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이, 이 새끼…!'
그는 이미 싸움이 시작된 순간부터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벌써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며,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오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자신이 느끼기에도 그동안 빈틈을 드러냈다.
첫 번째, 두 번째에는 기겁했다.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이주성이라는 플레이어는 그 빈틈을 놓칠 만큼 허술한 플레이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이주성은 빈틈을 노리지 않았다.
오히려 못 본 척 넘어가며 반대쪽을 공격하거나 오히려 자신이 빈틈을 만들어내기 일쑤였다.
자신이 집중하지 않았으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야.'
명가의 자존심이 있는데.
아무리 방계라지만, 자신은 명백히 명가의 피를 이은 플레이언데.
그래.
솔직히 그도 인정한다.
일반 플레이어들 중 자신보다 뛰어난 플레이어는 있다.
하지만.
자신을 농락한다는 건, 강하고 약하고의 수준을 한참이나 벗어났다는 뜻 아닌가.
마치 어른이 아이와 놀아주는 것과 같은 수준 차이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는 것인데!
그때였다.
[우주적 존재들이 모여듭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플레이어 '이주성' 님을 후원합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플레이어 '이주성' 님을 향해 환호를 내지릅니다.]
[더욱더 격이 높은 우주적 존재들이 흥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설마?'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의 머리가 잠시 멍해졌다.
이주성이 자신을 농락하는 이유가.
정말 저 우주적 존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는 말인가?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다는 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현실이고.
자신은 이주성이라는 녀석의 어비스 포인트를 위한 제물이 되었다는 말인가?
"이런 개자식이이이이이!"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명가라는 체면도.
주변에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리고 다른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고.
뚜욱-
이성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
멍청한 놈.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놈은 최선을 다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정말로 자신이 나를 이길 수 있다는 착각과.
나를 죽이고 현재 먹이 칠해진 체술 명가의 위엄을 되살리겠다는 깊은 착각을 가진 채 말이다.
'이것이 명가의 본질이건만.'
어차피 인간이다.
운이 좋게 혈계라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놈들도 인간이었고.
힘의 논리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처절해지는 인간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싸움을 끌 필요가 없겠어.'
조금 전 떠올랐던 메시지.
더 높은 격의 우주적 존재들이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는 그것 말이다.
'내 생각보다 반응이 빠른데.'
고작 42층에서 비교적 높은 격을 가진 녀석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건, 확실히 기염을 토할 만한 성과였으니까.
'그럼.'
이제는 정말 끝낼 시간이다.
카아아앙!
나는 놈의 주먹을 쳐냈다.
"……!"
놈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지만, 큰 반향은 없다.
한눈에 봐도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은 이성을 잃게 된 순간 그들 신체 내부에 모아 둔 '기'라는 것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확실히 위협적이긴 하지만.'
그것뿐이다.
애초에 나보다 한참 약한 녀석이었을 뿐더러, 이성을 잃은 이상 내 상대가 될 수는 없다.
카아앙!
다시 놈의 주먹을 쳐냈고.
타다닥-
충격파와 오우거의 신체를 함께 사용했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뇌전검과 오러 블레이드는 사용하지 않았다.
두 기술은 눈에 쉽게 띄는 만큼 내 정체를 숨기고 있는 상황에선 조심하는 게 맞다.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휘익!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오우거의 신체와 증폭된 충격파의 위력에 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카아아앙!
"커헉!"
놈의 입에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베어 낼 순 없지만, 충격파의 파동이 놈의 금강불괴를 넘어 장기를 뒤집어 내고 있을 것이다.
쿠우웅!
카아아앙!
콰드드득! 콰아앙!
쉴 새 없이 몰아쳤다..
얼굴에 나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커헉, 커허윽… 흐으어억!"
알 수 없는 신음을 끊임없이 토해내는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
놈의 동공이 뒤집어졌고.
입에서는 게거품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
'끝이군.'
콰아아앙!
다시 한번 놈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주 미세하게 놈의 가슴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놈의 몸이 고꾸라졌다.
하여간 금강불괴는 괴물 같은 능력이다.
아무리 오러 블레이드가 없다고는 해도, 이렇게 공격했는데도 고작 상처 조금 나는 것에 그치다니.
물론 겉모습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다.
이미 놈의 내장은 찢기고 터져 나갔을 테고, 이제는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살 남을 수는 없을 테다.
그리고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플레이어들은 급하게 몸을 떨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나는 여섯 개의 마석을 꺼내 들었고.
이걸 어찌해야 할까.
내가 마석 여섯 개를 꺼내든 순간, 플레이어들의 눈에 탐욕이 물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향해 달려드는 플레이어는 없다.
'이러면 곤란한데.'
마석이라는.
적어도 42층 내에서는 금보다 진귀한 화폐를 가지고 그냥 놀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는가.
"자, 분명 너희들도 이 마석이 가지고 싶겠지?"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마석이 아니라면, 굳이 여기에서 서로 부대끼며 피를 흘리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팔겠다."
"뭐, 뭐?!"
"판다고?"
무슨 소리냐는 표정들이다.
무슨 소리긴.
"마석 하나에 어비스 포인트 50만. 흥정은 없다. 더 준다면 거절하진 않고."
현재 내가 가진 어비스 포인트는 이제 막 300만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여섯 개에 50만이라면, 300만.
'42층에서 600만 포인트면… 이번 생에서는 지혜의 수문장을 충분히 만날 수 있을 거다.'
50만.
분명 엄청난 액수다.
솔직히 이 중에서 50만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고.
여기는 고작 42층이니까.
그리고 50만 포인트를 모을 정도의 실력자가 굳이 마석을 내게서 구매할지도 잘 모르겠고.
'어쨌든 나는 아쉬울 게 없으니까.'
누구도 구매하지 않는다면 방법은 많으니까.
그러던 중이었다.
"내가 사겠다."
한 플레이어가 손을 들고 내게 걸어왔다.
"잘 선택했다. 너는 특별히 30만에 주도록 하지. 첫 번째 손님이니까 특별 할인이다."
"……."
어차피 가격이야 내 마음이다.
그리고 조금 깎아주는 모습도 보여야 다른 플레이어들의 흥미를 조금이라도 더 끌 수 있을 테니까.
[3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보유 어비스 포인트 : 3,301,000]
"자, 다음."
나는 남은 마석을 흔들며 외쳤다.
그리고 저 먼 곳에서 플레이어 한 명이 걸어 나왔다.
"나, 나도 사겠다. 이 거지같은 42 마석의 관문. 이제는 지긋지긋해.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어비스 상점에서 백만도 넘는 포인트를 쓰게 생겼어."
"좋은 선택이야. 물론 할인은 없다."
"…어쩔 수 없지."
[5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보유 어비스 포인트 : 3,801,000]
"세 개 남았다."
그 순간, 플레이어들이 움찔대기 시작했다.
이제 세 개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구매할 의시가 없던 녀석들도 조급해지기 시작할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때부터 플레이어들이 내 앞으로 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50만 포인트가 없는 이들은 저 먼 곳에서 입맛만 다시고 있었지만.
조금 전 플레이어의 말대로, 여기에서 며칠을 더 보냈다간, 50만은커녕 그 몇 배의 포인트를 낭비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 않겠나.
'게다가 저놈들에게 포인트 몇 푼 얻자고 재롱을 부리는 게 꽤나 자괴감이 크기도 하고 말이야.'
우주적 존재들을 흘끔 바라봤다.
형체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그저 커다란 그림자의 형태만 비쳐 보이는 녀석들.
'어디에서 온, 뭐 하는 녀석들인지. 그리고 저 녀석들이 정말 탑의 비밀을 알고 있을지….'
어쨌거나.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었다.
"남은 건 세 개뿐인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겠군."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사태라면, 당연히 제품의 가격은 상승하게 되는 게 자본의 원리다.
"경매를 시작하겠다."
처음에 손해 본 20만 포인트.
그리고 위드 길드 플레이어에게 공짜로 준 3개의 마석의 값을 한 번에 충당할 수 있는 기회다.
***
'그렇단 말이지.'
지금 이 상황을 주시하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바로 화랑 길드의 길드장, 철기영이었다.
'위드 길드… 박명철. 확실히 강단이 있어.'
조금 전 한명준으로부터 들려온 보고와 42층에서 들려 온 보고를 막 받아 든 참이었다.
'위드 길드. 범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그리고 그는 이주성에 대한 보고를 다시 떠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현재 탑에 40층에 머무는 방계 따위보다 강한 플레이어는 널리고 널렸다. 게다가 싸움도 20분이 훌쩍 넘게 지속되었다고 하니, 훌륭하긴 하지만 탁월하다고 보기는 힘들겠어.'
그 정도가 이주성의 실력에 대한 철기영의 평가였고.
철기영은 이주성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금세 지워 버렸다.
그보다 중요한 건, 위드 길드였으니까.
'위드 길드가 이로써 급부상하게 될 거야.'
위드 길드가 화랑 길드의 굳건하던 1위 세력을 위협할 만한 충분한 다크호스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의 왕국에 위기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철기영은 그 정도로 좌절할 인물이 아니다.
지금의 화랑을 일궈내면서 이런 일이 없었겠는가.
길드가 궤멸 직전으로 몰렸던 적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버텨내고 지금의 화랑을 만들어냈으니까.
'체술 명가는… 어비스에서만 두 명째 당해 버렸어. 여기에서 체술 명가가 이렇다 할 제스처를 취하지 않으면 정말 끝이야.'
철기영의 눈빛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하지만 체술 명가가 정말 위드 길드를 압박할 수 있을까?'
철기영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쉽지 않겠지. 어쨌든 위드 길드는 탑에서 가장 각광 받는 길드 중 하나로 성장했으니까. 명가 놈들도 절대 다수의 플레이어들의 시선은 의식될 수밖에 없을 테고 말이지.'
하지만 그것은 철기영의 생각일 뿐.
역시 변수는 명가의 자존심이다.
'지켜봐야겠어. 지금 당장 위드 길드가 끌리는 것도 맞지만,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돼.'
철기영은 눈앞에 있는 체술 명가의 서신을 바라봤다.
이번 체술 명가의 대응에 따라 체술 명가와 다시 협력을 할 수도.
아니면 위드 길드와 접촉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어떻게 나올 테냐. 체술 명가의 최강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