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감회가 새롭다.
과거에는 감히 발을 디뎌 볼 생각도.
혹시라도 가까워지면 다시 먼 곳으로 달아나기 바빴던 42층의 중앙 공터에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다니.
심지어 나를 향하는 시선들은 무시나 경말 따위가 아니다.
두려움, 견제, 혹은 질투와 같은 감정들.
나는 드넓은 공터를 쭈욱 훑었다.
얼핏 봐도 백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 가득했다.
그중에는 전생의 기억에 담겨 있는 인물들도 있다.
각종 명가와 거대 길드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게 될 플레이어들이다.
그리고 그들 중 몇몇은 내 얼굴을 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물론 경계심 따위는 없다.
어디서 고개 빳빳이 들고 자신들을 내려보고 있느냐는 그런 표정이다.
'그나저나.'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위드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세 명인가.'
위드 길드의 문양이 그려 있는 갑옷, 혹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보였다.
우선 저들에게 세 개의 마석을 줄 생각이다.
어차피 남아도는 마석인데, 세 개 정도 없어진다고 어떻게 될 일도 없을 테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위드 길드 소속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위드 길드의 가오도 살아날 테고.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이 위드 길드를 한 번이라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일석이조지.'
지금 여기 있는 녀석들은 웬만해선 탑 내부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 정도는 있는 녀석들일 테니.
여기에서 저 녀석들에게 그런 인식을 한 번 심어 주면, 입으로 백 마디 천 마디 떠드는 것 이상의 광고 효과를 보여줄 수 있을 거다.
나는 공터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뭐야, 저 새끼? 왜 저렇게 당당해?"
"얼굴 아는 사람 있어?"
"몰라. 처음 보는데?"
"혹시 어디 길드장 동생이라도 되는 건가?"
사방에서 이런저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누구는 내가 걷는 방향에서 물러나 길을 열어주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나를 향해 무기를 겨누기도 했다.
그렇다고 쉽사리 나를 향해 다가오는 플레이어는 없다.
아무래도 우주적 존재들을 몰고 다닌다는 점과 내 몸에서 넘치는 여유 때문일 것이다.
"흐어어어…. 다들 무섭게 생겼어요오…!"
몰른이 중얼거렸다.
몰른이 내 옷깃을 꽈악 붙들었다.
아무리 내 옆이라고 해도 저 녀석들이 뿜어내는 흉흉한 살기에 위축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 사이를 여유롭게 거닐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 앞에 다가갔을 때.
"이, 이주성… 씨?"
"예. 제가 이주성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예."
역시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다.
"여기 온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보아하니 꽤 오래 계셨던 것 같은데."
"음… 저는 한 달 정도 됐습니다."
"저는 두 달."
"저는 이제 3주 정도요. 제가 오고 나서 이 사람을 만나서 중앙으로 왔어요. 아무래도 주변을 맴돌다 보면 너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서…."
사실 두 달이면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다.
게다가 고작 셋이서 중앙부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실력을 증명한 셈이나 다름 없고.
투두둑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석을 꺼냈다.
정확히 세 개다.
"어…?"
"어어어?!"
"허어어억!"
세 개의 마석을 본 순간 위드 길드 플레이어들의 눈이 튀어 나올 것처럼 커졌다.
"마석? 마석이잖아!"
"뭐, 뭐야…. 대체 얼마나 많은 마석을…."
"열 갭니다. 이걸 드리면 일곱 개가 남겠죠."
그 말에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다시 한번 술렁이기 시작했다.
"열 개?"
"뭐야, 진짜. 저 사람 뭐 있는 거 아니야?"
"조금 전에 42층에 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열 개를…."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징표에 개수는 쓰여 있지 않았으니.
더 많은 마석을 들고 있다는 사실에 몇몇 플레이어들의 눈에 탐욕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보다 위드 길드 사람인 것 같은데?"
"위드? 62층 클리어했다는 그 길드?"
"와… 위드 길드 잘나간다더니 저런 다크호스도 죄다 끌어모으고 있나 보네…."
"그렇겠지. 길드 세력이 커지는 데에는 유망한 플레이어 제대로 뽑아서 키우는 법도 있으니까…."
플레이어들은 위드 길드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들고 있었고.
나는 어느새 위드 길드에 가입한 다크호스가 되어 있었다.
어쨌든 한강민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감출 수 있으니, 나로서는 괜찮은 반응들이다.
어쨌든 나는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에게 말했다.
어서 이들을 여기에서 치울 생각이다.
앞으로 곧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으니까.
"우선 이걸 받고 다음 층으로 가십시오."
"하,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길드장님에게 대금을 요청할 생각이니까."
"예, 예?"
"세상에 공짜가 어딨습니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아, 아아…."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머쓱하다는 듯이 마석을 받아 들었고.
그리고 그때.
'……!'
초감각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포착됐고.
나는 플레이어들을 바라봤다.
"우선 먼 곳에 가서 24시간동안 휴식이라도 취하십시오."
그렇게 말했다.
"예, 예?"
"어서!"
다시 한번 소리를 높였을 때.
주변에서 플레이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세 명의 위드 길드 플레이어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다.
카아앙!
나는 그 즉시 검을 뽑아 들었고.
"허, 허억!"
그들은 기겁하며 내 주변에서 빠르게 물러났다.
저 먼 곳에서 나를 향해 엄청난 기운이 쇄도하고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냄과 동시에 충격파와 뇌전검을 사용했고.
'저기다.'
나를 향해 쇄도하는 건, 다섯 명의 플레이어.
초감각을 통해 파악한 결과.
'체술 명가에 입문한 녀석들인가.'
확실하다.
저들의 몸에 흐르는 마나의 기도는 분명 체술 명가의 그것이었으니까.
애초에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이 없는 경우, 명가에 입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긴 하다.
한계가 명확하지만, 이도저도 아닐 바에야 명가 고유의 호흡법이나 기술은 익힐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다.
명가에서 그들의 비기를 전수 해 줄 이유도 없었고.
입문한 플레이어들에게 지급하는 건, 결국 보급용 기술과 호흡법, 그리고 그나마 쓸만한 진법 정도.
처억!
검을 들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저쪽에서 거센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섯 명이 진을 이루며 나를 전 방위에서 압박해 오고 있었으니.
"이주서어어엉!"
누군가 내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리고.
타아아앙!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명가에서 그들의 비기는 전수해 주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진법은 철저하게 교육시킨다.
일반 플레이어들을 위한.
체술 명가 특유 초근접전의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체술 명가의 진법이었다.
'근접거리에서 포위당한다면 큰 피해를 면하기 힘든 기술.'
하지만 나는 이미 저들의 진법을 경험해 본 적 있다.
게다가 지금에는 초감각을 통해 저들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파직!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검기의 파동은 아니다.
그냥 단순한 베기.
"크아아아악!"
그 일격에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 한 명의 몸이 갈라졌다.
내가 베어 낸 플레이어는, 진법의 핵을 담당하는 플레이어다.
그가 사라진 순간, 진법의 위력은 절반 이하로 약해진다.
나는 곧바로 다시 검을 움직였고.
푸훅!
"커헉!"
오러 블레이드가 내 뒤쪽에서 접근하던 플레이어의 복부를 관통했다.
그 상태에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커헉!"
"크아아아악!"
한 순간에 두 명의 플레이어의 상체가 둘로 나뉘었고.
"허, 허어어억…!"
남은 한 명의 플레이어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나자빠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자빠져 있는 플레이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커억…!"
쿵!
남자의 몸이 단번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나는 검을 집어넣지도, 긴장을 풀지도 않았다.
'나와라.'
조금 전 나는 분명히 확인했다.
이곳에도 체술 명가의 방계 플레이어가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분명 나를 노리고 있을 테니.
'여기에서 확실하게 체술 명가와 나 사이의 서열을 정리해 주마.'
유수의 플레이어들이 보고 있는 한 가운데에서, 내가 체술 명가를 짓밟는다면.
'다시 한번 폭풍이 몰아치겠지.'
그리고 그때.
"이주성, 이 개자시이이이익!"
불나방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
'뭐야. 이거 무슨 상황이지?'
'이주성이 누군데 체술 명가 애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 건데?'
체술 명가의 방계 플레이어가 강민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주성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플레이어가 대체 체술 명가와 어떤 원한관계가 있기에!
하지만 그때 이런 대화들이 들려왔다.
"진짜로?"
"그렇다니까? 이주성이라는 애가 41층에서 박철균하고 최준혁 조지고 올라왔대."
"와 X바. 미쳤네. 위드 길드 막 나가는 거야?"
"막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 있다는 거지. 어차피 마법 명가는 끝났고. 체술 명가 정도는 제낄 수 있다는 거 아니겠냐. 솔직히 까놓고 말해 보자. 화랑 길드랑 체술 명가랑 붙으면 누가 이길 것 같냐?"
"화…랑…?"
"그러니까, 새끼야!"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리액션은 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화랑 정도면 체술 명가와 충분히 비벼볼 수 있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화랑 길드가 체술 명가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위드 길드가 출사표를 낸 거구나.'
'그래. 솔직히 이쯤이면 길드들이 들고 일어날 때가 되긴 했어.'
'명가 새끼들 아니꼽기도 했지. 개 같은 것들.'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강민의 싸움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재밌는데?'
'꽤 하잖아.'
이주성이라는 플레이어의 실력은 꽤 훌륭했다.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을 통 털어도 손에 꼽힐 정도로.
물론 강민이 체술 명가 플레이어와 싸우며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플레이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강민이 아니라 이주성으로 활동하는 만큼, 있는 실력을 그대로 끌어 올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우주적 존재들에게 또 한 번의 쇼를 제공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눈치챌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 플레이어들은 잠정적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
어차피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어 강민과 체술 명가의 싸움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쿠우웅! 쿠쿠쿠쿵!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위드 길드. 저런 괴물까지 포섭했을 정도면…'
'위드 길드가 바로 게임 체인저인가.'
'길드 랭킹에 큰 변동이 생기겠어. 아니, 길드 사이가 아니라 길드와 명가 전체에서도….'
그렇게 강민과 체술 명가 플레이어의 싸움이 지속되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는 죽을 맛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점점 깨닫고 있었으니까.
'이 새끼가…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