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우웅! 우우웅!
'일개미.'
지금 우리 앞을 가로막은 건 일개미다.
메시지의 안내 그대로 일개미는 특유의 공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다른 파티원들은 저게 일개미인지, 병정개미인지 알 리가 없다.
처음 만나는 일개미의 공명을 구분할 능력도 없을 뿐더러.
혼란이 가득한 상황에서 일개미의 공명을 듣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일개미의 공명도 정확히 구분해 냈다.
그뿐만 아니라 초감각 덕분에 녀석의 모습이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반갑군.'
나도 전생에서는 일개미를 처음 마주하고 크게 당황했었다.
일개미의 크기는 대략 1.5미터에 이른다.
말이 개미일 뿐.
실제로 1미터가 넘는 개미를 보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으니까.
"무슨 일인가요?"
"개, 개미가 나타났어요? 어디? 어디 있는 거죠?"
플레이어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용!"
내가 외쳤다.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고 녀석의 공명을 느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여기에서 그 누구도 당신들을 지켜줄 수는 없을 겁니다."
내 말에 플레이어들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에도 여기저기서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적을 마주했으니 저들의 동요는 사실 당연한 일이다.
저벅
나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일개미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럴수록 공명은 더욱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수는 다섯.'
화륵!
오러 블레이드를 시전했다.
그제야 어두운 개미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생겨났다.
검을 앞으로 치켜드니 일개미의 모습이 보였다.
"끼야아아아악!"
"허, 허어어어억!"
"괴물, 괴물이다!"
플레이어들이 기겁했다.
그만큼 일개미의 모습의 첫인상이 충격적이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때.
"여러분! 조용히 하셔야 합니다요오오!"
몰른이 소리쳤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항상 호들갑 떨던 몰른이 오히려 침착하게 플레이어들을 다독이는 상황이라니.
아무튼 확실한 건, 지금 저들에게는 어떤 전투 능력도 없다.
사실 개미굴에 처음 입장한 대부분이 그렇다.
클리어 조건이 '생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떻게 해서든 개미의 공명을 구분해내고, 몸으로 부딪치며 뚫어내야 하는 것.
서걱!
우우우웅!
[마력 1을 포식했습니다.]
서거걱!
우웅!
[힘 1.2를 포식했습니다.]
콰직!
[힘 0.96을 포식했습니다.]
.
.
.
나는 개미들을 하나씩 베어 넘겼다.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일개미.
생긴 것과는 다르게 딱히 이렇다 할 전투 능력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
고작 해봐야 커다란 입으로 깨무는 정도.
'물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공격당한다면 그것도 치명적이겠지만.'
초감각으로 놈들의 위치와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내게는 지구에서 만나는 개미와도 다를 바 없는 상대일 뿐이다.
'초감각. 훌륭한 능력이다.'
내가 말했다시피, 초감각 하나만 있으면 개미굴의 난이도는 급격히 낮아진다.
이게 바로 그 결과다.
지옥의 길에서 끔찍한 고통을 느꼈던 보상이 꿀 같은 보상이 되어 돌아 와준 순간이다.
우리 앞을 가로막았던 개미들을 순식간에 베어냈다.
아직도 플레이어들은 어안이 벙벙한 것 같아 보였지만.
우선은 나의 존재에 크게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눈치가 있는 이들은 일개미가 그렇게 무서운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눈치 챈 모양이다.
"여러분! 강민 씨 말대로 해 봅시다. 강민 씨 말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잖아요."
"맞아. 맞아요! 집중해 봐요. 아까 제가 우우웅~ 이런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어, 저도요! 저 개미가 냈던 소리 맞죠?"
"예. 맞을 겁니다."
플레이어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주 작은 소리다.
이제 그들도 조금씩 개미굴에 적응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일 테다.
그리고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파티원들은 일개미의 공명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물론 고작 '일개미가 앞에 있다,' 라는 사실을 알아챌 정도의 아주 초보적인 수준일 뿐이지만.
그 사실로도 플레이어들은 감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가 성정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만큼 기쁜 일도 그리 많지 않지.
'적어도 당분간 나를 방해할 일은 없겠어.'
만약 시간이 흘렀음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게 된다면 나도 꽤 골치 아프게 될 것이다.
지금이야 개미굴의 초입이기 때문에 개미의 수가 많지 않지만.
개미굴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며 개미의 수가 많아진다면.
그리고 일개미가 아닌, 전투에 능한 병정개미나 전투 개미들까지 등장하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에는 저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테지.'
일개미는 그저 튜토리얼에 불과하다.
전투개미와 병정개미 수십 마리가 한 번에 몰려드는 상황이 발생하면 나는 미련 없이 저들을 버리고 떠날 생각이다.
물론 이대로만 해 준다면, 그런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우선은 이 정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인 것도 사실이다.
***
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슬슬 일개미가 아닌 병정개미가 등장하는 시점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어어억!"
"조, 조용히 해 봐요!"
"이, 이상한 소리 들려요! 그, 그… 서 있는 개미 그 소리! 끼야아아악!"
병정개미의 공명 소리는 플레이어들을 다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우우웅, 하며 나름 잔잔한 일개미의 공명과는 다르게 병정개미의 공명 소리는 인간에게 공포를 일깨우는 '초저주파'와 굉장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떠나서도 병정개미의 모습 역시 꽤 충격적이다.
플레이어의 말대로 두 발로 서 있는 개미.
그리고 양손에는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양새였으니.
게다가 병정개미의 습격을 받은 플레이어는 혼비백산하기 일쑤였다.
이렇다할 공격 능력이 없는 일개미와는 달리, 병정개미는 전투를 위해 태어난 존재였으니까.
병정개미의 등장.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고함.
다시 몰려드는 병정개미.
그런 일이 몇 번 반복 되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다.'
방금 막 전투가 끝나고 난 뒤, 나는 플레이어들을 불러 모았다.
"……."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시간을 주겠습니다."
플레이어들을 향해 내가 말했다.
지금 당장 저들을 버릴 수는 없다.
어쨌든 나 역시 저들에게 도움을 받은 입장이다.
골렘의 사원에서 파티원들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아직 개미굴에 입장할 수 없었을 테니까.
받은 게 있다면, 분명 주는 것도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런 이유를 떠나서도 괜히 플레이어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전생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나는 저들에게 조금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저들을 참아 줄 수는 없다.
내가 위험해지는 상황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 할 테니까.
"시, 시간…? 시간이요?"
"앞으로 한 시간. 한 시간 동안 병정개미에 대해서 완벽히 파악해야 합니다."
한 시간.
내가 한 시간을 유예로 준 이유는 본격적으로 전투 개미가 등장하기 시작할 시적이 그때부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와 같은 혼란이 반복되면…."
꿀꺽
내가 말끝을 흐리자 긴장감이 크게 맴돌았다.
저들도 분명 알고 있으리라.
지금껏 사망자는커녕 부상자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9할 이상이 내 덕분이라는 사실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내게 짐덩이일 뿐입니다."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매한 희망의 말을 전하거나, 알량한 동정심으로 따듯한 위로 따위 건네 봐야 달라질 건 없다.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주고.
조금이라도 절박한 심정을 심어 주는 편이 저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몸을 돌렸다.
저들 역시 대답은 없었지만 분위기는 조금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호들갑은 사라졌다.
공격을 당해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대응하기 시작했으며.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했던 한 시간이 됐을 때.
'훌륭하군.'
저들은 더 이상 어떤 동요도 없이 닥쳐오는 개미들에게 완벽하게 대응하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역시 강하게 키우는 게 맞아.'
나는 그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앞쪽에 일개미 무리, 그리고 우측에서 병정개미로 추정되는 무리! 오른쪽은… 전투 개미입니다!"
이제는 내가 지시하지 않아도 저들끼리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잘 자라 줬어. 그리고 이제는 내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을 차례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받은 것이 있으면 응당 받은 만큼 보답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저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명백한 사실이다.
전생에서조차 개미굴에 완전히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소 1주, 혹은 2주.
느리면 한 달의 시간이 필요했을 정도다.
'그걸 하루도 안 돼 마스터하게 해준 건, 내 공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지.'
요컨대 저들은 한강민이라는 참스승을 만났고.
그 덕에 상상도 못 할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잠시 주목."
나는 다시 파티원들을 불러 모았다.
마침 한 번 전투가 끝난 참이었고.
파티원들은 처음과는 달리 조금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내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두운 개미굴에서도 어렵지 않게 내 위치를 찾아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죠?"
"혹시 저희가 뭐 잘못한 거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조금 더 노력할게요. 제발 버리지만은 말…."
"그런 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부터 전투는 내가 하겠습니다."
"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파티원들.
그리고 내가 자신들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그래 주시면 저희는 편하겠지만…. 조금 죄송한 것 같아서요. 부족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래요. 강민 씨. 정말 열심히 할게요. 시키시는 거 다 할 테니까…."
시키는 걸 다 하겠다니.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물론 여러분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처치한 개미들의 등껍질. 그것들을 잘 떼서 저에게 주시면 됩니다."
"……?"
"등…껍질…이요?"
"예. 내가 부탁할 일은 그거 하납니다."
개미굴에서 등장하는 개미의 등껍질.
이 시점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시나 훌륭한 재료 아이템이다.
특히 방어구를 만드는 데 있어서 탁월한 재료 아이템이었으니.
훌륭한 재료는 맞지만, 지금 내게는 필요 없다.
나에게는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방어구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돈이 될 만한 정보를 알고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일.
그것 역시 미래에서 과거로 온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투기장에서 벌어 뒀던 돈이 많이 떨어졌던 참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다시 자금을 좀 쌓아 둘 필요도 있다.
그리고 지금 이 타이밍에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 둬야 할 이유가 있다.
'35층의 마을. 처음 35층에 존재하는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열리는 1회용 상점.'
일종의 탑이 주는 깜짝 선물이다.
물론 나는 그동안 큰 어려움 없이 탑을 올랐지만, 평범한 플레이어들이 35층까지 오르는 데까지는 죽을 고비를 수십, 수백 번을 넘어야 한다.
그렇게 35층까지 죽을힘을 다해 오른 플레이어들을 위한 선물.
'1회용 상점에서 파는 물건은, 결코 35층에서 구할 수 있는 수준의 아이템이 아니지.'
비밀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은 가성비의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당연히 고가의 아이템도 존재한다.
수십만, 혹은 백만 골드에 육박하는 아이템까지.
그런 아이템의 성능은 어떻겠는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전생에서는 고작 몇 만 골드짜리 아이템을 구매하는 데 그쳤다.
그게 나의 최선이었으니까.
문제는 1회용 상점이라는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기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천금 같은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순 없다,
"갑시다."
내가 말했고.
플레이어들은 조금은 어리둥절한 채로 내 뒤를 따랐다.
"처음엔 쉽지 않을 테니 천천히 해 봅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 질 겁니다."
기브 앤 테이크.
나는 저들에게 생명을 줬으니, 저들은 내게 돈을 벌어다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