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 무렵 거북 개미 왕국의 왕궁 내부.
"이게 웬 횡재라는 말이냐! 으하하하하!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눈엣가시 같던 사자 개미들을 박살내 주다니! 크흐하하하하!"
거북 개미의 진영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강민의 예상대로 현재 사자 개미의 진영을 공격한 건 거북 개미였다.
그들로서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사자 개미는 거북 개미를 몰락시키고 도약을 원했다.
하지만 그건 거북 개미도 마찬가지다.
칼날 개미와 솔져 개미에게 밀려 기를 못 펴고 있던 거북 개미다.
그들은 이번에 기회를 붙잡아, 사자 개미를 몰락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더 나아가 호랑 개미를 한 번에 집어삼키며 새로운 세력으로 급부상하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아직 사자 개미를 괴멸시킨 모험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혹 그들이 호랑 개미를 돕고 있는 것이라면…."
"호랑 개미를 돕는다라…. 그러면 오히려 우리에게는 좋은 상황이지 않겠는가."
여왕개미의 말에 장군 개미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차피 호랑 개미에게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그 자가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 말에는 장군 개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사자 개미를 몰락시킨 것뿐.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호랑 개미에 속해 있다면 사자 개미를 몰락시킨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애당초 호랑 개미는 너무도 약한 세력이었으니까.
개미들의 전쟁의 대세를 바꿀 수는 없다는 뜻이다.
"호랑 개미는 어차피 멸망할 수밖에 없는 녀석들이지. 사실 사자 개미도 호랑 개미와 다를 바 없는 놈들이었고. 놈들이 버티고 있던 건 어디까지나 칼날 개미를 배후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장군 개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거북 개미의 여왕이 장군 개미들을 돌아봤다.
잠시 이어진 침묵.
장군 개미들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여왕개미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 우리가 그 모험가를…."
그제야 여왕개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분명 그 모험가는 야망이 있는 모험가일 것이다. 그러니 호랑 개미를 도와 사자 개미를 부순 것이겠지."
장군 개미들은 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왕개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밑바닥에서 올라가려는 야망가다. 그런 야망가들은 언제나 존재했지. 쉬운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자들. 밑바닥에서 차근차근 올라가길 원하는 녀석들. 그러니 놈은 분명 칼날 개미와 솔져 개미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테지!"
그때 장군 개미 한 마리가 눈을 번뜩였다.
"오오…. 그렇다면 남은 세력 중 가장 약한 우리를 선택하겠다는 것이군요! 그게 제일 재미있으니까!"
가장 약한, 이라는 말에 여왕개미가 치미는 화를 애써 억눌렀다.
"그렇…지. 그리고 우리라면 분명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으니…. 분명 우리와 그 모험가가 손을 잡는다면 칼날 개미를 쳐부수는 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야."
"오오오오!"
"그렇군! 이해했습니다!"
"역시 여왕님의 혜안은!"
그제야 장군 개미들이 손뼉 치며 감탄사를 터트리기 시작했으니.
그 모습을 보며 여왕개미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둔한 것들. 내 어찌 저런 것들을 낳았는지….'
거북 개미.
그들이 세 번째 세력에 머물러 있는 건, 바로 지능 때문이었다.
육체 능력으로는 칼날 개미에게도 뒤지지 않지만.
떨어지는 지능에 칼날 개미와 솔져 개미에게 밀려 버린 것.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달라질 것이다.'
정체불명의 모험가.
홀몸으로 사자 개미를 몰락시킨 괴물.
여왕개미의 상황 판단 능력과 거북 개미들의 전투 능력.
거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모험가까지 더해진다면.
'우리의 승리다.'
여왕개미의 턱이 기쁨에 사로잡힌 채 부르르 떨렸다.
***
"가아아악! 갸아아악!"
여왕개미는 계속해서 나를 향해 괴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포효가 시작되며 전장에서 싸우고 있던 개미들도 왕궁 내부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초감각으로 파악해 낸 결과다.
문제는 아직 녀석들이 도달하지 못했다는 거다.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나는 검을 들어 올렸고.
여왕개미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결사의 항전이다.
확실히 여왕개미의 전투력 자체는 장군 개미들보다 뛰어났다.
문제가 있다면, 나에게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는 것 뿐이고.
파직!
오러 블레이드가 여왕개미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여왕개미의 몸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힘없이 갈라져 내렸고.
쿠웅!
두 쪽이 난 여왕개미의 몸이 고꾸라졌다.
사자 개미의 최후.
꽤나 긴 싸움이었지만 그 끝은 너무도 초라했다.
쿵! 쿵! 쿵!
그때 막 내가 있는 곳에 도착한 사자 개미들은.
"그으으으으…."
"그어어어어…."
도착하자마자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개미들의 상징인 여왕개미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놈들은 여왕개미가 함께 할 때에는 죽음조차 불사하지만, 여왕개미가 사라지면 모든 힘을 상실한다.
그것이 바로 개미굴에 존재하는 개미들의 특성이다.
'이제 빠져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건 문제없다.
내가 걸어 나가자 사자 개미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길을 만들었다.
말했듯 여왕개미가 사라진 개미들은 고블린만도 못한 몬스터로 전락한다.
그렇게 왕궁을 빠져나왔고.
왕궁 밖에서는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당연히 학살자는 거북 개미였다.
'가자. 호랑 개미의 아지트로.'
***
"……."
내가 도착하고 난 뒤, 호랑 개미 아지트는 다시 한번 침묵에 휩싸였다.
나도 내가 하루 만에 사자 개미들을 멸망시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저들이 느끼고 있는 충격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어쨌든 사실이다. 이제 오늘부로 사자 개미는 사라졌다."
여전히 침묵이다.
거북 개미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것이고, 애당초 전쟁의 현황 따위는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니까.
사자 개미를 처치했으니, 이제 칼날 개미들만 쳐부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때.
"수, 수고 했소…."
여왕개미가 말했다.
그와 함께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여왕개미가 플레이어 '한강민' 님의 업적에 크게 놀랍니다.]
[개미굴 스테이지의 진행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개미굴 진행도 : 58%]
[진행도가 50%를 넘었습니다.]
[마을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됐다.
단번에 58%를 달성했고.
마을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어냈다.
'드디어 마을이다.'
이번 마을에서는 특히나 해야 할 일이 많다.
첫 번째로는 내가 모은 개미의 등껍질을 팔아서 돈을 최대한 끌어모아야 한다.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1회용 상점에서 좋은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전생에서는 눈을 뜨고 보내야만 했던 기회를 이번엔 반드시 붙잡는다.'
성능으로만 따지자면 50층, 60층.
탑의 초고층에서만 구할 수 있을 만한 성능의 아이템도 고작 35층에서 구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당연히 비밀 상점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내 전투력도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재 탑의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해야겠지.'
꾸준히 박명철에게 보고를 받았기에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마법 명가와 창술, 체술, 궁술 명가와의 대립이 첨예해 지고 있다고 했어. 마법 명가는 철목 길드를 완전히 박살냈고.'
말 그대로, 현재 대한민국의 탑은 거대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전례가 없을 만한 일들이 하루 하루 벌어졌고.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역시 그 중심은 마법 명가다. 오히려 검술 명가는 잠잠하다고 했지.'
그러니 내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기회다.
세 명가와 마법 명가의 반목.
그리고 대형 길드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했다.
마법 명가가 철목 길드를 공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법 명가를 무너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러니 나는 35층 마을에 올라가서 놈들의 시설을 공격할 생각이다.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지.'
만약 정상적인 상태의 마법 명가라면 지금의 내 힘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말했듯 현재의 마법 명가는 폭풍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대형 길드의 견제와, 다른 명가들의 압박.
그뿐인가.
내가 놈들의 연구소를 박살낸 덕분에 현재의 놈들의 기반 세력은 엄청나게 약화된 상태이지 않던가.
'네놈들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마법 명가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고.
"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여왕개미가 내게 물었다.
"칼날 개미를 부수는 건, 조금 미뤄야겠어."
"그, 그렇군. 알겠소."
여왕개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면에서는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아무래도 호랑 개미들 역시 급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 테다.
"곧 보도록 하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몰른은?"
"그 자는 지금 자신의 막사에 있을 거요."
"고맙군."
나는 마을에 올라가기 위해 몰른이 있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
"주, 주인니이이임!"
몰른의 막사에 도착하자 몰른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동안 몰른을 떼어 놓은 채로 움직이다 보니 몰른은 무척 심심한 상태였을 거다.
"이제 저를 다시 거둬 주실 생각이십니까아아?"
"무슨 소리야. 언제 내가 너를 버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개, 개미굴에 올라오고 나서 주인님이 저를 매일 여기에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까아?"
"내버려 두다니. 그런 거 아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오오!"
몰른이 계속해서 투정을 부렸다.
"그런 거 아니다. 그리고 몰른. 어서 짐을 챙겨라."
"예에? 어디 갑니까아?"
나는 몰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개미굴에 와서 몰른은 제대로 된 밥도 먹지 못해 나름 지쳐 있는 상태였으니.
"맥주 먹으러 가자."
"매, 맥주우우우!"
맥주라는 말에 몰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서 짐 챙겨."
"아, 알겠습니다!"
몰른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 무렵 몰른은 마을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고.
상태창 한 구석에 적혀 있는 [마을]이라는 글자 위로 손을 올렸다.
[마을에 진입하시겠습니까?]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그래."
내가 그렇게 말 한 순간.
[플레이어 '한강민' 님과 펫 '몰른'이 마을에 진입합니다.]
"끼요오오오!"
몰른외 환호성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
잠시 후 우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조금 전만 해도 어두운 개미굴 내부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만이군.'
하늘에는 해가 떠있었고, 구름이 흘러 다녔다.
초감각이 아닌 눈으로 풍경을 보게 되니 나름 감회가 새로웠다.
'개미굴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지만….'
몰른 역시 햇빛이 반가운지 하늘을 보며 방방 뛰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몰른을 굳이 말리지 않았고.
[35층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시간 되시면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면 좋겠군요.]
박명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벌써요…? 아니, 무슨…. 허….]
박명철의 답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