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시간은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강민이 막 일곱 번째 지점의 습격을 마치고 난 뒤다.
"보고드립니다! 현재 솔져 개미가 일곱 번째 접전 지점을 습격했다는 급보이옵니다! 이번의 생존자는 총 셋입니다!"
"이 건방진!"
여왕개미의 분노 가득한 음성이 성의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몇 번이나 반복된 습격에 이미 여왕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건만.
또 한 번의 습격 소식에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 없을 정도였다.
"칼날 개미의 습격이라는 정보는 확실한 것인가?"
그럼에도 반격하지 않는 건, 이 상황을 속단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모든 결정에 있어서 신중해야만 할 때다.
싸움이 절정으로 치달리고 있었고.
양 측은 끝없는 소모전을 이어가는 중이었으니까.
"분명합니다. 현재 사자 개미는 몰락한 시점이며 호랑 개미는 감히 습격할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게다가 거북 개미 측의 병력은 호랑 개미 측으로 향하고 있으니…. 그들도 우리를 습격할 여유는 없을 것입니다."
참모 개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습격자의 무리는 완벽한 위장술을 펼치고 있다고 하오니…. 이 정도의 위장술이라면 분명 칼날 개미의 소행일 수밖에 없사옵니다."
참모 개미 한 마리가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요약해서 보고했다.
'분명 칼날 개미 밖에는 없을 건인데….'
확실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왕개미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가장 강성한 세력인 칼날 개미였지만, 움직일 수 있는 병력 자체에 큰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알을 낳는 것도 쉽지 않아.'
그 사실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솔져 개미와의 전쟁이 이어지며 그녀 역시 크게 무리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싸움의 범위를 더 늘린다면… 이제는 정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강민이 예측했던 그대로다.
그러니 그녀 역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다시 한번 칼날 개미가 우리의 수색대를 습격했다는 소식이옵니다!"
다시 한번 습격 소식이 전해졌고.
여왕개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현재 솔져 개미 측에서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가?"
여왕개미가 물었다.
자신이 지쳐 있는 만큼 칼날 개미 측의 여왕도 크게 지쳐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들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심산이다.
"현재 파악하고 있기로는 그들은 본진에 최소한의 병력만을 남겨 놓은 상태입니다. 더 이상의 병력을 충원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라 사료되는 상황입니다!"
"……."
그 말에 여왕개미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어쩌면 지금이야 말로 기회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발악인 게로군.'
여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겠지.'
그리고 말했듯 칼날 개미 역시도 솔져 개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차이점은, 칼날 개미에게는 운용할 수 있는 잔여 병력이 존재한다는 것.
게다가 한 가지 더 걸리는 건, 사자 개미의 몰락과 거북 개미의 존재였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싸움이 더 길어진다면 거북 개미에게 세력을 불릴 틈을 주는 꼴이 되고 말 테니….'
지금은 칼날 개미에게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거북 개미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분명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의 거북 개미라면.
'당장 칼날 개미와의 전면전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놈들은 우리를 위협할 수 없다.'
상황에 대한 판단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고민할 이유는 없다.
여왕은 즉시 결정을 내리고 소리쳤다.
"즉시 병력을 파견하라! 싸움이 벌어진 곳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 밀집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고, 본진의 병력이 그 곳에 당도하는 즉시 칼날 개미를 공격하라!"
이제는 전면전이다.
길고 지겹던 싸움의 끝을 내릴, 그 마지막 서막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역시나 강민이 그려 놓은 시나리오 그대로 전장의 큰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호랑 개미의 진영을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내가 계획했던 그대로 움직여 주고 있다.
'현재 파악하기로는 총 여섯 군데에서 칼날 개미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어.'
내 목표치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얻어 낸 셈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기다리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때까지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지.'
앞으로 싸움은 더 격렬해질 것이다.
두 진영 모두가 이번 싸움이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있을 테니까.
'분명 칼날 개미의 여왕은 솔져 개미를 물리치고 거북 개미까지 몰아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칼날 개미의 병사 개미들은 대규모로 움직이게 되리라.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칼날 개미 측의 병력이 움직이는 상황을 꾸준히 체크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병력이 텅 빈 그 지점을 공략할 생각이다.
그게 바로 내가 상황을 주시하는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그 다음의 두 번째는.
'플레이어라는 변수.'
그동안 개미굴에 진입하고 나서 플레이어들을 만난 적이 없다.
내가 은밀히 활동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도를 쌓아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개미굴에서 보내는 시간은 짧으면 몇 달에서 길면 몇 년까지도 걸린다.'
그 긴 시간동안 플레이어들은 개미뿐 아니라 수많은 플레이어들과 조우한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하고, 동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도 이번 싸움에서는 필연적으로 플레이어들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지.'
당연한 이야기다.
칼날 개미 측은 그 어떤 진영보다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처럼 사활을 건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플레이어들을 움직일 것이다.
'게다가 개미굴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탑의 30층을 돌파한 녀석들이야.'
그 말은 무엇인가.
여기에 남아 있는 이들은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들이라는 뜻이다.
'개중에는 거대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심지어 명가의 플레이어들까지도….'
그게 가장 큰 문제다.
개미들보다 거대 길드, 혹은 명가의 플레이어들이 더 위협적인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30층을 돌파하고서도 살아남았고, 심지어 거대 길드나 명가에 소속될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전생의 기억상, 그런 녀석들은 칼날 개미 측에도 많으리라.
이제 그들은 어느 정도 탑의 '기득권'에 안착한 녀석들이다.
기득권에 속한다는 건, 잃을 게 많아진다는 뜻.
잃을 게 많을수록 도박을 걸기는 힘들다.
결국 명가, 혹은 거대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들은 속칭 '안전빵'인 칼날 개미를 선택할 확률이 클 수밖에 없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녀석들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어쩌면 플레이어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이 시점부터 플레이어들과의 싸움은 20층이나 10층대의 싸움과는 차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다.'
집단에 속한 녀석들과의 싸움으로 국면이 달라졌다.
내가 그들을 공격한다는 건, 결국 그들이 속한 집단을 공격한다는 뜻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나도 어느 정도는 조심해야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해야 할 싸움을 피할 이유도 없다.
집단과의 싸움으로 국면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
'강자생존.'
바로 그것이다.
나 개인이, 그리고 내가 속한 위드 길드가 '강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면.
내가 그 어떤 길드를, 혹은 명가를 건드린다고 해도 그들은 나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위드 길드의 세력을 키우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새로 생겨난 포식 슬롯을 어서 처치하기도 해야 했으니.
한 편으로는 플레이어들을 만나고 싶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운이 좋으면 괜찮은 능력을 포식할 수도 있을 테지.'
어쨌든.
칼날 개미의 병력 이동과 플레이어라는 변수.
그 두 가지 이유로 나는 현재의 상황을 조금 관망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 올리고 칼날 개미의 병력 이동을 주시하고 있을 무렵.
'시작 됐다.'
대규모의 칼날 개미 병력이 한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
'플레이어가 있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두 가지가 동시에 꿈틀대기 시작했다.
***
칼날 개미들의 병력이 이동하는 가운데.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건 백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칼날 개미 세력을 택한 플레이어들이다.
"그나저나. 그 얘기 들었지? 마법 명가 X됐다며?"
"안 그래도…."
플레이어 한 명이 뒤쪽을 흘끔 바라봤다.
거기에 있는 건, 마법 명가 산하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다.
"저 새끼들 저러고 있는 거 보면 뻔한 일이지."
세상을 다 잃은 것 마냥 안색이 어두워져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초상집에라도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 짓이지? 그게 말이 되는 거야?"
"말이 안 되니까 지금 난리가 난 거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중.
플레이어들이 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저기요! 마법 명가 X된 건 X된 거고 지금 해야 할 일은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이 개자식이! 남 일이라고 그딴 소리 지껄이다간 뒈지는 수가 있어? 엉?"
듣다 못한 플레이어가 소리쳤다.
그는 마법 명가 산하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였다.
"뒈지는 수가 있다고? 네가 어떻게 할 건데? 할 수나 있고?"
반박할 말 따위가 있을 리가.
심지어 저렇게 공격을 가하는 플레이어는 검술 명가 산하 길드의 소속이었으니까.
"어차피 늬들 망한 거 세상이 다 아니까.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히기 싫으면 잘하자, 응?"
"……."
마법 명가 산하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을 수 없었다.
저 말이 틀림이 없지 않은가.
'마법 명가는 망했어도…. 분명 살아남을 구멍은 있어.'
여기까지 올라 온 실력이라면.
다른 길드라고 못 들어가겠는가.
그래.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솔져 개미와의 전쟁을 끝내고, 40층으로 올라서는 것뿐이다.
'분명 새로운 인연이 나타날 거야.'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길드 탈퇴 버튼을 클릭했다.
그건 그 혼자만의 선택이 아니다.
현재 탑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마법 명가만이 아니라, 마법 명가를 지탱하던 지반이 천천히, 그리고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플레이어들이 개미들의 뒤를 따라 그들에게 배정된 위치에 당도했을 무렵.
"자, 여기부터는 갈라져야 합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이어들 중 리더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체술 명가의 직계인 최연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