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이런 일이 있었던가?'
전생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이 비밀로 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이런 일은 없었다.
이미 한 번 언급했듯, 시험의 관문에 관심을 두는 우주적 존재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내 압도적인 무력이 우주적 존재들의 시선을 끌었다는 것뿐.
'잘 됐어.'
벌써부터 우주적 존재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건, 앞으로 저들에게 내 예상보다 많은 후원을 얻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니까.
'좋아, 그럼.'
나는 우주적 존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조금 더 격한 모습을 보여줬다.
쇼맨십의 일종이다.
더욱더 격렬하게, 그리고 화려하게, 동시에 압도적으로.
시공의 균열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괴수들을 도륙하고, 찢어발겼다.
산을 이룬 괴수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 괴수들을 공격했고.
괴수들은 균열 밖에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목숨을 다해야만 했다.
'슬슬 버겁기는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다수의 우주적 존재가 당신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벌써 몇 번이나 떠오른 메시지였으니,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험의 관문에 진입한 지 25분이 지났을 무렵.
[우주적 존재들이 예외적 상황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예외적 상황?'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나에게 이로운 상황일 거라는 뜻이다.
저들은 자신들에게 기쁨을 제공한 플레이어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니까.
그렇게 다시 5분이 지나갔고, 몰른의 버프를 받고 다시 괴수들을 무차별적으로 쓸어버리고 있을 무렵.
[우주적 존재들의 논의가 끝났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모든 인과와 계율에 대해서 고심했습니다.]
[그 결과 시험의 관문의 플레이어에게 '후원'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습니다.]
'미치겠군.'
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내심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시험의 관문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니.
내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우주적 존재들이 직접 '예외적'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이런 일은 내가 최초라는 뜻이겠지.
'이거라면….'
10만 포인트는커녕 그 두 배의 포인트를 모으고 시험의 관문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 떠오른 메시지는.
[단, 우주적 존재들은 이 예외적 상황에 조금의 제약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후원하는 금액은 1000포인트를 넘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조금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격적으로 어비스에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충분히 활약한 플레이어들을 향한 우주적 존재들의 후원 액수는 기본이 만 단위니까.
'하지만, 뭐….'
내 아쉬움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내 눈앞에 셀 수도 없이 쏟아지는 후원 메시지 덕분이었다.
어비스 포인트는 1초 단위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고.
괴수를 처치하며 얻어낸 포인트와 우주적 존재들의 후원 포인트가 합쳐져 만들어 낸 결과는.
'45분에 13만 포인트.'
말도 안 되는 속도다.
이미 내 목표를 한참 전에 돌파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이미 전생에서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가 세웠던 기록마저 초월했다.'
그때 당시 최고 기록은, 시험의 관문에서 12만 포인트를 달성한 검술 명가의 플레이어였다.
벌써부터 그 기록을 넘겨 선 순간이었고, 아직까지 15분이라는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으니.
'최소 15만. 잘하면 20만까지.'
내 목표를 최대 두 배로 키우게 된 순간이었다.
***
[41층, 시험의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42층 피의 관문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결국 한 시간이 다 지나갔을 때, 시험의 관문에는 쏟아져 나왔던 괴수의 시체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184,000 어비스 포인트]
18만이 넘는 어비스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18만이면 전생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 할 정도의 어비스 포인트다.
내가 전생에서 어비스의 마지막 관문인 50층에서 보유했던 포인트가 고작 10만 포인트였다.
물론 아이템을 구매하는 데 사용했던 포인트까지 모두 더한다면 그보다 훨씬 많긴 할 테지만.
'이렇게까지 포인트를 쓸어 담게 될 줄이야.'
이건 확실히 내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확신이 들었다.
이 속도라면 말할 것도 없이 '지혜의 수문장'과 만나게 될 수 있으리라고.
[우주적 존재 '영혼의 관찰자'가 관심을 보입니다.]
[우주적 존재 '차원의 지킴이'가 관심을 보입니다.]
[우주적 존재 '관통하는 어둠'이 관심을 보입니다.]
.
.
.
끝없이 쏟아지는 우주적 존재들의 호감 메시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분명 이례적인 일이기는 하다만, 지금 내게 관심을 보이는 우주적 존재들은 모두 '낮은 격'의 존재들.
그 도도하고 고고한 '높은 격'의 존재들은 역시나 시험의 관문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을 테지.
당연한 말이지만 지혜의 수문장 역시도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괜찮다.
결국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리고 42층에 오르기 전.
'상점에서 구입할 게 있지.'
[어비스 상점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어비스 상점은 어비스에 머무르는 동안 언제든 개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상점의 목록을 살폈다.
수천여 개가 넘는 아이템 목록에서 한참이나 내려가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위치에 있는 아이템.
외형 변경권과 이름 변경권이다.
실제로 이 아이템의 존재를 모르는 플레이어도 수두룩하다.
물론 나야 전생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아이템이란 아이템은 다 살펴봤으니 알고 있는 것이지만.
첫 번째는 이름 변경권.
메시지에 표시되는 이름을 어비스 내에서 변경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물론 플레이어들에게만 적용되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외형 변경권.
아무래도 플레이어들끼리의 마찰이 잦은 어비스인 만큼 외향과 이름을 변경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아이템의 존재를 알고 있더라도 굳이 구매하지 않는 아이템이다.
어비스야 말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기도 했으니까.
각각 5만 포인트에 이르는 포인트.
내가 벌써 말도 안 되는 포인트를 모았을 뿐이지, 확실히 터무니없는 가격은 맞다.
'비싸기도 더럽게 비싸군.'
평균적으로 플레이어들이 한 층에서 모을 수 있는 포인트는 많게 쳐줘서 3만에서 5만 포인트다.
그런 것에 비하면 외형, 이름 변경권의 가격은 터무니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지금 나에게는 포인트가 넘쳐나고.
나는 두 개의 아이템을 구매했고.
곧바로 사용했다.
내가 변경한 이름은 '이주성.'
외형은 조금 더 근육질에 작은 키로 만들었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42층 피의 관문으로 진입합니다.]
***
피의 관문.
살벌한 이름이다.
이름만큼이나 이제는 정말 살벌한 어비스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부터 본격적으로 플레이어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순간에 도착한 셈이다.
물론 반드시 상대를 죽이거나, 죽어야 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내 전생에서는 죽지 않고서도 아주 오랜 시간을 투자해 어비스를 통과하는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특히 거대 길드의 플레이어들 같은 경우는….'
서로 암묵적으로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을 만큼만 겨룬다.
어느 정도 포인트를 포기하더라도 차라리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겨루는 것이다.
그게 그들의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그런 규칙은 분명 지금에도 존재할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 시작된 건 아니다.
그냥 거대 길드 소속이기 때문에 서로의 눈치를 보고, 서로의 세력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거지.
'그 사이에서 피를 본 건 나 같은 빽도, 힘도 없는 녀석들이었지만.'
정말 힘들었다.
어비스를 통과하기 위해서 얼마나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았어야 했는지.
다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암묵적인 규칙?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물론 모두를 죽이겠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죽여서 내가 이득이 될 만한 상대라면 가차 없이 베어 버릴 생각이다.
'체술 명가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지. 검술 명가는 조금 피곤할 수 있고.'
대충 견적은 잡혔다.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나 검은 어둠이었지만, 시험의 관문과 달라진 건.
'저거다.'
허공에 떠 있는 플레이어들의 명단.
바로 저것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대전을 신청할 수 있고.
대전을 시작하게 되면, 그 흥미도에 따라 우주적 존재들이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다음 관문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대전 횟수를 채우고, 다음 관문으로 가기 위한 포인트를 모아야 한다.
어느 정도 자신의 목적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최대한 눈치를 살피며 만만한 상대를 골라야 할 것이고.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큰 포인트를 모을 수 있을 만한 상대를 고르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내 전략은 당연히 관심을 끄는 것.'
파격적인 상대를 골라 우주적 존재들의 흥미를 끌겠다는 말이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
어비스라고 해도 41층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우주적 존재들이 큰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다.
나는 플레이어들의 리스트를 펼쳤고.
[자신을 소개하기 위한 메시지를 입력해 주십시오.]
대전 상대를 매칭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내가 적은 소개 메시지를 보고 누군가가 내게 대전을 신청해 올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굳이 긴 말을 적지 않았다.
내가 적어 놓은 소개글은 이게 전부였다.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 튀지 않게.
그리고 누구라도 나를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을 소개 메시지.
그렇게 소개글을 다 작성했을 때.
[소개글 작성을 완료했습니다.]
[아직 플레이어 '이주성' 님을 지목한 상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접 상대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신중히 고민한 뒤에 상대를 지목하여 대전 메시지를 보내 주십시오.]
현재 41층에 머물러 있는 플레이어들의 목록을 뒤적였다.
그러던 중.
'설마 여기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박철균]
[본인은 마법 명가의 직계의 플레이어다. 쓸데없는 객기를 부렸다간 그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어이가 없군.'
박철균의 소개 메시지를 보고 들었던 첫 생각이다.
마법 명가의 플레이어가 목록에 담겨 있었다.
명가의 실세 박승균의 둘째 동생이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대체 지금 쯤 명가의 직계 플레이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지.
또 마법 명가의 상태가 대체 어떨 것인지.
'박승균 그 녀석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그리고 나는 그에게 대전 신청 메시지를 작성했다.
[흑암파가 꽤 강하더군.]
라고.
[플레이어 '박철균' 님에게 대전 신청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구다.
굳이 돌려 말할 생각은 없었다.
진중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속내를 숨길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녀석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만한 구석은 없다.'
다른 명가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히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꼴이 될 테니까.
그렇다고 다른 거대 길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리라는 건, 마법 명가 직계의 자존심이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자신의 본문의 장로나 형제, 가주?
'그쪽은 나쁘지 않겠군.'
내 앞에 박승균, 혹은 마법 명가의 가주가 나타나 준다면 그야말로 환영할 만한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점에서 흑암파의 존재를 알고 있는 플레이어는 마법 명가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쯤 내 메시지를 받아든 박철균이 느끼는 혼란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일 거다.
'자, 물어라.'
나는 그렇게 커다란 떡밥 하나를 들고 박철균이라는 물고기가 덥썩 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후.
[플레이어 '박철균' 님이 대전 신청에 응했습니다.]
[잠시 후 대전 무대로 이동합니다.]
'물었군.'
박철균은 내가 던진 먹음직스러운 떡밥을 물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