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당연한 말이지만, 플레이어도 사랑에 빠지고 자손을 낳는다.
그렇다는 건, 탑 내부에서도 분명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명가의 피를 이은 혈계들도 마찬가지다.
혈계.
그것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탑의 비밀이었고, 도대체 어떻게 혈계라는 능력이 피를 통해 이어지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명가의 플레이어들도.
그렇게 탑에서 태어난 명가의 플레이어는, 19살이 되면 혈계 능력이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19살이 되기 전까지, 명가의 플레이어들은 그들이 태어난 마을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당연히 그 19년 동안 명가의 직계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19살이 되고, 혈계가 발현되는 즉시 성인식을 치른다.
그동안의 모든 훈련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였고.
성인식의 과정은 진심으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혹독한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명가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였고, 또 언젠가는 탑의 정상에 올라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유다.
그리고 혹독한 훈련을 버텨내고 열아홉 살이 되어 혈계가 발현하는 그 순간 그들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계속 그 마을에 머무를 것인지, 혹은 탑의 1층으로 향할 것인지 말이다.
탑에서 태어난 플레이어의 자식들에게는 평생에 한 번 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탑의 1층부터 올라야 한다.
명가의 플레이어들은 19살이 되어 탑 밖으로 향한다.
그런 한 번의 기회를 이용하여 탑 내부와 외부에서 그들의 세력을 굳건하게 구축하는 것이고.
다시 탑을 오르기 시작한다.
1층부터 말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최연빈도 그렇게 탑의 1층에서부터 개미굴까지 올라 온 직계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나이는 21살.
그는 개미굴까지 2년 만에 주파했다는 뜻이다.
그것뿐인가.
고작 21살의 나이로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의 리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저 체술 명가의 직계이기 때문에 리더 역할을 맡게 된 건 아니다.
그가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칼날 개미 여왕의 결정이었다.
당연히 최연빈과 리더의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인 플레이어들도 있다.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된다면, 개미굴에서 더 많은 성취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고.
더 빠르게 진행도를 쌓아 올려 개미굴을 클리어하는 것은 물론이며 더 좋은 보상을 얻어 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여왕개미는 최연빈을 택했다.
그 결정은 모두 최연빈의 실력을 중심으로 내린 판단이었다.
상황 판단력.
전장의 흐름을 잃어내는 능력.
리더쉽.
그리고 무엇보다 압도적인 전투 능력까지.
그러니 그 누가 이 결정에 반박할 수 있으랴.
실제로 그동안 최연빈이 보여 준 능력은 발군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휘어잡고, 그의 카리스마 아래에서는 각종 대형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들조차 찍소리도 못할 정도였다.
"자,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우리는 두 갈래로 갈라질 겁니다. 한쪽은 칼날 개미를 따르고, 다른 한쪽은 옆으로 빠질 것입니다. 일종의 특임대죠."
최연빈이 작전에 대해 브리핑했다.
"저는 특임대를 이끌 것이고…."
최연빈이 다른 플레이어들 바라봤다.
검술 명가 산하 길드의 플레이어다.
"당신이 본대를 이끌어 주십시오."
"예."
"특임대의 임무는 하나입니다. 혹시 옆에서 칼날 개미를 공격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하는 것. 그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설사 개미가 아닌 플레이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작전에 대한 지시를 마친 최연빈은 곧바로 특임대를 선별했고.
"갑시다."
그가 앞장서 나가기 시작했다.
***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날 개미의 본대가 움직였고.
그 뒤를 따르던 플레이어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본대는 곧 다시 여섯 갈래로 갈라질 거다.'
지금 본진을 출발한 개미들은 모두가 새로 싸움이 발발한 지점을 지원하는 병력이다.
'그런데 뒤로 빠진 플레이어는?'
그들의 수는 정확히 열 명.
열 명이서 전황 자체를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지금 분리되어 나온 열 명은 칼날 개미 측의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이들일 테고.
'명가의 플레이어가 끼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우선 저들과 조우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명가의 플레이어가 저 중에 끼어 있다면, 더더욱.
'혈계 포식.'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혈계 포식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떤 명가의 플레이어일지는 모르지만 직계들의 피를 타고 이어져 나오는 혈계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성능을 자랑한다.
굳이 혈계가 아니더라도, 혈계로부터 파생된 능력들 역시 말할 필요도 없는 건 당연하고.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이미 내 초감각으로 완전히 감지하고 있는 상태였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은신으로 접근해야 하나?
아니면 더 가까워지기를 기다려야 하나?
잠시의 고민을 끝냈다.
'접근하자.'
은신을 사용해서.
개미굴에 올라선 플레이어들이라면 충분히 강한 이들이지만.
이 중에 마력을 600까지 올린 플레이어는 없다.
즉, 내 은신을 꿰뚫고 나를 파악할 플레이어는 없다는 뜻.
나는 은신을 사용했고.
점점 내 몸이 투명해졌다.
그리고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로 놈들이 다가오는 방향과 수직 방향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놈들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칼날 개미들의 세부적인 작전을 캐치해 보기 위해서다.
점점 놈들과 나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녀석들의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고.
개미굴이라는 시야가 극도로 차단된 환경 때문이었다.
가까워지고 나니 놈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측면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가장 앞에 선 녀석의 한 마디다.
예리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예리한 판단은 아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여기는 개미들의 전장.
단 두 개의 세력만의 전쟁터가 아니다.
게다가 제3의 세력인 플레이어들까지 끼어 있다.
수많은 이해관계와 욕망들이 뒤엉킨 장소였으니.
저런 생각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여기."
그때 가장 앞에 선 사람의 말과 함께 다른 아홉 명의 플레이어들이 멈춰 섰다.
그 순간에는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내 기척을 완전히 감췄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나는 가장 앞에 선 남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당장 싸움을 시작할 준비까지 마친 상태다.
"아뇨. 여기에서 대기할 겁니다. 칼날 개미를 습격한 이들이 다시 칼날 개미를 노리고 있다면 반드시 이쪽을 노릴 겁니다."
"왜죠? 왜 굳이 여길…. 차라리 본진을 직접 공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본진의 병력이 많이 비어있을 텐데."
"그 때문이죠."
"예?"
"여기야말로 앞으로 치고 나가는 본대와 본진의 상황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대기합니다."
"하, 하지만… 그러다가 습격하는 이들을 놓쳐 버린다면…."
"그만. 판단은 내가 합니다."
"……."
이 대목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확실히 예사의 플레이어는 아니다.
이 판단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은 추론이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저 남자의 차분함과 단호함 때문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의 입에서 나올 만한 발언은 아니지.'
특히나 개미굴처럼 자신의 공을 세우기 위해 눈이 먼 녀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더더욱.
보통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라도 더 큰 성취를 이룩하기 위해 눈앞의 이득에 급급해진다.
그럴수록 판단은 더욱더 가벼워지고 직선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심지어 지금같이 커다란 싸움을 앞두고 있다면, 판단력은 점점 더 무뎌질 테고.
'그런데도 상황을 냉철하고 차분하게 직시한다는 건, 분명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까지.'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아홉 명의 플레이어들을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없다면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발언이었으니.
나는 그 부분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 생각과 함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명가의 플레이어다.'
전생에서 내가 만났던 명가의 직계 플레이어.
그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저 녀석에게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물론 녀석 역시 칼날 개미를 습격한 게 개인이 아니라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놈의 판단은 적중했다.
놈이 대기하고자 하는 위치에 정확히 내가 서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나 놈보다 내가 한 수 위다.
그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수월히 놈들에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던가.
탑을 오르고 처음.
명가의 플레이어와 직접 조우한 순간이었다.
"자세를 낮추십시오. 그리고 이곳을 습격하는 무리를 발견하는 즉시 처형할 겁니다."
확실해졌다.
처형이라는 말을 쓰는 건, 명가.
그중에서도 체술 명가의 혈계들이 쓰는 말이다.
그리고 그를 바라봤다.
'역시.'
[금강불괴 – 혈계 계승]
[궁신탄영 – 혈계 파생]
.
.
.
체술 명가 플레이어의 능력이 나열되어 있는 창 하나가 떠올랐다.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이다.
저러니 명가 놈들이 그토록 떵떵거리면서 탑의 정상에서 군림할 수 있는 거겠지.
남들은 평생을 가도 하나 얻을까 말까 한 사기적인 능력들을 뭉텅이로 가지고 있는 괴물들.
정말이지 더러운 세상이야.
라고 생각했었다.
전생에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놈들보다 내가 위다.
지금 내게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는 독보적인 강자가 아닌, 하나의 훌륭한 먹잇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먹음직스럽군.'
목표는 정해졌다.
나는 즉시 움직였다.
내가 움직인 방향은, 무리의 가장 뒤쪽.
체술 명가의 플레이어는 기습으로 죽일 수 없다.
혈계인 금강불괴 때문이다.
그 말도 안 되는 방어력은 오러 블레이드 4단계의 일격 따위로는 치명상조차 입힐 수 없다.
'최대한 빠르게 수를 줄여야 한다.'
푸훅!
내 검이 가장 뒤에 서 있던 플레이어의 목을 관통했다.
"……?"
풀썩!
힘없이 고꾸라진 신형 하나.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최대한 빠른 시간동안 최대한 많은 수를 줄여야 할 테니까.
그렇게 3초가 더 지나갔을 무렵.
"기습이다!"
한 플레이어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미 네 명의 플레이어가 쓰러진 뒤였다.
그 순간, 내 눈에는 보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체술 명가 플레이어의 동공을.
'흔들렸으면, 넌 이미 내게 진 것이나 다름없다.'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당황했다는 건, 주도권을 넘겼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럼 그 주도권을 휘둘러 줘야겠지.'
나는 다시 한번 몸을 움직였고.
콰륵!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물론 저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내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파직!
"커헉!"
콰득!
"크아아악!"
푸훅!
내 검로 한 획, 한 획을 버텨내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나뒹구는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