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날이 밝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탑은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사상초유의.
아니, 그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파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상황이지 않은가!
[마법 명가의 분가, 회복 불능의 습격을 받아…]
[마법 명가를 공격한 범인은?]
[위기의 마법 명가,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마법 명가의 몰락? 마법 명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날 마법 명가는 일간지의 지분을 90% 이상 차지했다.
아직까지도 마법 명가를 비롯한 모든 명가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상위 열 개 길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이 사태에 대해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감히 입을 열었다가는 어떤 화를 당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좋은 떡밥을 두고 수많은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동안 명가, 특히나 마법 명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다수의 군소 길드들이 입을 모아 마법 명가를 규탄하고 나섰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마법 명가에게 반기를 들어보겠는가.
그동안 마법 명가의 악행과 그들에게 입은 피해에 대해서 배상하라고 나섰고.
군소 길드들은 그와 동시에 대형 길드인 화랑에게 접촉하기 시작했다.
현재 최상위 랭커 길드 중, 명가의 영향 밖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건, 화랑 길드가 유일했으니까.
당연히 화랑 길드로서도 이 사태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다수의 군소 길드들이 한 번에 들고 일어난 상황에서는 말이다.
안 그래도 철목 길드가 몰락하고 슬슬 마법 명가의 압박이 화랑 길드를 조여 오고 있던 참이었으니.
화랑 길드로서도 이참에 마법 명가를 완전히 무너트리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사태를 가장 조용히, 그리고 신중히 관망하고 있는 이는 화랑 길드의 길드장인 철기영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그가 아무도 없는 자신의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온전히 신경을 집중해서 최선의 결론을 도출해 내기 위해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화랑 길드를 명가의 영향도 없이 랭킹 1위의 길드로 길러낸 방식이었다.
그는 먼저 현재 명가와 대형 길드들의 상황을 되짚었다.
'겉으로는 탑의 정복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
이전에 협의한 대로, 명가들과 대형 길드들이 함께 정보와 인프라를 공유하며 탑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지금은 그 성과가 드러나는 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60층을 돌파했다는 속보가 전해진 참이었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선두는 검술 명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검술 명가는 그 어느 세력보다 조용했다.
오로지 탑 정복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는 듯이.
마법 명가의 몰락에 가장 기뻐할 이들도 그들이건만, 그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을 정도였다.
'검술 명가와 접촉하는 건 안 돼.'
아무리 화랑 길드의 길드장이라고 해도 검술 명가는 어려웠다.
심지어 마법 명가가 몰락을 눈앞에 눈 이 시점에서는 탑에서 검술 명가야 독보적인 세력으로 올라섰을 테니까.
'그러면 답은 남은 세 명가인데….'
모두와 동시에 협조할 수는 없다.
화랑 길드로서도 명가들의 협력보다는 분열이 더 반가운 게 당연한 일이고.
'세 명가중 하나와 손을 잡고 그 명가를 키워야 한다.'
한쪽 명가가 치고 올라가면, 남은 두 개의 명가는 치고 올라간 명가를 견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제 놈들끼리 치고받고 물고 뜯을 시간에 우리 화랑이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있도록.'
철기영의 눈이 빛났다.
'체술 명가.'
궁술과 창술 명가에 비해서 뒤떨어지는.
즉, 다섯 명가 중 가장 약체라고 평가받은 체술 명가가 철기영의 표적이 된 순간이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검술 명가가 독주하는 편이 낫겠지.'
어차피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면 애초에 건드리지 않는 게 낫다.
그리고 검술 명가가 차지하고 남은 파이를 다른 세 명가와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진흙탕 한 번 만들어 보자고.'
철기영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다.
'누구지?'
누가 도대체.
그리고 감히 마법 명가를 공격했다는 말인가.
그게 정말 가능이나 한 일인가.
이번 사태는 분명 기회이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커다란 위협이기도 하다.
마법 명가를 박살낼 정도의 거대하고 강력한 세력이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상.
용의 선상에 오른 이들은 많지 않다.
겉으로는 협력한다지만 마법 명가를 압박하고 있던 세 명가.
혹은 관심 없는 척하면서 뒤로 어떤 일을 저질렀을지 모르는 검술 명가.
'아니면 은밀히 힘을 키우고 있는 또 다른 세력이 있다거나…. 아니야. 이건 너무 음모론에 가까운 추측이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철기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사태의 범인이 그 누구라고 확신할 할 만한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치겠군.'
그는 복잡한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지금은 지금 해야 할 일을 우선 끝내는 게 먼저였다.
체술 명가와의 접촉.
철기영은 곧바로 체술 명가 쪽으로 은밀히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했다.
만약 운이 좋다면.
체술 명가와의 접촉에서 이번 사태의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
[박명철 : 강민 씨! 아, 그러니까…. 어…. 어, 어어… 으음….]
몇 번이나 반복된 박명철의 메시지다.
[박명철 씨. 우선 진정이 되면 다시 연락주십시오.]
내가 박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으니, 진정할 시간도 필요할 테니까.
내가 급히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개미굴로 향한 덕분에 박명철에게 이렇다 할 말을 못 해주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앞으로 위드 길드의 행동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놓았다.
그렇게 대충 오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박명철 : 죄송합니다. 정신 차렸어요.]
박명철의 답장이 도착했고.
나는 다시 그에게 답장을 작성해 줬다.
[이제 다시 길드의 규모를 늘려 주십시오. 더 이상 웅크리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답장을 보내고 나서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나 때문에 길드의 규모를 축소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규모를 늘리라니.
내가 박명철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장난하는 거냐, 라고 따져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거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에는 당연히 보답할 생각이다.
늘 말했듯 받은 게 있으면 갚는 게 인지상정이고.
위드 길드의 존재 덕분에 마법 명가를 몰락시키는 데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다시 박명철의 답장이 도착했다.
[박명철 : 알겠습니다.]
깔끔한 답장이다.
내가 느꼈던 미안함이 무안해질 정도로.
그리고 다시 한번 박명철에게 크나큰 감사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지금 대형 길드와 명가들이 탑을 오르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으니, 제가 정보를 몇 개 드리겠습니다. 정보의 출처는 알아서 둘러대 주시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탑에 대한 정보의 일부를 박명철에게 전송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만한 정보들이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 중에서는 극히 일부분일 뿐이지만.
저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위드 길드의 입지가 치솟는 데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으리라.
'물론 정보만으로는 다른 대형 길드와 명가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겠지만.'
아직 증명도 되지 않은 정보인 건 분명하다만.
그 콧대 높은 녀석들에게 위드라는 신흥 세력이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제는 박명철의 역량이 절실히 필요한 타이밍이다.'
물론 걱정은 하지 않는다.
박명철은 내가 준 정보의 가치를 잘 굴리고 굴려서 목적을 이뤄낼 수 있을 만한 사람이니까.
[박명철 : 허어…. 아, 알겠습니다.]
조금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긴 했지만, 역시 깔끔한 답장이다.
아무튼 내가 박명철에게 세력을 확장하라고 만든 이유는 하나다.
앞으로는 위드 길드의 역할이 더욱더 중요해진다.
그동안은 힘을 숨긴 채 웅크리고 있었지만, 마법 명가가 몰락을 앞두고 있는 이때야말로 다시 위드 길드가 날개를 뻗어나갈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위드 길드의 세력과 함께 이 다음의 명가들과의 싸움을 준비해야겠지.'
바로 그것이다.
언젠가 나의 존재가 수면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됐을 때 다른 집단의 공격으로부터 나의 우군이 되어 줄 수 있을 강한 세력의 존재가 필요하게 될 테니까.
[앞으로도 적절한 타이밍에, 쓸만한 정보를 전해 드릴 테니 지금같이 상황을 꾸준히 보고해 주십시오. 특히 박승균에 대한 정보는 꼼꼼히 체크해주십시오.]
박승균.
현재 마법 명가의 소가주로서 모든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실상 마법 명가의 실권자.
아무리 몰락을 앞두고 있다고 하지만, 박승균은 그렇게 쉽게 죽을 위인이 아니다.
그러니 놈의 최후는 반드시 내 손으로 맺어 줄 생각이다.
[박명철 : 명심하겠습니다.]
'이제는 내 할 일을 시작할 차례다.'
개미굴의 마지막 단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업적.
'칼날 개미와의 전쟁.'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내가 마을에 가기 전에 있었던 장소.
호랑 개미들의 반군 아지트다.
나는 곧바로 호랑 개미의 참모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다시 움직이기 전, 내가 자리를 비웠던 기간 동안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참모의 막사에 들어가기도 전, 내부에서 개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막사 안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아…! 도, 돌아왔군!"
"드디어! 오래 기다렸소!"
호랑 개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겼다.
'무언가 큰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저들이 열띠게 토의를 하고 있는 이상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서 앉으시게!"
내가 앉기도 전, 장군 개미 하나가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줬고.
나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여왕을 바라봤다.
"그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대의 공백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오."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선 사자 개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소. 뿔뿔이 흩어진 이들마저도 거북 개미들이 모조리 처치했으니 말이오."
"잘 됐군."
"그리고 사자 개미의 공백을 이용해 우리의 세력 역시 그대가 처음 왔을 때보다 몇 배는 강해졌소."
그 말은, 여왕개미가 무수한 새끼를 낳았다는 뜻이리라.
여왕개미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나 크게 압박받고 스트레스 받던 상황에서 벗어나면 더더욱.
사자 개미가 사라지고 상황이 나아진 틈을 이용해 여왕개미는 호랑 개미의 수를 크게 늘렸다는 뜻이리라.
"잘 됐군."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만.
인사 치례였다.
"허나 문제가 하나 생겼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라는 뜻이다.
"거북 개미에서 접촉을 해 왔소."
"뭐라고 했지?"
"우리와의 협력을 제안해 왔소."
"협력이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협력이라고 했지만, 역시 호랑 개미를 이용하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여왕개미도 그 사실을 알고 '문제'라고 표현한 것이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저 말을 듣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잘됐군."
"……?"
나는 여왕개미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거북 개미를 이용한다면 칼날 개미를 부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