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대전 메시지가 쏟아진다.
하나하나 살펴볼 여유도 없을 만큼.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게 있어서는 더 좋은 상황이니까.
'내게 선택권이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지.'
물론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어비스에서 내 목표는 막대한 포인트를 끌어모아 지혜의 수문장과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어쨌거나 선택지가 많다는 건, 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더 유리한 상대를 골라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층에서 치러야 할 최소한의 대전의 수는 셋.
물론 세 번을 넘어서면 딱히 제한은 없다.
자신의 사정에 맞춰 백 번, 천 번까지도 자유롭다.
물론 나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세 번 이상의 대전을 치르지 않을 생각이고.
한 번, 한 번의 대전을 최대한 신중하게, 그리고 그 효과를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대전 신청 메시지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올 건 다 왔다는 뜻이겠지.
'그럼 한 번 볼까.'
누가 내게 많은 포인트를 줄 수 있을지.
'이번에는 명가 쪽은 피하는 게 좋겠어.'
플레이어들의 목록에는 명가의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그들은 목록에서 모두 제거했다.
굳이 놈들에게 빌미를 줄 생각은 없다.
그리고 어정쩡한 플레이어들도 모두 쳐냈다.
혹시 나에게 비벼서 이름이라도 떨쳐 볼 생각인 것 같지만.
웃기지도 않은 자신감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거대 길드의 플레이어들인데.'
그렇게 선택지는 순식간에 추려졌다.
남은 총 열 명의 플레이어들.
모두가 거대 길드의 플레이어들이었고.
개중에는 내 전생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녀석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그렇게 되자 내 선택은 금세 한 곳으로 좁혀졌다.
'이 녀석들 중 우주적 존재의 흥미를 가장 크게 끌 수 있을 만한 녀석.'
화랑 길드의 한명준.
현재의 시점에서 나름 화랑 길드의 루키라고 이름을 날리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내 전생에서는 이미 탑의 핵심 인원이 되었던 녀석이기도 했고.
전적도 꽤 준수한 것을 보면 우주적 존재들이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한 플레이어다.
그렇게 나는 한명준의 대전 신청을 수락했다.
[잠시 후 플레이어 '한명준' 님이 소환됩니다.]
***
'나이스!'
한명준은 쾌재를 질렀다.
제발 이주성이 자신을 택해 주기를 빌고 또 빌던 와중에 정말로 자신을 택했다니.
그러니 현재 화랑 길드의 루키로 촉망받는 한명준으로서는 이주성이라는 이름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듣보잡이라고 생각했는데, 박철균과의 대전에서 승리한 인물.
아니, 승리를 넘어서 죽여 버린 미지의 인물이다.
일시적으로 체술 명가와 손을 잡았다지만, 어쨌거나 화랑 길드와 명가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더더욱 이주성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질 수밖에.
'이주성.'
한명준이 강민의 가짜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그렇게 한명준은 강민이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에 소환됐다.
***
'나타났군.'
한명준.
내 기억에 있는 모습보다는 역시 한참이나 앳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특유의 멍한 표정은 여전하다.
"반갑다."
내가 한명준에게 말을 걸었다.
"바, 반갑다고?"
한명준이 말을 더듬으며 내 말에 답했다.
웬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
하기야.
녀석은 나를 보는 게 처음일 테니까.
게다가 지금 바뀐 모습이라면 더더욱.
한명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 녀석은 나쁜 녀석이 아니다.
그렇다고 딱히 좋은 녀석도 아니다.
실력은 뛰어나지만, 지능은 그리 좋지 않았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통해 어느새 탑의 핵심 인물로 자리하게 된 플레이어.
'그래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낫지.'
다른 모두가 나를 멸시할 때도 저 녀석만큼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정도로 다른 이들보다 낫다, 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생의 나는 그렇게 느꼈었다.
'어쨌거나 저 녀석 정도의 지능이라면 내가 충분히 이용해 먹을 수 있겠지.'
어쨌거나 감회가 새롭다.
전생의 나는 감히 한명준에게 말도 걸 수 없을 정도로 한명준은 높이 올라선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리고 굳이 반갑다는 인사를 건넨 것도 그 때문이다.
녀석의 경계를 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놈을 굴려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내 예상대로 한명준의 경계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하, 하나만 물어도 괜찮겠나."
최대한 침착하게 말 하려는 것 같았지만 말을 더듬는 건 숨기지 못했다.
이것도 전생 그대로다.
침착한 척, 냉철한 하지만 실상은 허당이었지.
그를 보고 냉철하다고 생각하는 건, 본인 혼자뿐이었다.
"들어 보고."
"응?"
"내가 답하고 싶은 것만 대답해 줄 생각이다."
나쁜 기억은 없다지만 굳이 호의적으로 대해줄 생각도 없다.
어차피 녀석은 화랑 길드 소속.
위드 길드와는 경쟁 구도에 놓이게 될 길드다.
명가가 아닌 이상 딱히 적대할 이유도 없지만.
그냥 그 정도다.
"왜… 굳이 내 대전 신청을 수락한 거지? 분명 다른 제안들도 많았을 텐데…."
한명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아직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크지 않다는 말투다.
이 녀석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전생의 한명준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어쨌거나.
이 정도라면 충분히 답해 줄 수 있다.
"재밌을 것 같았거든."
"뭐, 뭐?!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그래. 화랑 길드의 루키. 누구라도 한 번 붙어 보고 싶어 할 만한 상대 아닌가?"
내 말에 한명준의 어깨가 조금 으쓱해졌다.
"그, 그럼! 내가 바로 화랑의 루키 한명준 님이시지! 으하…하아…."
조금 띄워 줬더니 흥분하는 것도 똑같다.
어쨌든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조금 만 더 굴려주면 내 말에 넘어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전 준비 시간 300초가 주어집니다.]
[우주적 존재들이 두 사람의 대전에 큰 흥미를 갖습니다.]
[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꿀꺽
한명준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니 크게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루키라는 말을 듣고 있다는 건, 다르게 본다면 애송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저벅
나는 한명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꿀꺽
한명준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명준이 검을 들고 나를 노려봤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곧바로 검을 휘두르겠다는 기세다.
"한명준."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뭐, 뭐야?!"
"내가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겠다."
"서, 선물? 선물이라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널 살려 주마.."
"이, 미. 미친…."
"거짓 같은가?"
내가 놈을 노려보자 한명준이 몸을 떨었다.
"단 조건이 있다."
"마, 말… 말해 봐라…."
이제야 대화를 진행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나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물론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다.
"쇼를 하나 하자."
"쇼?"
내가 한명준을 선택한 이유.
어비스 포인트를 끌어모으는 것.
그리고 한명준의 실력이라면 우주적 존재들에게 흥미로운 쇼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뭐, 뭐라고?"
한명준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말 그대로. 서로가 다치거나 죽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길고 화려한 싸움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어비스 포인트를 위해."
나는 이 순간에도 모여드는 우주적 존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저들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하니 걱정은 없다.
플레이어와 우주적 존재들의 대화가 가능한 건, 만남을 신청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내, 내가…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믿을 것 같으냐! 그래 놓고 나, 나를 죽이려는 거 아니야?!"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화랑의 루키 한명준을 10초에 저 세상으로 보낸 이주성. 너는 내 이름을 알리기에 괜찮은 먹잇감이기도 하지."
"이, 이이이…!"
"그러니 선택해라."
딱히 반박은 못 하는 한명준.
이미 처음 본 순간 녀석도 나와 자신의 격차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긴장했을 이유도 없을 것이고.
"내 제안을 수락하는 게 너에게도 이득일 텐데?"
"뭐, 뭐?!"
"너도 알 것 아닌가. 나는 박철균을 죽였다. 혹시라도 운이라거나 박철균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흡…."
한명준이 기함을 삼켰다.
정곡이라도 찔린 모양이다.
"싫다면 그냥 너를 죽이고 다음 상대를 구하면 끝이다. 다만 굳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네게 제안하는 거야. 어쨌든 너도 어비스 포인트를 많이 모으는 게 이득이지 않나?"
그리고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건, 단순히 어비스 포인트 때문만은 아니다.
한명준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 버리면 앞으로 어떤 플레이어도 나와 대전하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나로서도 곤란한 상황이지 않은가.
어쨌든 내 말에 한명준도 조금은 솔깃한 모양이다.
입꼬리가 꿈틀대는 걸 보니 머릿속으로는 벌써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는 모양이다.
"승낙한 것으로 알겠다."
"뭐, 뭐? 내, 내가 언제…."
하지만 한명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대전이 시작됩니다.]
대전이 시작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한명준을 향해 쇄도했다.
"허, 허어어어억!"
내가 다가가는 그 순간에 한명준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급히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까아아앙!
"커헉!"
내 검의 위력을 맛본 순간 한명준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여왕개미의 턱뼈로 만든 검이다.
오러를 두르지 않아도 감당하기 쉽지는 않을 거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열광합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후원금을 손에 쥐고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나는 순식간에 한명준의 코앞에 도달했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때. 나를 이길 수 있으면 이겨 보던가. 죽기 싫으면 협력해라."
곧바로 오러 블레이드를 뿜어냈고.
다시 한명준을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오러 블레이드가 휘감긴 검으로 그의 검을 한 번 두드렸다.
"커헙!"
한명준의 입에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아직 힘 조절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힘을 뺄 수는 없다.
이미 우주적 존재들은 내 오러 블레이드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 오러 블레이드를 거둘 수도 없을 테고.
남은 건 한명준의 몫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부웅-!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른 순간.
카아앙!
"괴, 괴물 같은… 새끼…!"
한명준이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악에 받친 얼굴로.
그리고 그 순간 내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그렇게 나와 줘야 같이 합을 맞출 맛이 나지.
그렇게 나는 다시 검을 움직였고.
한명준은 빠르게 내 검이 움직이는 검로를 보며 그의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앙!
허공에서 두 개의 검이 충돌하며 굉음과 함께 불똥이 튀어 올랐고.
[수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두 사람의 싸움을 보며 우주 맥주를 들이킵니다!]
내 시나리오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