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아직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몰른도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무, 무서워요오오…."
그런 몰른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났다.
"무섭다고? 진심이냐, 몰른."
"헤헤헤에…."
내 얼굴을 몰른은 머리를 긁적였다.
"주인님을 보니까 안 무섭네요오…."
몰른도 아마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다.
지금껏 수없이 봐오지 않았던가.
내 옆에 있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 앞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험악하게 생겼건,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건, 내 앞에서는 의미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선 너는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요오."
몰른을 뒤로한 채 나는 플레이어들이 대치하고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두 무리의 플레이어가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엔 열 명. 맞은편에도 열 명.'
그리고 여기에 모여 있는 마석의 개수는 총 열 개.
각각의 무리에서 다섯 개씩.
상황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들은 42층에서 일종의 동맹을 맺은 각각의 무리였고.
지금 이 순간에 서로가 가진 다섯 개의 마석을 놓고 막 싸움을 벌이기 직전일 거다.
'주목할 만한 녀석은 있나.'
나는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가 낯설다.
그렇다는 건, 저들 중 명가나 거대 길드의 핵심 인물은 없다는 말이었다.
'잘 됐군. 몸풀기로 나쁘지 않겠어.'
그들과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개 그냥 넘기면 죽이진 않을 거야. 알잖아? 그게 상도인 거."
"개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너야말로 마석 얌전히 넘기면 살려는 주마."
양쪽에서 이런 유치한 대화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마디가 오고갔지만 결국 제자리걸음.
몇 번 공방이 오고 가긴 했겠지.
조금 전 분명히 내가 굉음을 들었으니까.
하지만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을 테고.
'결국 누구도 먼저 나서서 싸움을 끝낼 자신은 없으면서도 자존심은 상해서 달아나지는 못하고 있는 거겠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압도적으로 강한 누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결판이 났을 테지.
그 말은 곧, 저들 모두가 고만고만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음?"
"누가 오는데?"
플레이어들이 나를 돌아봤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잠시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
눈이 마주치고도 내가 걸음을 멈추지 않으니 가장 앞에 선 두 남자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뭐야! 멈춰! 안 멈추면 뒈진다?"
"너 뭐야, 이 새끼야!"
물론 말은 멈추라고 하지만 내심 계속해서 다가오길 바라는 눈치.
'새로운 표적이 생겼다는 거겠지.'
말했듯,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 저 두 집단은 고착상태였다.
저들도 지금의 대치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화제를 돌릴만한 대상인 내가 나타나 준 셈이다.
'반가울 테지.'
잠시나마 나를 표적으로 돌린다.
여차하면 나를 제물 삼아 화제를 전환한 뒤, 나를 처치하고 두 무리가 자연스럽게 해산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거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나름 괜찮은 시나리오다.
물론 그 제물이 내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내가 저들의 제물이 되어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재미있는 대화가 들리기에 잠시 들렀다."
내가 말했다.
그리고 머리 위에 징표가 박힌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마석이 꽤 많군. 나도 하나 욕심이 나는데."
"뭐 하는 새끼지?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가? 너 우리 숫자 안 보여?"
왼 편에서 가장 앞에 선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오른편의 리더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그래! 겁대가리를 상실한 새끼가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기는!"
그렇게 두 사람은 동시에 나를 표적으로 삼았다.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 뒤에 있던 이들도 마침 재밌는 먹잇감이 나타났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플레이어 '이주성' 님의 싸움에 흥미를 갖습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플레이어 '이주성' 님에게 어서 모두 도륙 내라고 소리칩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스무 명의 플레이어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혀를 찹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 순간 나를 향해 다가오던 이들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이주성?"
"저 새끼는 뭔데 우주적 존재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거지?"
그러면서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핀다.
"처음 보는 새낀데…. 너 어디 길드 사람이냐."
내가 들려줄 대답은 없다.
내가 가만히 서 있으니, 가장 앞에 선 한 남자가 소리쳤다.
"그냥 조져!"
스무 명의 플레이어가 한 번에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냥 마석만 넘겨주면 얌전히 보내 주려고 했건만."
"개소리! 저 우주 새끼들이 조금 예뻐한다고 신난 모양인데, 그거 X도 아니거든?"
저들이 저런 선택을 했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나.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했다.
'여기에서 한 번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오러 블레이드 5단계 고유의 기술인 검기의 파동 말이다.
저벅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촤악!
검을 한 번 휘둘렀다.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
오러 블레이드에서 짙푸른 에너지가 전방을 향해 터져 나왔다.
"뭐, 뭐…."
나를 향해 다가오던 플레이어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멈칫하며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지만.
'늦었다.'
"크아아아아악!"
"커어어어억!"
"으아아아아악!"
검기의 파동이 그들을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전방 수십 미터를 쑥대밭으로 만든 검기의 파동과 앞에서는 그 어떤 방어 능력도, 방어구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검기의 파동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시체조차도 증발해 버린 것이다.
[힘 21을 포식했습니다.]
[민첩성 19를 포식했습니다.]
[체력 16을 포식했습니다.]
.
.
.
'훌륭해.'
검기의 파동.
180의 육체 스탯을 투자해 얻어낸 능력이었지만, 그 효과는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돌덩이 열 개가 떨어져 내렸다.
'마석.'
투둑 투두두두둑
스무 명의 플레이어들이 사라지고 그들이 남긴 건, 열 개의 마석뿐.
고작 하나면 충분했을 텐데.
'열 개라니.'
조금 허무하기도 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다.
나는 열 개의 마석을 모두 주웠다.
[플레이어 '이주성' 님이 마석을 획득했습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명 다른 플레이어들도 내 메시지를 봤을 테니, 관심을 갖는 이들도 있겠지.
한 개를 제외한 아홉 개의 마석들.
앞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막대한 어비스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플레이어 '이주성' 님에게 열광합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어서 더 재미있는 장면을 보여 달라며 아우성칩니다!]
이런 메시지들이 수없이 쏟아져 내렸다.
[1,000,000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이 한 방에 백만의 어비스 포인트를 손에 넣었다.
이로서 내가 보유한 어비스 포인트는 총 220만.
'지혜의 수문장과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 2000만 이상이 필요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나는 조금 더 우주적 존재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그리고 아홉 개의 마석을 잘 활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역시 내가 향하는 곳은 42층의 중앙부.
이 순간에도 많은 플레이어들이 뒤엉켜 심리전을 벌이고 있을 그곳이다.
"몰른!"
뒤에 숨어 있을 몰른을 불렀고.
잠시 후 내 옆으로 몰른이 쫄래쫄래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박명철에게 메시지 하나를 전송했다.
[어비스에서 이주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과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에도 분명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있을 테니, 미리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
'이주성. 이주성이 나타났다.'
물론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이주성이라는 이름 따위에 관심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재 42층의 중앙부에서 미묘한 심리전과 혹은 서로의 실력을 겨루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뿐.
그럼에도 이주성이라는 이름에 주목한 이들이 있었으니.
최강혁의 분노를 곧이곧대로 전해 들은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이다.
이 중에는 체술 명가의 방계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고.
그 외에도 고된 과정을 통해 체술 명가에 입문한 플레이어도 존재했다.
이주성이 마침 자신들과 같은 층에 올라왔다는 건,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 기회일지도 모른다.
'최연빈. 그리고 최준혁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죽은 녀석들은 어쩔 수 없지. 이번 기회에 내가 한강민을 처치한다면 충분히 가문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방계는 방계 나름대로, 일반 플레이어로서 체술 명가에 입문한 플레이어는 또 그들 나름대로.
그렇지 않아도 이주성이라는 플레이어를 어비스에서 마주친다면 그 자리에서 처분하라는 명령을 전해 받은 참이었으니.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들은 허공에 떠오른 '이주성'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쾌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한계가 명확한 방계와, 일반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 이주성이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달콤한 먹잇감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놈을 죽일 수 있으면…. 분명 엄청난 보상이 뒤따를 거야.'
최강혁은 화끈한 성격만큼이나 상벌이 확실하다.
설사 일반 플레이어 출신일지라도.
그리고 말했듯 이주성이라는 이름에 주목하고 있는 건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들뿐만은 아니다.
바로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다.
강민이 박명철에게 메시지를 보낸 즉시, 박명철은 어비스에 존재하는 위드 길드의 플레이어들에게 급히 경고 메시지를 전송했다.
[이주성이라는 플레이어와 절대 충돌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이 메시지를 받고 나서 충돌이 생긴다면, 그건 저희 길드 차원에서도 보호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 그 사람의 말에 따르고, 절대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엄중한 경고다.
그러니 플레이어들도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
'이주성이 대체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인데… 길드장님께서 그렇게 경고를 하셨다는 건….'
'우선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지켜보자.'
이주성이 누구인지.
위드 길드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지만.
플레이어들은 박명철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길드장님 말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어.'
그것이 현재 위드 길드의 길드장, 박명철에 대한 인식이었다.
박명철의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오만가지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42층의 중앙부.
치열한 두뇌싸움과 목숨을 건 쟁탈전이 잠시 멈춘 이 자리에.
저벅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쏟아지는 우주적 존재들의 메시지는 덤이었으니.
[우주적 존재 '파멸의 권왕'이 플레이어 '이주성' 님에게 막대한 어비스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우주적 존재 '여유로운 살육자'가 플레이어 '이주성' 님에게 어서 플레이어들을 학살하라고 속삭입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마석의 관문 중앙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플레이어 '이주성' 님을 보며 격하게 호응합니다!]
'뭐야. 어떤 새낀데, 우주적 존재를 끌고 다니는 거지?'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