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본진의 경계는 지난 두 번 놈들을 공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삼엄해진 상태다.
'물론 의미 없는 짓이지만.'
가장 어려운 건 본진 안에 잠입하는 일이다.
아무리 내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현재 내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만약 저들이 방심하지 않고 외곽부터 철저하게 방비해 놨다면, 본진을 공격하고.
또 장군 개미를 쓰러트리며 여왕에게 닿는 길이 너무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어쨌든 호랑 개미들의 도움으로 사자 개미의 본진에 잠입하고 난 뒤였고.
본진에 잠입하고 난 이상, 내게 문제 될 건 조금도 없다.
나는 놈들의 본진으로 진입한 순간 망설임도 없이 깊숙한 곳으로 치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여왕개미가 앉아 있을 사자 개미들의 성채가 보이기 시작한 무렵.
나는 공격을 시작했다.
인정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은 채로.
여기까지 들어오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감각을 극도로 끌어 올린 덕분에, 개미들의 시선을 피해 본진 깊숙이 잠입할 수 있었다.
내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한 사자 개미들은 경보를 바쁘게 울려대고 있었다.
경보가 울리는 즉시 이곳을 향해 병력들이 모여들고 있었고, 벌써 내 눈으로 확인한 장군 개미만 해도 셋이다.
'장군 개미도 쉽사리 나를 향해 다가오지 않는다.'
무턱대고 나를 공격하기보다는, 천천히 나를 지치게 만들고 확실하게 제압하겠다는 뜻이리라.
좋은 전략이다.
그만큼 나를 충분히 견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아무래도 나의 입장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건, 싸움이 장기화 되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왕의 목을 베어내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3일.
여왕개미는 1주일이라고 했지만, 나는 3일 안에 사자 개미들을 무너트릴 생각이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지금쯤이면 사자 개미의 여왕에게도 내가 침입했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거다.
문제는 호랑 개미에게 외곽의 경계를 맡겼고, 너무도 쉽사리 외곽의 경계가 뚫렸다는 것.
그렇다면 사자 개미의 여왕도 호랑 개미를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쉬지 않고 3일 동안 놈들을 공략해야 한다.'
사실 그 3일도 빠듯할 수 있으니.
쉴 틈은 없다.
3일간의 지구전을 벌이겠다는 말이다.
지구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치고 빠지며 체력을 비축해야 할 테고.
시작부터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차라리 무턱대고 나를 향해 달려들어 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말이긴 하다.
저들은 어쨌거나 하나의 왕국 규모의 군대이고 나는 일개 개인.
개인이 왕국을 상대로 지구전을 벌이겠다니.
만약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정신 나간 게 아니냐며 욕지거리를 내뱉었을 거다.
이런 나를 믿고 있는 호랑 개미의 여왕도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한 것인지는 충분히 공감하는 바다.
그럼에도 자신 있다.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이며, 전부이기도 하다.
'앞으로 이틀. 놈들의 전력을 하나하나 갉아먹는다. 그리고 마지막 날, 여왕을 베어 넘긴다.'
이틀에 걸쳐 사자 개미 측의 장군 개미의 수를 셋 이하로 줄이는 것.
'사자 개미들이 보유하고 있는 장군 개미의 수는 총 다섯.'
그렇다면 하루에 최소 여섯, 일곱의 장군 개미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이 오늘 하루는 긴 싸움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할 수밖에 없으리라.
겉으로 보면 간단한 전략이다.
하지만 실행해 내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전략이기도 하다.
꼴깍
나는 물약 하나를 꺼내 삼켰다.
스태미너 지속 회복 물약이다.
신체를 회복시키는 물약이 아닌, 체력을 증가시키고, 근육과 신체의 회복 속도를 향상키기는 물약.
쉽게 말하면 더 오래, 더 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약인 셈이다.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을 내 계획대로 끝내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부작용은 감수할 만하지.
내 몸에서 은은한 노란 빛이 맴돌았다.
장군 개미를 바라봤다.
여전히 나를 공격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안 오면 내가 가 주마.'
나는 저쪽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마리의 장군 개미를 향해 발을 디뎠고.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는 동시에 지휘관의 외침을 한 번 사용했다.
커다란 폭발과 함께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호랑 개미들이 산산조각이 난 채 허공에 튀어 올랐다.
"가아아아악!"
"캬아아아아!"
당황한 장군 개미들의 공명이 전장을 울렸고, 더 많은 개미들이 나를 둘러쌌지만.
구구구! 콰아아아앙!
오우거의 신체가 가미된 나의 일격에 개미들은 다시 한번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그럼에도 장군 개미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녀석들도 거북 개미와 전쟁을 앞두고 있는 지금, 자신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리라.
그런데 그때.
"가아아아악!"
"그에에에에!"
두 마리의 장군 개미가 더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세 마리의 장군 개미들이 전투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거였나.'
놈들은 다른 장군 개미들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두 마리의 장군 개미가 나타나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호랑 개미들의 사기가 하늘을 뚫고 치솟았다.
자신들의 승리, 그리고 나의 죽음을 확신한다는 듯이.
하지만 이 순간, 나는 저들의 아둔함에 감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스태미너 물약을 괜히 먹었군. 비싼 거였는데.'
여섯 마리의 장군 개미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마셨던 스태미너 물약이다.
하지만 지금, 다섯 마리의 장군 개미가 스스로 내가 깔아 둔 덫을 향해 발을 내디뎌줬으니.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게 된 상황이 아닌가.
조금 전 놈들의 전략이 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놈들은 결국 멍청한 개미일 뿐이다.
"갸아아아아!"
다섯 마리의 장군 개미가 전 방위에서 나를 둘러쌌고.
놈들이 나와 가까워질수록 전사 개미나 전투 개미들은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온전히 장군 개미들의 싸움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었겠지만.
'이렇게 고마울 데가.'
다시 한번 놈들의 선택은, 자신들을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돕는 꼴이 되었다.
파앗!
내가 몸을 날렸다.
나와 장군 개미의 사이를 가로막았던 개미들이 사라졌으니, 내 움직임은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휘익!
검을 휘둘렀다.
장군 개미가 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놈은 기묘하게 검로에서 몸을 벗어났다.
하지만 문제될 건 없다.
검이 아니면, 몸으로 공격하면 그만이다.
검을 바닥에 꽂아 넣었고.
검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검 대신 발을 휘두르며 장군 개미의 머리를 공격했다.
콰직! 쿠웅!
오우거의 신체로 증폭된 신체 능력.
내 발길질 한 번에 장군 개미의 머리통은 터져버렸다.
일격이다.
놈은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한 채로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그아아아!]
[갸아아아아!]
다급한 개미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의미 없는 발악이다.
파앗!
나는 다시 땅을 디디며 몸을 날렸다.
두 번째 장군 개미는 당황한 나머지 내 검을 피하지도 못했다.
오러 블레이드는 장군 개미의 몸뚱이를 너무도 가볍게 잘라냈다.
손끝에 무언가를 베어 냈다는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잘려나간 장군 개미의 몸뚱이는 너무도 매끄럽다.
'짜릿하군.'
오래 감탄할 만한 시간은 없다.
두 마리의 장군 개미가 눈 깜짝할 새 사망하니, 다른 장군 개미들도 이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모양이다.
뒤로 물러났던 개미들이 다시 나와 장군 개미 사이를 메우기 위해 달려들었다.
'놓치면 안 돼.'
반드시 여기에서 남은 세 마리를 찢어 버려야 한다.
지휘관의 외침을 다시 한번 사용했다.
콰아아앙!
나를 향해 달려들던 개미들이 나자빠졌고, 온몸이 박살났다.
장군 개미들 역시 마찬가지다.
안 그래도 당황해 있던 녀석들은 처음 맛본 지휘관의 외침의 충격에 몸에 경련을 일으키거나 자빠졌다.
자빠진 녀석의 뒤통수에 검을 박아 넣었다.
검을 뽑아내기 무섭게 바로 다른 한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다.
이미 초감각을 활용하여 장군 개미들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놓은 상태니까.
놈들이 어떻게 움직여도 나는 놈들의 움직임과 위치를 정확히 포착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초감각의 진정한 힘.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부우웅!
콰직!
다른 한 녀석의 장군 개미를 짓밟았다.
이것 역시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놈들은 더욱더 다급해졌다.
남은 한 마리의 장군 개미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필사적이군.'
장군 개미는 전사 개미들의 도움으로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부하들을 방패막이로 삼고 달아나고 있다는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는 건지.
녀석 역시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지만.
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장군 개미의 위치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잘 가라.'
콰아앙!
나는 바닥을 딛고 도약했다.
날아 오른 것처럼 단숨에 하늘 위로 치솟은 나의 몸.
개미들은 다급하게 내가 있는 곳으로 자신들이 들고 있던 장비를 집어 던지기까지 했다.
처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쐐애애액!
나는 장군 개미의 뒤통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갸아아아아아!"
내 기척을 느낀 장군 개미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파직!
오러 블레이드는 녀석의 등을 베어 버렸다.
쿵!
두 쪽으로 갈라진 장군 개미의 몸뚱이는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어.
"키이이이익!"
"케에에에에!"
순식간에 다섯의 장군 개미를 잃은 사자 개미들은 큰 혼란에 빠져 버렸다.
장군 개미를 쓰러트렸다고 해서 안심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나는 순차적으로 지휘관 개미를 썰어 버렸고.
지휘관 개미마저 모두 쓰러트렸을 때.
'난장판이로군.'
모든 지휘 체계를 상실한 사자 개미들은 전열을 잃었고, 혼란에 빠져 날뛰기 시작했다.
놈들의 공명은 허공에서 뒤얽혔고 심지어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까지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 장군 개미를 최대한 처치해도 괜찮겠어.'
싸움을 시작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섯의 장군 개미를 처치했으니.
삼 일에 걸쳐 있던 내 작전을 하루 정도 단축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섯, 일곱이라는 한계는 지웠다.
어쩌면 열 마리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테니까.'
우선은 이곳에서 벗어나자.
어차피 말단 개미는 아무리 처치해도 큰 의미가 없다.
저런 녀석들의 숫자는 끊임없이 채워질 수 있으니까.
나는 아비규환이 펼쳐진 전장을 벗어났다.
먼 곳에서 지켜본 풍경은 말 그대로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풀썩
전장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솟아 오른 바위.
그 위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만 해도 사자 개미들이 삼엄하게 경계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놈들의 지휘 체계가 크게 망가졌기 때문이리라.
'자, 그러면 다음은 어디냐.'
나는 천천히 사자 개미들의 본진 전역을 살폈고.
'저기군.'
초감각의 레이더에 장군 개미가 포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