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41층 '어비스'에 진입했습니다.]
어비스.
그것이 바로 41층부터 50층의 테마였다.
어비스는 심연, 깊은 구렁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탑의 어비스는
'무한 투기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심연을 떠도는 우주적 존재들을 관객으로 하고 있는 이 어비스에서 플레이어들은 '포인트'를 두고 끝없을 싸움을 이어가야만 한다.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가장 기분 나쁜 스테이지지.'
누군가가 나를 구경하고, 나는 그들의 유흥거리가 된다는 그런 기분.
심지어 그들의 유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내가 걸어야 하는 것은 목숨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탑의 고층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말은 즉, 여기에는 명가, 거대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즐비해 있다는 것이다.
개미굴에서는 볼 확률이 '높다' 정도였지만, 어비스부터는 다르다.
높다, 수준이 아니라 여기에는 무조건 그들이 존재한다.
명가의 직계와 방계, 그리고 거대 길드의 랭커 플레이어들까지도.
'이런 환경에서 무한 난투를 벌어야 한다는 건….'
정말로 목숨을 내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비스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어비스로 향하기 전, 장비를 손봐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개미굴에서 너무 격렬한 싸움을 벌였더니 입고 있는 장비들이 많이 손상됐다.
거기에 호랑 개미 여왕의 턱뼈도 얻어냈으니, 해밀턴을 만나고서 어비스로 진입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물론 얼굴을 아직 알릴 필요는 없겠지. 아직도 쓰러트려야 할 적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런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는 없어.'
플레이어들과 맞서야 하지만 얼굴은 철저하게 숨길 생각이다.
얼굴이 알려지면 아무래도 내 활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해밀턴을 만나러 가기 전, 먼저 박명철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
"장난 아닌데요?"
"진짜 대박이야."
"하하…."
지금 박명철과 위드 길드의 길드원들은 탑의 62층에 올라 있던 참이었다.
현재 모든 거대 길드와 명가들은 62층에 모여 있었다.
물론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멀찍이 떨어져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62층을 돌파해 낼 수 있을지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큰 고민에 빠져 있는 이 상황에서 웃고 있는 것은 위드 길드뿐이었다.
"명가와 거대 길드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들 보다 한참이나 뒤처져 있었는데도…."
그 말이 사실이다.
위드 길드는 나름 탄탄한 중견 규모의 길드였으나, 거대 길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탑 수준의 길드들에 비해 뒤처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강민이 박명철에게 전해 준 정보들로 한참 뒤처져 있던 위드 길드는 엄청난 속도로 탑을 돌파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거대 길드와 명가들이 밝혀낸 정보보다도 훨씬 더 질 좋은 정보들밖에 없었어."
그게 바로 위드 길드가 엄청난 속도로 탑을 돌파해 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거대 길드와 명가들은 현재 어느 정도의 정보를 탑의 플레이어들과 공유했다.
물론 숨기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이 숨기고 있는 정보보다도 강민이 건넨 정보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정보들이었다.
그 결과, 위드 길드는 엄청나게 시간을 절약하면서도 다른 거대 길드들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62층에 도착해 버렸다.
그와 함께 위드 길드의 세력은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현재 탑에서 위드 길드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왜 저 길드가 아직도 탑 10에 못 든 거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거야?'
등등….
그와 함께 플레이어들이 위드 길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마법 명가 산하 소속의 길드원들과, 망해버린 철목 길드의 길드원들까지.
몰려드는 길드원들을 선별하는 데에도 골머리를 싸맬 지경이었으니.
현재 위드 길드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였다.
"그리고 이제는…."
62층마저 돌파해 낼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탑의 최초다.
지금까지의 위드 길드는 빨랐지만, 다른 거대 세력의 뒤를 뒤따르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는데도.
이제는 그 상황이 달라졌다.
"만약 여기에서 우리 위드 길드가 최초로 62층을 돌파해 낸다면 우리는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거다."
박명철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강민의 말에 따라 마법 명가에 저항하기 위해 길드 규모를 감축했을 때.
박명철이라고 해서 마음이 쓰라리지 않았겠는가.
그가 처음 길드를 만들 때, 야심을 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꿈이 이제는 손끝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위드 길드가 62층을 돌파했다는 사실이 탑에 전해진다면.
다시 한번 길드들의 순위에 대격변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더 강하고, 더 좋은 능력을 보유한 플레이어들이 위드 길드로 향하게 되리라.
그렇게 감격에 겨워 있을 무렵.
[한강민 : 41층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탑의 상황 요약 부탁드립니다.]
'미친.'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강민의 탑 등반 속도다.
놀라지 말아야지.
강민 씨는 원래 대단했잖아.
늘 그렇게 다짐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박명철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위드 길드를 선택해 줘서 고맙다고. 그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박명철은 강민에게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그렇다는 말이지.'
박명철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군더더기도 없이 현 탑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주목할 건, 박승균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
마법 명가는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다.
박승균을 내 손으로 처단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다음으로 살펴볼 건, 화랑과 체술 명가였다.
'화랑과 체술 명가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라….'
여기에 대해서는 위드 길드뿐만 아니라 모든 거대 세력들이 이런 저런 불만을 표하고 있다고 했다.
'의심하는 정도는 아니고, 그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협력하라는 수준이라고 하긴 했지만.'
나는 두 세력이 손을 잡았다고 확신했다.
내가 알고 있는 화랑 길드의 철기영, 그리고 현재 체술 명가가 느끼고 있는 압박감을 생각한다면.
두 세력이 손 잡는 건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둘이서 이 기회에 확실히 치고 올라가겠다는 거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점에서 녀석들이 아무리 손을 잡고 애를 써 봐야 내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동을 조금 걸어 주는 것도 좋겠는데.'
현재와 같이 거대 세력들의 경쟁이 첨예해진 이 상황에서, 내가 명가의 플레이어들과 거대 길드의 플레이어들을 시원하게 짓밟아 준다면.
반드시 놈들의 명예는 실추될 수밖에 없을 테고, 동시에 나와 위드 길드의 명성은 더더욱 치솟게 되리라.
'앞으로 본격적으로 명가들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미리 놈들의 활약에 제동을 걸어 줄 필요가 있어.'
어비스는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다.
직접 명가들과 '합법적'으로 싸울 수 있으니까.
'얼마 남지 않았어.'
가장 먼저 무너트린 게 마법 명가일 뿐.
탑에서 명가라는 것들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기생충과 같은 존재들이다.
'차라리 길드는 플레이어들과 공생이라도 하지.'
명가라는 것들은 나와 같이 일반 플레이어들을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는 녀석들이다.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더 굳건한 카르텔을 구축할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탑을 등반하는 플레이어들이었다.
탑에 있어서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 놈들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층간 이동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고.
[이동하실 층을 선택해 주십시오.]
해밀턴이 있는 25층의 마을로 이동했다.
***
25층의 마을은 여전히 북적였다.
사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지만, 다시 도착한 25층의 마을의 풍경이 정겹게도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
내 탑의 등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들은 고작 탑 몇 개를 오를 정도의 시간에 수십 층을 돌파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나는 해밀턴의 공방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 멀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는데.
'많이 바뀌었군.'
말 그대로 공방 주변의 풍경이 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제, 제 장비는 언제쯤…."
"장비 제작을 좀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내가 먼저 왔어요! 차례 좀 지켜요!"
"나는 여기에서 한 달 넘게 야영했다고!"
"이봐요!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길드가 말이야!"
"길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야! 너 몇 층에서 내려왔어!"
"어허!"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만큼 해밀턴의 공방 앞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대충 둘러봐도 꽤 고층에서 내려온 이들도 많아 보였다.
벌써부터 탑 전체에 해밀턴의 솜씨에 대해 입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내가 떠난 이후로 해밀턴은 마음을 다잡고 공방을 개방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이렇게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니, 내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 깨달았다.
'만약 해밀턴과 좋은 관계를 쌓아 놓지 않았으면 나도 저 사람들처럼 공방 앞에서 오래 대기해야 했겠지.'
당연히 지금의 나는 저 사람들처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나는 해밀턴의 공방을 향해 걸었고.
잠시 인파를 헤치고 지나갔다.
"썩 꺼져! 네 놈의 장비는 안 받아!"
"왜, 왜요! 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
"꺼져! 썩 꺼지라고!"
해밀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성질머리는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공방을 개방한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 꺼져?"
다시 한번 들려오는 해밀턴의 고함 소리와.
"해밀턴."
인파를 헤치고 해밀턴의 공방 앞에 도착한 내가 해밀턴의 이름을 불렀다.
"웬 놈이 감히 내 이름을 함부… 어?"
내 얼굴을 본 해밀턴의 목소리가 누그러졌고.
빨갛게 달아올라 열을 내뿜던 해밀턴의 표정이 천천히 밝아졌다.
"다, 당신은…!"
해밀턴의 급변한 반응을 보며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뭐야, 해밀턴이 저런 표정도 지어?"
"저 사람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아직 내 얼굴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으니, 사람들의 의문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어찌 이리 오랜만에 오셨소."
해밀턴이 말했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해밀턴은 바쁘게 내 몸을 살폈다.
찌그러지고 군데군데 잔뜩 때가 낀 장비를 말이다.
"엉망이 되었군. 당장 벗으시오. 내 손질 해 줄 테니!"
그 말에 다시 한번 플레이어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 이봐요! 내 거는? 내가 먼저 왔잖아!"
"뭡니까! 줄 서요! 줄!"
그 순간 해밀턴의 눈썹이 꿈틀댔고.
"썩 꺼져! 오늘 장사 끝났으니까 내일 오든지 말든지 알아서들 하쇼!"
해밀턴은 나를 이끌고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쿵!
공방의 문을 닫아 버렸다.
이렇게 해도 장사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놀랍게도 된다.
아주 잘.
그런 해밀턴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보여줄 게 있습니다."
"보여줄 거?"
내 말에 큰 흥미를 보이는 해밀턴이다.
"이겁니다."
그런 해밀턴에게 호랑 개미 여왕의 턱뼈를 꺼내 보였다.
"……!"
호랑 개미 여왕의 턱뼈를 본 순간 해밀턴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