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기사 봤지?"
"예."
"당연하죠."
박명철과 한동희, 그리고 김민희.
세 사람은 격동의 세월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명가들이 힘을 합치게 되다니."
"내가 죽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네요."
"와…. 강민 씨. 진짜. 어우! 와우!"
한동희는 어쩔 줄을 모른 채로 알 수 없는 감탄사들을 뱉어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들은 이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입 조심해. 절대 어디에 가서도 이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돼."
박명철이 한동희와 김민희를 바라보며 단단히 일렀다.
비단 강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자신들까지 얽혀 있는 일이니까.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강민은 물론이고 자신들도 목숨을 부지하기란 불가능하리라.
"알고 있습니다. 걱정도 참."
"걱정 마십쇼,"
두 사람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신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밑에 이거."
힘을 합치기로 한 건 명가뿐만이 아니었다.
상위 열 개 길드들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명가 산하의 길드들이었고.
명가의 산하에 속해있지 않은 이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우리한테는 뭐 제안 없었어요?"
"있었지."
박명철이 답했다.
당연한 일이다.
명가의 회동에 참여했던 유일한 길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드 길드는 현재 탑 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길드 중 하나였으니까.
"뭐라고 했는데요?"
"안 하겠다고."
"으음…."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이다.
현재 그들은 강민을 서포트하고, 또 마법 명가의 뒤를 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상태였으니까.
거기에 괜히 다른 길드들과 자주 접촉하다가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나락에 빠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아쉬워?"
"아쉽긴요. 흐흐."
김민희가 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걔들이 암만 날뛰어 봐야 결국 웃는 건 우리 아니에요?"
강민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발언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지. 우리가 웃게 될 거다. 그러니까 지금 뒤숭숭한 분위기에 괜히 들뜨지 마.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돼."
"알죠, 알아요. 그건 그렇고. 지금 강민 씨는 어디쯤 계시려나?"
김민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말했다.
"글쎄. 26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직 26층…. 아니지, 아니야. 강민 씨라면 지금쯤 27층에 도착하고도 남았겠지."
박명철 역시 궁금한 건 마찬가지다.
언제나 그들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강민이지 않던가.
그 모습을 보던 한동희가 실실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외쳤다.
"내기할래요? 나는 지금 28층에 있다에 겁니다. 여기 50만 골드!"
"그건 아닐 거다. 설마 벌써 28층에…. 아니, 강민 씨가 대단한 건 맞지만 물리적으로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싶은…"
박명철의 말을 끊고 김민희가 소리쳤다.
"28층에 100만 골드!"
"너, 너, 너희…!"
다급해진 박명철.
그의 눈이 바쁘게 굴러갔다.
그가 봐 왔던 강민의 실력과 그가 기억하는 탑의 난이도를 분석하고 비교했다.
그리고 그가 결론을 냈다.
"나는 27층. 27층에 100만 골드. 아무리 생각해도 벌써 28층에 도착했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2:1의 상황.
박명철은 곧 강민에게 메시지 하나를 전송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히 내기를 위한 건 아니다.
현재 명가와 상위 길드들의 동향을 보고할 필요도 있었으니.
'겸사겸사지.'
그렇게 강민에게 메시지를 전송한 뒤.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백만 골드가 오고 가는 막중한 상황이다.
아무리 고층의 플레이어라도 수백만 골드는 결코 가벼운 돈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잠시 후.
"와, 왔다."
박명철의 떨리는 목소리.
그가 천천히 강민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를 펼쳤다.
"……."
메시지를 확인한 박명철의 표정이 묘하다.
그는 아무 말이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품 안에 있던 스크롤 한 장을 찢었다.
***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방금 전 도착한 박명철의 메시지.
현재 명가들은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고 있다.
'잘된 일이다. 놈들이 빠르게 탑을 공략해 준다면 나로서도 한층 수월해질 테니까.'
70층까지의 정보를 나 혼자 알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곳을 혼자 뚫고 나가는 것과 다른 이들과 함께 탑을 오르는 건 다른 이야기다.
26층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혼자라면 하루, 이틀을 꼬박 움직여야 할 일도 다른 플레이어를 이용하면 시간을 압도적으로 절약할 수 있으니까.
명가와 길드들이 나섰다면 이제 대한민국의 탑은 전반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단순히 속도만의 문제가 아니지.'
그들의 자금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대한민국의 플레이어 전체 수준이 향상될 것이다.
그건 반드시 필요하다.
'훗날 만나게 될 외국의 플레이어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해.'
어쩌면 그들은 명가의 플레이어들보다도 더욱더 위험한 적이 될지도 모른다.
어떤 강자가, 또 어떤 집단이 존재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각 국가는 자신들이 보유한 플레이어의 상황을 철저히 숨기고 있으니까.
'이걸로 대한민국의 탑은 전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겠지.'
거기에 내가 적절한 정보를 필요한 만큼만 흘려주면 탑의 공략 속도가 훨씬 빨라지게 될 것이다.
타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이쯤이면 슬슬 다음 생명석을 파괴해도 괜찮겠어.'
지금 우리가 파괴한 생명석은 총 두 개.
원래라면 1시간도 채 안 걸렸을 일이지만, 돌고 도느라 3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럼에도 플레이어들은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동안 만났던 다른 파티에 비하면 우리는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확실히 이 시점의 탑은 무간지옥이다.
벌써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다른 파티원들의 시체를 몇 번이나 마주했다.
당연히 생명석을 놓고 다투다 칼부림이 난 것이 분명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그런 일이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시비를 걸어오는 파티도 있었지만, 나를 본 순간 모두가 꽁무니를 빼기 바빴으니까.
'확실히 유명세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먼저 피해주는데 굳이 따라가서 싸움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늘 말했지만, 나는 싸움을 그리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평화롭게 진행하는 게 최고니까.'
그렇게 조금 더 걸었을 때.
"생명석이다!"
한 플레이어가 소리쳤고.
마침 주변에는 어떤 파티도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는 세 번째 생명석마저도 파괴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둘.
'남은 두 개도 대충 세 시간에 걸쳐서 파괴하면 되겠지.'
우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다섯 개의 생명석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동시에 무려 두 개의 레벨이 올라갔다.
골렘 수백 마리를 때려잡는 것 보다, 네임드 몬스터와 퀘스트를 깨는 게 레벨 업이 확실히 빠르다.
"됐다! 다섯 개! 만세에에에!"
"으하하하하!"
결국 다섯 개의 생명석을 모두 파괴했다.
28층을 클리어하는 데 걸린 시간은 총 이틀.
사실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을 일이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생명석을 피해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꽤 답답했다.
말했듯 28층에 존재하는 천인장.
놈들의 무리와 한 번 부딪치고 나면 정말이지 골치 아픈 일이니까.
'백인장을 사냥하는 데에도 꽤 골치 아팠는데, 그 열 배.'
심지어 천인장 한 개체의 힘은 백인장 다섯, 여섯을 모아 놓은 것만큼 강력했다.
'그래도 덕분에 레벨이 두 개나 더 올랐다.'
현재 나의 레벨은 48.
50까지는 2레벨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도 포식 슬롯이 또 열리겠지.'
개인적으로는 명가 녀석들의 능력을 하나 뺏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아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S급 능력을 포식할 때의 조건은 상대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혈계의 능력도 마찬가지겠지.
'지금 이 시점에서 명가의 플레이어를 죽인다면….'
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나중에.
내가 홀몸으로 그들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에 생각해 보기로 하자.
타닥- 타닥-
플레이어들은 29층에 올라가기 전, 배를 채우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전투 식량이 아닌,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셈이다.
"아…. 고기 냄새."
"이게 탑이냐, 천국이냐. 으하하하!"
플레이어들의 입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사망자는커녕 부상자도 한 명이 없다.
그러니 여기 있는 모두의 마음은 잔뜩 들떠 있을 수밖에 없지.
'게다가 용사 파티의 요리….'
저들은 우리가 살던 지구와는 다른 곳에서 살던 이들.
그리고 전생에서도 용사 무리는 늘 유명했다.
그들의 뛰어난 요리 실력으로 말이다.
'웃긴 얘기긴 하지만….'
진짜다.
지금도 용사와 사제가 미리 챙겨 온 재료들로 요리를 시작했고.
그 냄새는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탑….'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탑은 정말 이상한 곳이다.
싸움과 피가 낭자한 곳이면서 동시에 한 곳은 인간적이다.
지금 이런 장면을 보라.
파티원들 모두는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기에 올라와 있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용사의 요리를 기대하고 있는 천진난만한 표정이라니.
다시금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온갖 인간 군상이 충돌하고, 뒤엉키는 곳.
그럼에도 살아가야만 하는 곳.
탑을 오르다 보면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곤 한다.
'잡념이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옆의 몰른을 바라봤다.
그 역시 용사의 요리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하나도 모르는군.'
함께 다닌 시간이 꽤 됐음에도 그런 이야기는 나눈 적 없다.
사실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가장 크다.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 역시 몰른에게 내 과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다.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내 전생은 열등감과 트라우마로 철저히 뭉쳐져 있으니.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을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멍때리고 있을 무렵.
"완성됐습니다! 으하하하!"
용사가 소리쳤다.
한 눈에 보더라도 퀄리티가 훌륭한 음식이다.
좋은 냄새가 난다.
"저요! 저! 저 주세요!"
"나도 먹고 싶어요! 으으아아!"
플레이어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물론 그릇이라고 해 봐야 휴대하기 편하게 만든 허름한 그릇이지만.
음식을 담은 용사가 내가 앉아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에 들린 음식을 다른 플레이어들이 홀린 듯 바라봤다.
"…드십…시오."
용사가 내게 음식을 건넸다.
근데 표정이 왜 이래?
뭐 죄라도 지은 것 같은 얼굴이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굳이 묻지도, 개의치도 않은 채로 음식을 받아 들었다.
스튜다.
스튜의 국물을 홀짝 삼켰다.
맛이 좋다.
용사는 내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더니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다시 몸을 돌렸다.
용사가 음식을 배급하기 시작하니 플레이어들의 아우성이 다시 시작됐다.
'잘 먹어 둬야지. 29층부터는 다시 녹록지 않을 테니까.'
29층.
골렘 사원의 지옥이라고도 불리는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