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콰아앙!
다시 한번 궁신탄영을 사용했고, 굉음과 함께 내 몸이 칼날 개미의 성 내부로 날아들었다.
참 좋은 능력이지만, 소리가 너무 크다는 게 단점이다.
특히나 개미들처럼 소리에 민감한 녀석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도 그 단점을 은신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으니까.'
쿠우웅!
나는 내가 목표했던 곳에 착지했다.
이번의 착지는 나름 완벽에 가까웠다.
그리고.
팟!
뛰었다.
굉음이 퍼진 곳으로 칼날 개미들이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치르르릇!"
"크르르륵!"
칼날 개미들이 방금 전 굉음이 터질 곳을 향해 바쁘게 신호를 보냈다.
덕분에 내가 달리고 있음에도 나는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한적한 곳에 몸을 숨기고, 기척을 감췄다.
그리고 다시금 초감각을 끌어 올려 현재 개미들의 상황을 파악했다.
'난리도 아니군.'
칼날 개미들은 현재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내가 한 번씩 거쳐 간 곳을 중심으로 개미들이 모여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을 위해 병력이 유출되어 공백이 생겼던 칼날 개미들의 병력은 더욱더 분산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전 굉음이 울려 퍼졌던 중심으로 더 많은 수의 칼날 개미들이 모여 들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침입자를 발견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럴수록 성 내부를 지키던 병력의 공백이 커졌고,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넓어지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한 명이 아니라 단체가 습격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몇 초 간격으로 이곳 저곳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으니.
놈들은 동시에 여러 명이 자신들의 성을 공격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성문을 지키는 병력이다.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벽 앞으로 꾸준히 개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게다가 장군 개미들마저 성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상태다.
성문 말고는 성 내부로 잠입할 수 있는 틈 따위는 없다.
빛이 필요하지 않은 개미들은 성벽에 창문 따위는 만들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의 성과는 형태조차도 다르니까.'
겉으로 보면 거대한 '산'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새다.
칼날 개미의 성은 그야말로 수성에 최적화된 천혜의 요새다.
'한 번에 돌파해야 한다.'
단 하나뿐인 입구다.
만약 입구를 통과하는 시간이 조금만 더 지체되어도 성벽 내부에 득실대는 칼날 개미들은 순식간에 모여들 것이다.
'돌파한 즉시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길어도 30초 안에 끝나야 한다.
이것도 최대로 잡은 시간이다.
조금만 늦어지면, 내가 말했듯 끔찍한 상황이 펼쳐지게 될 수밖에 없다.
'아직 오우거의 신체가 쿨타임인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해볼만 하다.
궁신탄영을 이용하면 말이다.
그 전에.
물약 두 개를 꺼냈다.
대용량 지속 회복 포션과 대용량 스태미너 포션이다.
앞으로 성 내부에 진입하게 되면 쉴 틈 따위는 없는 긴 싸움을 이어가야 할 테니까.
물약 두 개를 차례로 모조리 비웠다.
후웁….
천천히 숨을 골랐고.
'가자.'
궁신탄영을 사용하기 위해 몸을 굽혔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굉음과 함께 내 몸이 엄청난 속도로 성벽 앞에 모여 있는 개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는 사이, 오러 블레이드와 뇌전검, 충격파를 동시에 활성화시켰고.
공중에서 추진력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다.
'한 번에 갈아 버려 주마.'
체술 명가 놈들의 컴비네이션을 응용한 내 고유의 기술이었다.
***
그 무렵, 탑의 5층 마을.
거기에서는 두 사람이 은밀하게 만남을 가졌다.
그 주인공은 화랑 길드의 길드장인 철기영과 체술 명가의 최강혁이다.
5층에서 만난 건, 고위 랭커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5층에는 말 그대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플레이어들 밖에는 없으니까.
"말해 보시죠. 왜 나를 이렇게 은밀히 5층에서 보자고 한 건지."
최강혁은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5층이라고 하더라도, 최대한 조심해서는 나쁠 게 없을 테니까.
"손을 잡읍시다."
"손…?"
철기영도 이목을 끌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단호한 발언에서는 최강혁이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리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고.
일면에서는 건방지다고 생각할 정도의 단호함이다.
"손을 잡자고?"
그 순간에는 최강혁은 철기영을 노려봤다.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명가의 피를 이은.
그리고 명가의 차기 가주로 촉망받는 자신이었는데 이런 건방진 태도라니!
최강혁이 기세를 끌어 올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하지만 그에 기죽을 철기영이 아니다.
"하하.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오히려 여유 넘치는 태도로 받아친 철기영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지요.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비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습니까? 마법 명가의 몰락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
맞는 말이다.
최강혁은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명가의 피를 잇지는 못했지만, 이 탑 안에서 가장 강성한 길드를 이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철기영.
그 말에도 최강혁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 역시 사실이니까.
그 순간 철기영이 눈을 빛냈다.
"내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나를… 돕겠다고?"
최강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화가 난 것 같다.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아무리 명가 중 최하위라고 해도 명백한 명가였는데, 어떻게 일반 길드의 도움을 받겠는가.
하지만 역시나 철기영은 개의치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이미 그런 반응 따위는 예상했다는 듯이.
"예. 나의 자금력. 그리고 명가에 뒤지지 않는 정보력. 거기에 우리 길드원들의 실력까지. 나와 당신이 손을 잡는다면 창술, 궁술 명가 따위 짓밟고 올라서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철기영은 거침없이 쏟아냈다.
사실 어느 정도 불쾌한 것도 사실이지만 최강혁도 철기영의 제안에 솔깃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가주님과 장로들께서 큰 기대를 하고 계신다.'
오대 명가의 힘의 균형이 무너진 이 순간의 혼란이야말로 기회라면 기회였으니까.
'만약 정말 화랑 길드와 손을 잡는다면… 궁술 명가와 창술 명가를 제치는 건 결코 꿈이 아닐 것이다.'
최강혁이 답했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이지 않은가.
자존심 따위야 잠시 접어도 된다.
정말 다른 명가들을 밟고 올라설 수 있다면!
"좋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최강혁의 입에서 긍정의 의사가 내비친 순간, 철기영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어떻게 협력을 하겠다는 겁니까."
"지금 이 탑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실력을 증명하고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낼 확실한 이야깃거리 말입니다."
"탑의 정복."
최강혁이 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철기영도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탑 정복은 언제나 핫한 주제였다.
하지만 지금의 무게감은 이전과 차원이 다르다.
명가와 거대 길드들이 칼을 뽑아들고 탑을 등반하기 시작한 순간.
누가 더 빠르게, 더 훌륭한 업적을 세우느냐에 명가와 길드들에 대한 인식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기 일쑤였다.
덕분에 명가와 길드들은 더 많은 돈과 인력을 투자해 탑을 등반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내고 있었다.
즉, 지금 이 타이밍에 더 빠르게 탑을 공략하는 것이야말로 '실력'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다른 명가와의 협력을 그만두십시오."
"……?"
"나도 다른 길드들과의 협력을 멈추겠습니다."
"그 말은…."
"예. 그동안 이어왔던 길드와 명가들의 협력을 끝내고 우리 화랑과 체술 명가가 서로 긴밀하게 움직이자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른 명가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지 않겠죠. 그러니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을 해야겠고요."
"하…."
최강혁이 탄식을 흘렸다.
결국 연기를 하자는 것 아닌가.
"협력하는 척을 하되, 정말 의미 있는 정보나 자금은 우리 둘 사이에서만 오가는 겁니다."
"그건…."
"압니다. 명가의 자존심과 체면이 있다는 거. 하지만 현실을 보셔야지요. 지금이 아니라면, 다른 명가를 밟고 올라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
최강혁은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알고 그럼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곧 다시 연락드리지요. 아, 그런데…."
"……?"
철기영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다시 최강혁을 바라봤다.
"박승균. 그자의 소식은 혹시 알고 계십니까?"
박승균.
마법 명가의 실세 말이다.
마법 명가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 박승균의 행방이 묘연해졌고.
현재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명가, 대형 길드에서조차 박승균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강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박승균의 소식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철기영은 층간 아티팩트를 이용해 밀담을 나눈 장소를 벗어났다.
'이 기회를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최강혁도 그렇게 속으로 한 번 다짐한 뒤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화랑 길드와 체술 명가의 밀약이 체결된 순간이다.
명가와 길드.
서로 걷는 길이 다른 두 세력이기에 맺어질 수 있는 협약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지금 이 순간 탑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 변수란 위드 길드다.
강민에게 정보를 건네받은 위드 길드다.
박명철의 지휘하에 위드 길드는 빠르고 착실히 탑을 공략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마쳐 가고 있었다.
***
콰카카카카칵!
"흐읍!"
내 입에서 거친 신음이 흘 나왔다.
궁신탄영의 가속력이 더해진 회전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내 공격을 받아낸 개미들 역시 결코 멀쩡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장군 개미마저도 가속력과 회전력이 더해진 오러 블레이드의 일격을 버텨내지 못했고.
"캬아아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분쇄됐다.
단어 그대로다.
마치 믹서기에 갈린 듯, 성문 앞을 막고 있던 모든 개미들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린 것이다.
그뿐인가 모든 개미들을 1초도 되지 않아 갈아 버린 내 몸은 그 상태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콰아아아앙!
오러 블레이드가 다시 한번 성문을 강타했다.
다시금 굉음이 울려 퍼졌다.
"크으으읍!"
쩌저저적!
그토록 견고하던 성문에 커다란 균열이 일어났다.
전신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가해졌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다.
미리 복용한 대용량 지속 회복 포션이 내 몸을 빠르게 치유했다.
게다가 아이언 바디와 미스릴로 만든 내 갑옷이 충격을 어느 정도 완화해 준 덕분에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방에서 무수한 칼날 개미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바로 뚫고 가야 한다.'
부웅!
오러 블레이드를 다시 한번 하늘로 치켜들었고.
콰아아아앙!
균열이 난 성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결국.
콰르르르릉!
굳건하던 성문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