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콰직!
놈과 내가 부딪쳤다.
놈의 주먹은 내 왼쪽 어깨를 짓눌렀다.
말도 안 되는 괴력이다.
미스릴 갑옷을 뚫고서도 뼛속 깊은 충격을 가했을 정도로.
만약 이 갑옷과 아이언 바디가 아니었다면, 내 어깨는 가루가 되어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리라.
하지만.
파가가가각!
내가 더 빨랐고, 내가 더 강했다.
놈이 내 어깨를 공격했을 때, 이미 내 검은 놈의 전신을 가르고 지나간 뒤였으니까.
"거어어어어…!"
놈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이 놈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잠시 후 반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진 놈의 몸에서 역겨운 녹색 액체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오우거의 신체를 사용하길 잘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한 방으로는 끝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다시 한번 폭풍같은 혼란이 시작됐다.
장군 개미의 사망을 목격한 사자 개미들은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녀석들도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커다란 충격에 놈들의 신경망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잘 됐다.'
그렇다면 활로를 뚫어내는 게 훨씬 쉬워질 것이다.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이 한 방으로 사자 개미 내부에는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파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자리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것.
'그리고 이다음은….'
사자 개미들의 몰락이다.
파앗!
나는 몸을 날렸다.
간혹 앞을 가로 막는 용감한 머저리들도 있었지만 놈들은 단 1초도 나를 방해 할 수 없었고.
콰콰콰콰쾅!
전장을 휩쓰는 지휘관의 외침에 사자 개미들은 풍비박산이 난 채로 바닥을 나뒹굴기 일쑤였다.
***
"그, 그것이… 그것이 사실이오? 정녕… 그대의 말이 사실이란 말이오?"
여왕개미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기쁜 것도 기쁜 것이지만 그녀가 느끼고 있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인 모양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커다랗게 튀어 나온 턱만 뻐끔대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본진을 뒤집어엎은 것도 모자라… 장군 개미를 죽였다니."
"허어… 믿을 수가 없구나."
여왕개미뿐 아니라 모든 장군 개미들도 말도 채 잇지 못한 채로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떠오른 매시지.
[여왕개미가 플레이어 '한강민' 님의 업적에 크게 탄복합니다.]
[진행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개미굴 클리어 진행도 : 34%]
34퍼센트라니.
지난 12퍼센트에서 한 번에 20퍼센트가 상승한 수치다.
이건 내가 확신하건대, 그동안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경이적인 수치다.
'이제 50퍼센트 까지는 코앞이다.'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한 번, 혹은 두 번만 더 사자 개미를 들쑤시고 오면 50퍼센트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두 번은 없다.'
한 번.
앞으로 한 번으로 곧바로 50%의 진행도를 달성하여 마을로 갈 생각이다.
'마을에서 할 일들이 많으니까.'
마법 명가와 1회용 상점까지.
그것들을 떠나서도 현재 대한민국 탑의 전반적인 상황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할 생각이다.
어쨌든 나는 다시 개미들을 바라봤다.
"자. 나는 내 말대로 내가 할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녀석들은 아무 말도 없다.
다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제는 나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장군 개미도 없는 모양이고.
"그러면 너희도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저 녀석들이 해야 할 일.
그건 간단하다.
"앞으로 한 시간 단위로 사자 개미들의 상황을 내게 보고해라.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도 해야겠지."
"다음 단계라면…?"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가 있겠어. 칼날 개미지."
"카, 칼날 개미는…."
"아직 칼날 개미를 치기에는 사자 개미도 건재하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저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지금 칼날 개미를 치는 건 시기상조.
하지만.
"미리미리 준비를 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녀석들의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사자 개미를 쳐부순다.
사자 개미들을 쳐부순 뒤에는 어떤 딜레이도 없이 칼날 개미를 치는 것이다.
속전속결.
녀석들에게 이 상황을 준비할 만한 일말의 여유조차 줘서는 안 될 것이다.
"내 말 알아 들었으면 빨리 움직였으면 좋겠군."
"아, 알겠소!"
"지금 당장 수색 개미들을 파견해서 놈들의 정황을 살피겠소!"
개미들의 움직임이 꽤나 빨라졌다.
놈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며 나는 여왕개미의 눈을 바라봤다.
"……."
여왕개미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
사자 개미의 진영.
"뭐라! 우리를 공격한 인간이 무사히 빠져 나가도록 놔뒀다는 말이야?"
사자 개미들의 여왕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게다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이 하나 더 전해졌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떠났던 장군 개미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더 큰 충격에 몰아넣은 것은.
"일격에 당했다고? 지금 그 말을 내가 믿으라는 것인가? 너희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여왕개미는 도저히 들려온 보고를 믿을 수 없었다.
그 말을 대체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수천에 가까운 개미들에 둘러싸인 상태에서 장군 개미를 일격에 격파하고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은 채 무사히 빠져나갔다?
"내게 거짓을 보고한 저들의 목을 베어라!"
"여, 여왕님!"
"지, 진정하십시오! 거짓이 아닙니다! 일말의 거짓도 없는 사실…!"
보고를 마친 전투 개미들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그들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눈으로 본 것을 보고했을 뿐인데, 거짓이라며 죽을 위기에 놓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여왕을 설득할 수 없었고.
콰직! 콰앙!
장군 개미의 주먹질 한 번에 그들의 머리통이 으깨졌다.
풀썩
머리가 터져버린 개미들의 몸이 바닥에 힘없이 고꾸라졌다.
"……."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여왕개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여왕님."
"…."
아무리 여왕을 불러도 여왕은 입을 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현재 계속되는 전쟁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다.
현재 칼날 개미의 밑으로 들어가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고는 있기는 하다.
그것 역시 칼날 개미가 사자 개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자 개미, 호랑 개미, 거북 개미가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그 셋의 사이를 갈라놓는 작업일 뿐이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칼날 개미와 솔져 개미가 전쟁을 하고 있기에, 칼날 개미는 사자 개미를 자신들 밑에 두고 있는 것뿐이다.
'칼날 개미가 솔져 개미를 격파하고 전장의 균형이 뒤틀리기 시작하면 우리 역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당연한 수순이다.
솔져 개미가 무너지고 난다면 칼날 개미가 신경 쓸 세력은 거북 개미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칼날 개미들에게 사자 개미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될 테고.
언제 짓밟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테니까.
'그전까지 최대한 우리의 세력을 키워야 하건만.'
갑자기 나타난 변수에 의해서 사자 개미의 세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력을 키우기는커녕, 혼란이 가중되어 버린 것이다.
'어찌해야 하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뾰족한 수를 생각해 내기 위해 바쁘게 머리를 굴렸지만.
어떤 방도도 떠오르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자신들을 공격한 세력이 누구인지 갈피조차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칼날 개미가 승기를 예측하고 벌써 우리를 쳐내려는 것인가?'
그것 역시 가능성이 있다.
아직 솔져 개미와의 싸움이 한창이라고는 하지만, 점점 칼날 개미가 승기를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아니라면 칼날 개미를 견제하기 위한 솔져 개미의 소행일 지도 모른다.'
이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심지어 거북 개미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거북 개미 역시 칼날 개미와 솔져 개미의 틈바구니 안에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이런 저런 가능성을 열어두고 바쁘게 상황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용의 선상에 오르지 못한 유일한 세력은 호랑 개미다.
'놈들은 우리를 공격할 여유도, 힘도 없다. 인간이 우리를 공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어떤 정신 나간 모험가가 호랑 개미의 편에 서겠느냐는 말이다.'
그 순간 여왕개미의 눈이 번뜩였다.
"호랑 개미와 접촉하라."
그 말에 모여 있던 장군 개미들이 놀란 모습으로 여왕개미를 바라봤다.
"호랑 개미와 말입니까? 그 녀석들과 우리의 관계는 최악입니다."
물론 다른 개미들도 마찬가지지만 호랑 개미와는 그중에서도 최악이지 않던가.
"어쩔 수 없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호랑 개미와 접촉하는 것뿐이야."
여왕개미의 뜻은 확고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 영원한 동료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은 그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
맞는 말이다.
장군 개미들은 여왕개미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 그자들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생각인 겁니까."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칼날 개미가 우리와 그 두 세력을 떼어 놓은 것도 우리와 그들의 힘이 합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으니까."
그 말이 사실이다.
전투력으로는 호랑 개미와 사자 개미도 어떤 세력이 지지 않는다.
게다가 합동 전투에 능한 사자 개미와 개인 전투에 능한 호랑 개미가 힘을 합친다면.
다른 어떤 세력에게도 결코 꿀리지 않을 강한 세력이 탄생하게 되리라.
"하지만 칼날 개미에게는 이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비밀리에 그들과 접촉하여 협상을 이끌어 내야 할 것이야."
여왕개미의 눈이 번뜩였다.
호랑 개미와의 협상만을 잘 이끌어 낸다면, 칼날 개미나 솔져 개미에게는 부족하겠지만.
"거북 개미 정도는 단숨에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장군 개미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엄청난 위험을 끌어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누가 가겠는가."
여왕개미가 장군 개미들을 돌아봤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지명하기보단 스스로 자원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척
"제가 가겠습니다."
장군 개미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여왕개미 역시 그를 본 순간 믿음직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 너라면 충분히 이 협상을 올바르게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서 전투력은 조금 떨이지지만 상황 파악 능력과 처세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참모였다.
게다가 기척을 숨기고 은밀하게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는 모든 개미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여왕도 충분히 그를 신뢰할 수 있었다.
"명심하도록. 그대의 판단과 행동에 우리의 장래가 걸려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장군 개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호랑 개미들이 있는 반군 아지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현재 사자 개미를 주시하고 있는 그 어떤 세력에게도 이 정보는 흘러나가지 않았다.
심지어는 강민의 명을 받고 있는 호랑 개미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