밖에는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흘려보내는 것을 넘어서서 그 힘을 이용해 괴물에게 타격을 줬다는 것인데!
'대체 어떻게….'
아직 김호윤 그의 경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흘려서 상대에게 역으로 전달하는 정도의 기술은 검술 명가에서도 손에 꼽는 이들만 오를 수 있는 경지였건만!
'저 녀석이 정말 그 정도 수준으로 검을 다룬다는 말인가…!'
꿀꺽
등골이 서늘했다.
대체 어디에서 저런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어떻게 그동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지.
'믿을 수 없다.'
그렇게 입술을 짓이기며 이주성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미, 미친!"
구철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인과의 힘싸움에서 이긴 이주성의 그 다음 행동 때문이었다.
'무슨!'
이주성은 쉬지도 않고 거인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자살 행위다.'
거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관절, 혹은 등 뒤를 노려야 한다.
품 안에 뛰어들었다가는 거인의 괴력에 온몸이 짓이겨진 채 그대로 죽어 버릴 게 당연했으니까.
실제로도 거인은 자신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이주성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마치 자신의 승리를 예견했다는 듯이.
그리고 곧 거인족은 자신의 창을 움직였다.
창은 창끝의 날뿐만이 아니라, 창 대 역시 모두 무기다.
한 손으로는 창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이주성에게 향했다.
엄청난 속도다.
게다가 이주성은 이미 거인의 품 안에 완전히 파고들었으니,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없어 보였다.
만약 거인에게 사로잡힌다면, 창대에 몸이 짓눌려 그 자리에서 온몸의 뼈가 박살 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콰직! 콰드드득!
"어…?!"
이 순간에 김호윤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쏟아졌다.
뭘 봤는지 인지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장면은.
푸학! 푸훅!
잘려 나간 거인의 팔 두 개가 허공에 떠올랐다는 것뿐이다.
'대체… 대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강민이 검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 했건만 그 사이에 강민은 거인의 양쪽 팔을 잘라냈다는 말이다.
'그게 가능한 말인가.'
속도와 힘.
그 어느 부분에 있어서 완전히 거인을 압도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라면 할 수 있을까.'
김호윤이 생각했다.
하지만 결론은 뻔하다.
불가능하다.
아니, 자신뿐만이 아니라 검술 명가에서도 저 정도의 힘과 속도를 보이는 플레이어는 많지 않으리라.
그게 끝이 아니다.
콰지지직!
다시 한번 검이 허공에서 번뜩인 순간 거인의 가슴팍에서 엄청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역시나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어어어어!]
"무슨! 이게 무슨…!!"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빠드드득!
이번엔 고작 가죽 따위가 아니다.
거인의 갈비뼈가 박살나며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크아아아아아악!]
양쪽 팔을 잃고, 가슴이 완전히 뭉개진 거인이 포효했다.
그게 끝이었다.
쿠우우웅!
거인의 몸이 순식간에 고꾸라졌고.
[거인 창술사 '코물리'가 사망했습니다.]
강민의 승리였다.
"……."
"……."
김호윤과 구철민.
그들의 머릿속에 조금 전 강민에게 내뱉었던 말들이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고.
잠시 후 그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
'2분? 아니, 1분 조금 넘었겠군.'
내가 거인족을 처치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오러 블레이드만 있었어도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을 텐데.'
검기의 파동이었다면 5초 언더다.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저 멀리에서 동공이 길을 잃고 있는 두 녀석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나 구철민은 내 눈조차 마주 보지 못한 채 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나는 어느새 김호윤 옆에 다가섰다.
"괜찮았나?"
내가 물었다.
당연히 괜찮았겠지.
지금 내 물음은 오로지 놈을 놀리기 위한 한 마디다.
아까 전에 내 옆에서 떠들어댔던 자신의 건방짐을 뼈저리게 반성하라는 나름의 채찍질이다.
"너, 너… 대체…."
그렇게 김호윤이 입을 열었다.
"뭐, 뭐 하는…."
하지만 김호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우주적 존재들이 최고의 플레이어 한 명을 선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떠오른 메시지 때문이었다.
"제, 젠장…."
구철민은 이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김호윤은.
'이 녀석도 별반 다를 것 없군,'
혹시나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렇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우주적 존재들이 만장일치로 최고의 '이주성'을 최고의 플레이어로 선정했습니다.]
'만장일치.'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리고.
['업적 – 우주적 존재들의 원픽'을 달성했습니다.]
[5,0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오백만 어비스 포인트.
이로서 내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어비스 포인트가 1500만을 넘어섰다.
'정말 엄청난 속도군.'
이 속도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45층까지 2000만 포인트는 확실히 넘길 수 있으리라.
그리고.
[잠시 후 대기실로 귀환합니다.]
[43층의 클리어 조건을 절반 달성했습니다.]
나는 김호윤을 바라봤다.
"아쉽게 됐군. 한 번 더 거인과 싸워야겠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김호윤의 속을 긁어줬다.
"……."
김호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분해 보였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 자리에 검술 명가의 직계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겠지.'
창술 명가 플레이어 앞에서 일반 플레이어인 나에게 처참한 망신살을 뻗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마 놈은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죽기 전까지 전에 입 밖으로 내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대기실에 도착했고.
그 자리에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나와 김호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