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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태창이 달라졌다-74화 (74/277)

74화

완전한 적막이다.

이 순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감각 기관은 눈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소리도, 냄새도, 내가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눈으로 내가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매 순간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으며.

그럴수록 누적되는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거다.'

골렘의 움직임, 그리고 공격 특성, 나의 싸움 방식.

내 근육과 신경 세포들이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고, 반응했다.

하지만 간혹 위험한 상황도 벌어졌다.

상처를 입었음에도 내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했다.

상처를 인지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눈으로 보였을 경우나, 내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

'미칠 노릇이군.'

그나마 희망적인 한 가지는 이제 대신전의 중앙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이 속도라면 앞으로 한 시간이면 중앙부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배를 채우는 것도, 물약을 마시는 행위도 극도로 절제했다.

그런 시간조차 아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 말고도 감각 기관이 마비된 채 무언가 마신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끔찍한 경험이다.

'전생의 플레이어들이 지옥의 길을 극도로 말리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말을 무시했었다.

내가 지옥의 길을 선택하기 바로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자신들만 꿀을 빨기 위해서라거나, 아니면 스스로의 업적을 과장하려는 마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게 아니었어.'

진심이었을 거다.

그들이 했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개중에는 겨우 살아남은 다음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탑 오르기를 포기해 버린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아니면 몇 년을 앓아눕거나.

'엿같군.'

진심이다.

우주 한복판에서, 혹은 깊은 바닷가에서 나 홀로 발버둥치는 느낌이다.

'이제는 더 여유가 없다.'

남은 4단계.

시야 마비.

그때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중앙부까지도 그리 멀지 않았지만, 문제는 내 속도가 급격하게 느려졌다는 거다.

이전이라면 10초가 걸릴 길도 10분은 족히 걸리게 되었으니.

'그래도 견뎌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악착같이, 또 이를 악물고 골렘을 쓰러트렸고.

한 걸음, 한 걸음 처절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야.'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느낌이었다.

한 걸음 앞의 상황도 예측할 수 없었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매 순간 가슴 졸여야만 했으니까.

다시 살아난 이후로 죽음이라는 단어는 내게 멀고 먼 단어가 된 줄 알았건만.

어느새 죽음이 내 바로 등 뒤에 다가와서 손을 뻗고 있는 기분이다.

다시 물약을 하나 꺼내 삼켰다.

역겨운 액체가 목을 넘어 배를 채운다.

아찔하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쯤 되니 정말 내가 살아 있는 건 맞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죽었고, 간절하던 의식만이 남아 동굴을 떠돌아다니는 건 아닌지.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구천을 떠도는 내 의식이 만들어 내는 환상은 아닌지.

모든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하며 내가 인식하는 것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만 더 이 상태에 머무른다면 정말 정신병이라도 걸려 버릴지도 모르겠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미리 나는 최대한 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 정도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 닥쳐 올 무수한 위험에 비하자면, 이 정도는 어려움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다.

그렇게 나아가고 또 나아가고 있을 때.

'…….'

저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골렘 대신전의 중앙부.

거대한 석탑과 골렘의 생명석이 빼곡히 자리를 메우고 있는 중앙부.

내가 전생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이나마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다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또 한 걸음.

눈앞에 보이는 골렘의 몸이 갈라진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시선을 돌렸고, 몸을 떠는 몰른이 보인다.

그 골렘을 베어냈고, 다시 물약을 상처에 뿌렸다.

다리가 다시 작동한다.

그리고 또 나아갔다.

다시, 다시, 또다시.

그렇게 대신전의 중앙부를 몇 걸음 남겼을 그때.

'…….'

시야가 어두워졌다.

[골렘화 4단계가 진행됩니다.]

[플레이어 한강민의 시야가 마비됩니다.]

숨이 턱 막혀온다.

온몸이 굳었다.

'젠장.'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내 뒤에 몰른이 있다면 몰른에게 외치면 될 것인데.

나를 밀라고.

아니, 내 손을 잡고 저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어둠에 사로잡힌 나머지 입조차 뻥긋할 수 없었다.

완전한 어둠.

그리고 완전한 공허.

숨조차 쉬어지질 않는다.

방향감각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중심부가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아니라면.

그래서 내가 내딛는 이 한 걸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를 향하게 한다면.

그래서 내 목적지가 아닌, 죽음으로 이끌게 된다면.

'그래도.'

선택지는 없다.

나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분명 중앙부를 향해 서 있었고, 그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내 머리에 담겼던 마지막 순간의 정보.

나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내 행동과 선택에 대한 확신.

걸었다.

아니, 정확히는 걸었다고 생각했고.

다시 한 걸음 더 내디뎠다고 믿었다.

내가 중앙부를 향해 가고 있다고 확신했고.

반복했다.

믿고 또 믿으며 바라고 또 바라며 그 행위를 몇 번 반복했을 때.

쿵!

무언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프다.

떨어진 건, 무언가가 아니라 내 몸뚱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주인님! 주인이이이이이임!"

몰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얼굴에, 손에, 그리고 온몸에 달라붙은 돌조각과 모래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리고 통증이 몰아쳤다.

팔에서, 다리에서, 복부에서, 또 내 온몸에서.

"끄으으읍!"

신음을 내뱉었다.

아프지만 그 아픔이 반가운 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건 바로 이것이다.

[골렘 대신전의 중앙부에 도착했습니다.]

[30층의 첫 번째 클리어 조건을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탑의 저주를 극복했습니다.]

[업적 '인간의 한계'를 달성했습니다.]

[플레이어 '한강민'에게 업적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나는 해냈고.

"아파 뒈지겠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한숨 돌렸다.

그동안 나름 포션을 통해 상처를 치유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벌어지고 있는 상처들이 너무 많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불구가 됐을지도 모르겠군.'

그만큼 내 몸의 상태는 처참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시각이 마비된 뒤로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대신전의 중앙으로 밀었던 것이 바로 골렘이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내 등에는 커다란 상처가 생겨났지만, 역설적이게도 놈이 나를 살린 셈이기도 했다.

'어쨌든 드디어 끝났어.'

지옥의 길을 돌파했다.

그리고 지금 내게 업적의 보상으로 주어진 건.

[초감각]

>등급 : A

>마력을 이용해 주변을 탐색할 수 있다.

유용한 스킬이다.

특히 나와 같이 혼자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보이지 않는 적을 탐색해 낼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스킬의 유무가 31층부터 40층의 난이도를 극도로 줄여줄 수 있다는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이런 험난한 지옥의 길을 택하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이 짧은 고통을 감내해 내고 앞으로 10개 층의 난이도를 확 줄일 수 있었다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하다만.'

그거면 됐다.

무어가 더 필요하랴.

대충 상처를 다 치료했다.

하지만 여전히 물약 과복용의 후유증은 남아 있었다.

당장 전투를 치를 일이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을 메우고 있는 골렘의 생명석과 한가운데에 잠들어있는 거대한 수정체.

'저게 바로 태고의 골렘.'

저것을 부숴야 30층을 클리어할 수 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클리어 조건 2단계 : 태고의 골렘이 잠들어 있는 수정체를 파괴하고 태고의 골렘을 무찌르라.]

>조건 : 최소 2개의 파티가 모여야 함.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내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1위로 대신전의 중앙부에 도착했습니다.]

[마음이 맞는 파티 하나를 지금 즉시 소환할 수 있습니다.]

[2개의 파티가 모인 순간부터 태고의 골렘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도착 순서는 30층의 클리어 조건과도 관련된다.

만약 먼저 도착한 파티가 태고의 골렘을 처치할 때까지 중앙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남은 이들은 그 어떤 보상도 얻지 못한 채 다음 층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게 어디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테지만.

남들은 당연히 받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도태되기 마련이고.

탑에서 도태된다는 건, 결국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였으니.

'지금쯤 30층 어디선가 개짓거리를 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당연히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할 거다.'

그리고 동시에 내 눈앞에 소환 가능한 파티 목록이 떠올랐다.

그중에 내 눈을 사로잡는 건, 내가 처음 파티를 맺었던 이들이다.

용사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그대로 파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람들로 하면 되겠지.'

그들의 우정을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어차피 누군가를 소환해야 다음 스테이지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고.

기왕이면 익숙한 사람들이 편하기 때문이다.

[선택하신 파티를 소환하시겠습니까?]

"소환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잠시 후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플레이어 '한강민' 님이 소환을 요청한 파티원들에게 소환 의사를 묻고 있습니다.]

[파티원 전부가 소환에 응했습니다.]

[플레이어 '한강민'님이 소환을 요청한 파티가 소환됩니다.]

그렇게 잠시 후.

"뭐지? 소환?"

"이게 무슨 일이죠?"

"갑자기 소환이라니?"

소환된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제대로 상황이 파악이 안 된 건지 이런저런 말들을 떠들고 있는 파티원들.

그리고 한 명이 나를 발견했다.

"허, 헉!"

"강민 씨!"

"뭐? 강민 씨라고? 허어억!"

"뭐, 뭐야! 어떻게 강민 씨가 여기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그 파티가… 강민 씨였어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파티원들.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다들 온 것 같으니 바로 시작해도 괜찮겠습니까."

"……."

"진짜 뭐 하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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