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주성? 이건 대체 뭐 하는 벌레지?'
박철균이 생각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물론 그가 처음 듣는 플레이어들의 이름은 널리고 널렸다.
애초에 벌레취급 하는 일반 플레이어들의 이름 따위야 관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흑암파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박철균은 미간을 좁혔다.
흑암파의 존재를 알고 있는 플레이어가 존재하고 있다니.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주성이라는 사내가 자신들을 공격한 플레이어일지도 모르겠다고.
대전을 피해야 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는 끝내 유혹을 거절하지 못한 채 대전을 수락해 버린 것이다.
'검술 명가? 아니면 창술? 궁술? 체술 명가일 리는 없을 텐데…. 역시 검술 명가 쪽이라면….'
꿀꺽
박철균의 머리가 조금 바빠졌다.
대체 어떤 세력이 육성한 플레이어일지.
자신에게 대전을 신청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던 중.
강민.
아니, 이주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
고오오-
[우주적 존재 '미로의 설계자'가 흥미를 갖습니다.]
[우주적 존재 '심연의 뱀'이 미소를 짓습니다.]
[우주적 존재 '환희의 기만자'가 다른 우주적 존재들에게 손짓합니다.]
'나쁘지 않군.'
41층의 첫 번째 무대치고는 꽤 많은 우주적 존재들이 모여들었다.
그 수는 대략 스물에 가깝다.
전생에서 내 첫 무대에 한 명의 우주적 존재가 10분 관람하다 떠난 것을 생각해 보면.
'장족의 발전이지.'
그것을 떠나서라도 41층의 첫 무대에 스물이 넘는 우주적 존재가 모여든 건,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 앞에 서 있는 박철균은.
'어안이 벙벙할 테지.'
그 말이 정확했다.
박철균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한 채 바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열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대전을 위한 준비 시간 300초가 주어집니다.]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다.
300초.
그러니까 5분 후, 싸움이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나와 박철균이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이다.
저벅
나는 박철균을 향해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박철균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법 명가의 직계라는 그 자부심이 무색할 만큼 나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 우리 대화를 좀 나눠야 하지 않겠나?"
내가 물었다.
박철균은 입을 뻥긋대긴 했지만 입 밖으로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아니, 내뱉지 못하는 거겠지.
대신 놈은 화제를 돌렸다.
"내가 네놈 따위의 잔머리에 넘어갈 것 같으냐. 자, 말해라. 누가 보냈느냐.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검술 명가 같은데…. 이 씨인 것을 보면 검술 명가에서 은밀하게 데려다 기른 짐승인 게냐."
박철균은 최대한 담담하게 나의 정체를 캐물었다.
그럼에도 초조한 마음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나를 검술 명가쪽의 사람으로 생각하는 건가.'
나쁘지 않다.
사실 저들을 공격한 세력의 용의자 세력 중 검술 명가가 가장 유력한 것도 사실이니까.
"대체 어떻게 네놈들이 본문의 비밀을 밝혀냈는지는 모르겠다만… 결코 네놈들의 생각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야! 우리는 본문을 반드시 다시 일으킬 것이야!"
박승균이 고성을 내질렀다.
역시 아직 뒤에서 무언가 구린 일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에서 놈들의 꿍꿍이를 밝혀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그때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대전 신청을 한 것이지."
"뭐, 뭐…?!"
내 말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박철균의 동공.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박승균 그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본문에서는 이미 꿰뚫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본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어차피 놈은 나를 검술 명가 쪽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
박철균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감정을 숨기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꽤 미숙하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고 짚이는 곳이 있다.
정말 저 녀석의 말대로 박승균이 단순 도피가 아닌, 마법 명가의 재건을 위해 모습을 감춘 거라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51층부터 60층의 테마인 마법사의 숲.
'거기라면 마법 명가가 다시 부흥을 꿈꿀 수 있을 만한 곳이긴 하지.'
게다가 마법의 숲이라면 현재로서는 탑의 최전방.
그러니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기도 좋을 장소일 테고.
그러면 이제 내 추측이 맞는지 찔러 볼 차례다.
"마법사의 숲에 숨어있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았는가? 본문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박철균의 얼굴이 아주 묘하게 일그러졌다 돌아오는 그 찰나의 순간을 나는 정확히 포착해냈다.
그리고 확신했다.
박승균은 마법사의 숲에 숨어 있는 게 맞다는 것을.
"헛소리! 내가 너 따위의 잔머리에 넘어갈 위인으로 보이느냐."
물론.
너는 이미 넘어 왔으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긴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순간.
[대전을 시작합니다.]
[플레이어 '박철균'에게 '위엄'의 효과가 적용됩니다.]
[상대의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다.
물론 내게만 보이는 메시지다.
덕분에 박철균은 급격히 힘이 빠져나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주적 존재 '숲의 하얀 영혼'이 플레이어 '이주성' 님에게 10,000 어비스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
.
.
대전의 시작과 동시에 쏟아지는 후원 메시지와 함께.
화르륵!
오러 블레이드가 타올랐다.
박철균은 기겁하며 다급히 자신의 마력을 꺼내 들었고.
"거, 검기!"
검술 명가의 전유물인 검기.
놈은 오러 블레이드를 본 순간 내가 다시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동시에 박철균은 자신의 몸 주위에 보호 마법을 펼쳐댔다.
하지만 나는 그저 입꼬리를 비튼 채 오러 블레이드를 한 번 휘둘렀다.
카드드드득! 콰앙!
놈의 보호 마법이 순식간에 모조리 파괴됐다.
"흐, 흐어어억!"
다급하게 손을 내젓는 박철균.
그때.
슈우웅!
박철균의 모습이 사라졌다.
'블링크로군.'
단거리 텔레포트 마법.
하지만, 놈이 마법을 사용하는 즉시 내 초감각은 놈의 도착 지점을 파악한 상태였고.
콰아앙!
궁신탄영을 이용해 놈의 바로 코앞에 도달했다.
[우주적 존재 '호쾌한 난쟁이 용사'가 플레이어 '이주성' 님에게 100,000어비스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흐, 흐아아아아악!"
박철균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저 녀석도 분명히 알고 있겠지.
지금 내가 사용한 능력이 체술 명가의 궁신탄영이라는 것을.
"대, 대체… 대체 어떻게…!"
"빼앗았지. 죽이고."
"마,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휘익!
놈이 자신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로부터 불꽃이 치솟았고.
나를 향해 날아 들었지만.
콰아아앙!
오러 블레이드로 놈의 마법을 그대로 파훼했다.
마법 저향력 65%의 효과로 데미지도 그리 크지 않았으니.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아아아알!"
박철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사, 살려… 살려 다오! 새, 생각해 봐라! 너, 너와 우리가 대체 무슨 악연이 있다고 이러는 것이냐! 우, 우리 마법 명가가 대체 너희 검술 명가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는 말이야!"
박철균이 눈물을 쏟아내며 내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소개 메시지에 적혀 있던 허세가 애처롭게 느껴질 만큼 처절한 절규였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물론 없지."
"그, 그래. 우, 우리는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보, 본문 마법 명가는 너, 너희 검술 명가와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내, 내가 맹세하마!"
내 대답에 일말의 희망을 느낀 건지.
후원이니 좋은 관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만을 지껄이는 박철균의 모습이다.
"다만 마법 명가 따위는 이제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뿐."
"뭐, 뭐…?"
흔들리는 박철균의 눈동자.
더 이상 이야기해 줄 건 없다.
촤아아아악!
푸르게 빛나는 오러 블레이드가 박철균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공격도, 방어도.
그 어떤 저항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혼란에 빠진 박철균은 오러 블레이드가 몸을 가르고 지나가는 이 순간에도 입을 쩍, 벌린 채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커허…억…."
단말마의 비명이 놈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어, 어찌… 어찌 이런…."
쿵!
허무하리만치 짧은 탄식과 함께 박철균의 몸이 고꾸라졌다.
[마력 21을 포식했습니다.]
그 이후로 우주적 존재들의 후원이 쏟아졌다.
처음에 비해 수가 많이 늘어 어느새 40을 넘어섰고.
내가 후원 받은 액수는.
'50만.'
41층의 첫 번째 싸움에서 50만의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게다가 지혜의 수문장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한참 모자란 포인트야.'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싸움이 너무 빨리 끝난 사실에 대해서 아쉬워합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들이 다음 대전은 언제인지에 대해서 문의합니다.]
그렇게 첫 번째 싸움이 막을 내렸고.
나는 다시 피의 관문의 대기실로 도착했다.
***
그리고 그 시각 플레이어들의 대기실.
41층 피의 관문에서 다음 상대를 물색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이 당황한 첫 번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주성'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이주성? 이주성이 대체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건 또 무슨 듣보잡이지? 대체 무슨 용기로 마법 명가 플레이어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각각의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이주성이라는 강민의 가짜 이름을 본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
[현재 대전 진행 목록]
.
.
.
[이주성 vs 박철균 – 진행중]
조금 전 시작한 박철균과 강민의 대전.
아직 그 누구도 감히 박철균에게 대전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가, 혹은 거대 길드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다.
명가의 플레이어들은 아무래도 마법 명가를 마주한다는 게 껄끄러웠고.
거대 길드의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로 굳이 마법 명가를 만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이주성이라는 플레이어가 박철균과 대전을 시작했다고 하니.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그 대전 목록을 보면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조소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머저리가 곧 시체가 되어 돌아오겠군.'
'썩어도 준치인 법이야. 그래도 명가는 명가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잠시 후.
[이주성 승]
-특이사항 : 박철균 사망
"……."
"어…?"
이 사건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플레이어들의 눈치 싸움이 시작된 순간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법 명가의 박철균을 건드리지 못했던 건, 어쨌거나 '명가'였기 때문.
하지만 이주성이라는 플레이어가 명가의 플레이어를 처치하게 된 순간 어쩌면 이주성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떡밥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법 명가가 웬 듣보잡한테 뒈졌다고? 이게 무슨 일이야?'
'마법 명가가 확실히 맛탱이가 가긴 했나 본데…. 아니, 어쩌면 애초에 마법 명가가 별거 없었을지도 몰라.'
'이주성. 뭐 하는 놈이지? 한 번 만나 보고 싶긴 한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내가 이주성을 이기면 적어도 박철균 그 새끼보다는 세다는 거잖아?'
웬 이름도 없는 듣보잡 플레이어.
그는 플레이어들의 구미를 당기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강민에게 무수한 대전 신청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