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게 뭐야!"
"자, 잠깐만요! 그,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래야 탑이지.
잠시 평화로움을 느꼈다지만, 그것 역시나 잠시 뿐의 춘몽일 뿐이다.
결국 탑이 원하는 건 화합과 평화가 아니라, 싸움과 갈등이니까.
싸우고, 짓밟고 올라서야 강해질 수 있는 곳.
그것이 바로 탑의 본질이다.
메시지는 그게 끝이 아니다.
[용사 선택이 끝난 뒤, 파티장의 파티원 구성이 시작됩니다.]
[파티장은 높은 순위의 플레이어부터 순차적으로 임명 됩니다.]
[파티장에게는 파티원을 재구성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됩니다.]
그 말인 즉.
하위의 플레이어들이 용사를 선택한 뒤.
상위 플레이어들이 다시 파티를 구성할 수 있다는 뜻.
본격적인 심리적이 시작되는 것.
상위 플레이어들은 용사를 보유한 하위 플레이어들을 선택할 지, 용사 없이 플레이어들을 선택할 지 갈등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더 좋은 파티에 속하기 위해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골머리를 싸매야 할 테고.
플레이어들이 다급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순위 목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가장 안도하는 건, 당연히 상위 다섯 명에 속한 이들이었고, 동시에 하위에서 다섯에 속한 이들이었다.
'좋아. 내 순위가 높으니까 나는 분명히 파티장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용사를 선택한 사람을 내가 선택하면…!'
'X발. 순위 낮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용사만 선택하면 적어도 파티를 못 구할 일은 없다는 거잖아!'
이런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으리라.
용사와 용사의 무리와 함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30층을 클리어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요소로 작용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용사 파티의 선택권이 주어진 하위 다섯 명.
그들이 어쩌면 이 순간에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일 지도 모른다.
[5분 후 파티원 구성이 시작됩니다.]
[한 파티의 최대 정원은 13명입니다.]
[파티의 정원에는 용사와 용사의 파티도 포함됩니다.]
이것이 바로 큰 문제다.
용사를 택한다면, 이전의 파티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테고.
플레이어를 택하자니 용사라는 큰 전력을 포기해야만 했다.
게다가 최대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파티 역시도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덕분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복잡한 수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가장 먼저 하위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에게 용사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하위 다섯의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와 동시에 용사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보여줬던 용사의 전투력과, 또 용사 파티에 속한 이들의 전투력을 비교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상위 네 명.
그들 역시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
"하아…."
"저, 저… 우리 아까 함께 같이 잘해 보자고…."
"…."
선택권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이들은 오히려 더 분주해졌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어필하고 그나마 더 나은 파티에 속하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 조금 전 나누던 전우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냉혹한 현실이 그들을 뒤덮었고, 싸늘한 적막만이 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안타깝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개중에는 처음 만났던 파티원들끼리 다시 뭉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특히 내가 속했던 파티의 리더는 처음의 파티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기존의 파티원들과 그대로 가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파티원들도 그쪽에 동의했다.
그들 모두가 나름 상위권에 속해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이미 오랫동안 합을 맞춰 왔던 만큼, 어쩌면 생존하고 탑을 돌파하기 위해 가장 탁월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5분이 지났다.
[용사 선택 권한이 주어집니다.]
[76위의 플레이어님은 용사를 선택해 주십시오.]
그렇게 한 명, 또 한 명.
플레이어들이 용사를 선택했다.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선택을 끝마쳤다.
그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쾌재를 내질렀다.
자신은 버려질 리 없다는 안도와 확신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런 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플레이어들의 눈빛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렇게 용사를 골라낸 하위 다섯의 플레이어들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몇몇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마냥 건들거리기까지 했다.
네가 나를 안 뽑고 버틸 수 있겠어? 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때였다.
"강민 씨."
누군가 내 이름을 외쳤다.
76위였던 플레이어다.
당연하게도 그는 용사 중 가장 강한 용사를 택했다.
"저를 뽑으시죠."
당당한 어투다.
그 말에 용사를 택한 다른 이들도 다급해졌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더 분위기에 취해갔다.
'조금 우습네.'
76위, 혹은 75위.
고작 해봐야 72위다.
그게 어떤 의미겠는가.
이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것.
혹은 가장 대충 싸웠다는 것.
그런데 고작 용사를 선택할 선택권이 생겼다는 이유로 갑작스럽게 변해 버리는 태도라니.
잠시 내가 속했던 파티의 리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묶어 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고마웠습니다."
그가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다음 층에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말뿐이라도 감사합니다."
의미 없는 위로는 아니다.
이것 역시 충분히 진심이다.
오래는 아니었지만, 그와 파티원들의 활약상은 내가 충분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진심입니다. 적어도 당신들은 30층 아래에서 죽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때 내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1위 플레이어 '한강민'에게 파티원 구성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강민 씨?"
76위의 플레이어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지만.
"선택하지 않겠다."
"……?!"
"자, 잠깐만요!"
"그게 뭐, 무슨!"
[1위 플레이어 '한강민' 님이 파티 구성을 포기했습니다.]
[곧바로 30층에 입장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30층에 진입할 시, 골렘의 사원 파티 구성권은 영구적으로 사라집니다.]
[30층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물론."
그와 함께 내 몸이 빛무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강민, 강민 씨!"
"미, 미쳤어!"
플레이어들의 다급한 음성을 뒤로하고, 내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
잠시 후.
나는 새로운 공간에 몰른과 함께 서 있었다.
[30층에 입장했습니다]
[플레이어 '한강민' 님이 30층 '골렘 대신전' 내부 임의의 장소로 전송되었습니다.]
[30층 골렘 대신전]
[현재 입장한 파티의 수 1]
[골렘들의 우두머리, '태고의 골렘'이 잠들어 있는 대신전입니다. 태고의 골렘이 다시 눈을 뜬다면, 인간 세계는 큰 위협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태고의 골렘이 잠들어 있는 골렘 대신전의 중앙부로 향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1. 골렘 대신전의 중앙부로 향하라
2. ???
"다 없어졌요오!"
몰른이 소리쳤다.
조금 전만 해도 바글대던 모두가 사라졌으니, 당황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냉정해져야 한다.
"긴장해라, 몰른."
내가 몰른에게 말했다.
어떤 파티에도 속하지 않은 건, 당연히 이유가 있다.
허세를 부린 것도, 76위의 플레이어가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런 감정 하나 주체 못 할 멍청이는 아니지.'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그쪽이 탑을 오르는 데 유리했다면, 그를 선택했으리라.
'골렘 대신전.'
이곳에 내가 혼자 와야 했던 이유는 하나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독식하기 위해서.
조금 전 메시지에 떠올랐듯 우선은 골렘 대신전의 중앙부로 향해야 한다.
다른 파티들도 조금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어차피 모두 대신전에서 만나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단순히 중앙부에 도착하는 게 아니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혼자를 택한 가장 큰 이유다.
'당연히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때.
두 가지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중앙부로 향하는 루트를 선택해 주십시오.]
[1. 고난의 길]
[2. 인내의 길]
30층에 올라선 파티들은 시스템이 안내하는 루트를 따라 중앙부로 향할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안내하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길지만 편안한 길.
또 다른 하나는 짧지만 험난한 길.
당연히 나는 시스템의 안내를 따를 생각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지름길은 짧지만, 무엇보다 험난한 길이다.
그럼에도 선택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확신이 없다면 누구도 택할 수 없는 길이다.
나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경로를 선택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메시지가 떠오른다.
역시나 무시했고.
[경로를 선택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메시지가 떠오른다.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히든 루트, 지옥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당신 앞에 상상도 못 할 고난과 인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고난과 인내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태고의 골렘을 위한 제물이 되어 영혼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경고 메시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지워 버렸다.
이미 알고 있는 메시지였으니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그리고 저런 경고 따위에 기가 죽었을 것이라면 애당초 마법 명가를 적으로 두는 행위 따위는 하지도 않았으리라.
'와 봐라. 역경이고 고난이고. 다 뚫어 줄 테니까.'
그저 입꼬리를 비틀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잠시 후.
위잉!
투명한 막 하나를 지나갔을 무렵.
[지옥의 길에 입성했습니다.]
지옥의 길.
말 대로 초고난이도를 자랑하는 무척이나 짧은 길이다.
전생에서도 널리 알려진 길이었다.
초고속으로 30층을 클리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지옥의 길을 택하는 플레이어는 극소수.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었지만, 분명 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부 명가의 플레이어, 혹은 탑에서 난다 긴다 하는 녀석들이었지.'
그럼에도 생존율은 50% 이하.
지금 내가 택한 길은 바로 그런 길이었다.
지옥의 길의 난이도가 극악인 이유는 이제 밝혀진다.
[지옥의 길을 택한 오만한 플레이어에게 '탑의 저주'가 부여됩니다.]
[그동안 플레이어가 처치한 모든 골렘의 원한이 사무칩니다.]
['골렘화'가 진행됩니다.]
[완전히 '골렘화'가 진행되기 전에 태고의 골렘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플레이어는 영원히 '골렘'의 몸 안에 갇히게 됩니다.]
[골렘화]
>인간 시절의 감각을 망각하게 된다.
>진행 단계 : 1단계
>1단계 효과 : 촉각 마비.
골렘화.
말 그대로 인간의 신체가 점점 골렘처럼 변하는 저주.
첫 번째는 후각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양반이다.
'2단계가 진행되기 전까지 지옥의 길을 절반 이상 돌파해야 한다.'
그다음은 후각.
그리고 그다음은 청각.
청각 다음은 시각이다.
후각과 촉각 정도는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청각과 시각마저 마비되기 시작한다면 제 아무리 나라고 해도 승패를 장담할 수는 없다.
"몰른. 아무런 말도 하지 마라.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아!"
몰른이 잔뜩 긴장된 목소리로 답했다.
"가자."
나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캬아아아악!"
"키에에엑!"
나의 기척을 느낀 골렘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골렘 워리어와 골렘 메이지.
그리고 간혹 골렘 사제도 보인다.
'와라.'
나는 골렘들을 향해 몸을 날렸고.
골렘들은 내 검짓 아래에 풍비박산난 채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싸움이 끝난 뒤.
[새로운 업적이 개방됩니다.]
[업적 – 인간의 한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
>보상 : ???
혼자서 지옥의 길을 택한 이유. 바로 이 업적을 얻어 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