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속도가 많이 줄었다.
깊숙이 파고들어 오니 골렘 투사들이 훨씬 더 빼곡히 밀집해 있다.
게다가 십인장들은 내가 한 번에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한 마리의 십인장을 사냥하기 위해 시간을 쏟아 보면, 주변의 골렘 투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혹시라도 다른 십인장의 눈에 띄게 되면 내가 상대해야 할 골렘 투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버렸으니까.
'숫자도 숫자지만….'
문제는 체력이다.
내가 체력이 레벨에 비해서 말도 안 되게 높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한대는 아니다.
게다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공격을 회피해야 하니.
정신적인 피로감도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는 중이었다.
'심지어 내가 절반…. 아니, 절반이 뭐야 7할 이상은 혼자 처치했을 텐데.'
파티원들을 탓하는 건 아니다.
저들은 충분히 잘해주고 있다.
다만 내가 너무 빠를 뿐이지.
그뿐인가.
스킬의 쿨타임과 사용 시간을 계산해서 적절하게 사용해야 했으니, 머리가 핑핑 돌아 버릴 지경이다.
'확실히 지금 가진 능력들은 다수의 전투에서는 부족한 게 사실이다.'
충격파가 그나마 큰 역할을 해주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눈에 띄는 효과는 발휘하지 못했다.
'그나마 아이언 바디를 얻었으니 망정이지.'
30이 조금 넘는 방어력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만약 아이언 바디가 없었으면 나는 훨씬 더 큰 부상을 입거나, 상처가 누적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체력의 소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을 테니까.
'그래도 꽤 많이 잡았어.'
지금까지 처치한 골렘 투사 십인장의 수는 여덟.
앞으로 두 마리만 더 처치하면 업적 2단계도 달성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당연히 남은 골렘 투사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
나는 파티원들의 상황을 살폈다.
'쟨 왜 저래?'
용사라는 녀석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생에도 그랬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렇고.
사실 용사란 존재는 골렘 사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지만.
내겐 그저 탑을 클리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까.
'어쨌든 뒤쪽에서도 잘해주고 있어.'
아직 사망자는 없다.
부상자는 몇몇 있는 것 같지만, 용사 파티의 사제가 잘 치료해 주고 있었으니.
'조금 더 속도를 내 보자.'
나는 인벤토리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 마셨다.
상처가 금세 회복됐고.
턱 끝까지 차오르던 가쁜 숨도 차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두 마리만 더.'
그러면 곧 두 번째 보상마저도 내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탑을 오르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힘겨운 싸움이지만, 즐겁다.
나는 다시 바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무렵.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어떤 일이 터진 건 확실합니다."
"이것 참….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를 이렇게 도와준다니. 선물이라도 주고 싶은데?"
궁술 명가의 예진희.
그녀가 보고를 받아 들고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가 받은 보고는 다름이 아니다.
마법 명가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가 느껴진다는 것.
현재 각 명가에서는 마법 명가의 심상치 않은 동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직 어떤 사태가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악한 건 아니다.
그만큼 마법 명가에서는 연구소가 파괴된 사건에 대해서 엄중하게 기밀을 유지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각종 명가의 첩보망을 완벽하게 피해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기회라는 뜻이겠네."
예진희가 말했다.
마법 명가의 세력이 주춤하기 시작했다는 정황을 파악했으니.
다른 명가에게는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는 일이다.
비단 궁술 명가뿐 아니라, 창술 명가, 체술 명가에서도 이런 기류를 포착했을 터다.
검술 명가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사태가 포함하는 의미는 하나다.
그동안 명가의 세력이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
검술 명가와 마법 명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거대한 두 축이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검술 명가에게는 부동의 원 톱으로 올라 설 기회였고.
다른 세 명가에게는 흔들리는 틈을 파고들어 놈이 비상할 수 있을 기회였다.
"네 생각은 어때?"
예진희가 궁술 명가의 참모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이 틈을 이용해야 합니다. 지금 즉시 다른 명가에게 연락을 취해서 마법 명가를 압박하는 것이 옳은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마법 명가를 압박한다라…."
과거였다면 생각도 못 했을 일이다.
마법 명가.
유일한 육체 능력 계열의 명가가 아님에도 굳건히 대한민국 최강의 명가로 군림하던 이들이었으니까.
"그 말이 맞아."
지금이 아니라면 안 된다.
검술 명가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또 마법 명가를 눌러 앉히고 올라서기 위해서라도.
"잠시 그 녀석들과 힘을 합치는 것 정도는 필요한 일이기도 할 텐데 말이야."
하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모두가 잠재적인 경쟁자.
당장 힘을 합치고 마법 명가를 압박한다고 해도,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이들이다.
"그래도 어쩔 수는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은 다른 명가들과 손을 잡는 수밖에는. 우선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 봐."
"알겠습니다. 혹시 따로 지시하실 일은 없습니까?"
"궁술 명가 산하들에게도 따로 연락을 취해. 그리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더 확대해야지."
각 명가들은 산하의 여러 길드를 두고 있다.
애당초 명가에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여러 길드들은 명가와 공생하기를 택했다.
애초에 명가에 평범한 플레이어가 들어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각종 무기에 특화된 만큼, 그쪽에 재능이 없다면 꿈도 꿀 수 없을 것이고.
명가의 전통과 규율에 적응하기란 현대 사회에서 자유를 느낀 이들에게는 곤욕이었으니까.
그러니 명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명가와 인연을 맺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위드 길드와 같이 독자적인 길을 걷는 이들도 있었지만.
명가 산하에 속한다는 건, 길드에게 있어서도 큰 이득이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도 명가의 지원과 비호를 받을 수 있으며.
함께 같은 명가에 소속된다면 암묵적인 동맹 관계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명가들은 산하의 길드를 지원하기도 하고, 적절하게 관리하며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명가에서도 산하에 얼마나 괜찮은 길드를 보유하고 있고, 또 얼마나 많은 길드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리기도 했으니.
"우리 산하 길드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키워 둬야 해. 앞으로 닥쳐올 폭풍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바로 예진희의 계획이다.
"알겠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2단계를 달성했습니다.]
[골렘 투사 십인장의 반지를 획득했습니다.]
두 번째도 반지다.
아직 오장의 반지와 십인장의 반지의 옵션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런 걸 확인 할 틈이 없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골렘 투사를 쓰러트리기에도 여념이 없으니까.
'하지만 왠지 좋은 느낌이 든다.'
첫 번째 보상은 오장의 반지. 그리고 두 번째 보상은 십인장의 반지.
그렇다면 다음 건 백인장의 반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쉽게 유추 할 수 있다.
연속된 속성의 아이템.
즉 세트 아이템이다.
'세트 아이템을 다 모으면 추가 옵션이 활성화된다는 건 탑의 상식 중의 상식이고.'
그 능력이 어떤 능력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업적인 만큼, 사기적인 옵션이 붙어 있으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치 우주가 나를 돕는 것만 같다.'
아직 업적을 달성한 건 아니지만.
이제 업적의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어느새 우리가 처치한 골렘 투사의 수는 70마리를 훌쩍 넘었다.
백인장의 무리를 만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이뤄낸 성과다.
'전생에서 백인장을 사냥하다가 파티원의 절반이 사망했던 걸 생각해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속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던 중.
'백인장이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골렘 투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가야 하나.'
이제 남은 골렘 투사의 수는 고작 10여 마리 남짓.
파티원들에게 맡겨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직 충격파는 활성화되지 않았다.'
뇌전검은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사용할 생각은 아니다.
두 개를 사용하는 건, 마지막 결정타를 날릴 때다.
가자.
내가 놈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니 백인장도 나를 발견한 모양이다.
쿵! 쿵!
놈이 땅을 세게 구르며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앞을 막고 있던 골렘 투사들은 황급히 자리를 비키며 길을 텄다.
'만만치 않겠지.'
확실히 움직임 자체가 오장이나 십인장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오장과 비교하자면 최소 열 배 이상 강하리라.
'그런 놈을 혼자 사냥해야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지만.
업적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해낼 만한 가치가 있다.
콰아아앙!
놈의 주먹과 내 검이 충돌했다.
'멀쩡해.'
오러 블레이드에 주먹이 닿았음에도 잘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아귀가 아파올 정도였다.
'물론 방법은 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터득해 낸 방법이다.
사람처럼 생겼다고는 하지만, 백인장 역시 골렘.
'핵이 있다는 뜻이지.'
제아무리 단단하다고 한들, 골렘 투사 역시 하나의 생명체다.
두드리고, 두드리면 죽게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내 검은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졌다.'
오리하르콘이 부수지 못하는 금속은 많지 않다.
거기에 오러 블레이드까지 더해졌으니.
한 번 충돌로 베어내지 못했다고 해서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 순간 골렘이 몸을 회전시켰다.
'발이다.'
놈의 발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몰랐으면 꼼짝없이 당했겠지만, 내가 알고도 당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나는 몸을 비틀었고.
파아아앙!
놈의 발은 허공을 두드렸다.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풍압이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일격이다.
그렇다고 해도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건 당연한 일.
휘릭!
나 역시 몸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검을 내질렀다.
놈의 가슴이다.
카아아아앙!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주 작은 흠집이 생겨났다.
상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수준이다.
놈 역시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물론 나도 예상했던 일이다.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놈의 반격이 이어졌고.
나는 검을 이용해서 놈의 공격을 흘렸다.
백인장의 균형이 미세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카아아앙!
같은 자리를 정확하게 찔렀다.
상처가 조금 커졌다.
'두 번도 안 되면 세 번!'
카아아앙!
한 번 더 두드렸고.
작은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제야 놈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모양이다.
놈은 다급하게 가슴팍을 가린 채로 뒤로 물러섰다.
빠른 속도로 뒤로 후퇴하는 녀석의 앞을 골렘 투사들이 막아서기 시작했다.
'아쉽게 됐어.'
내가 아니라, 녀석에게 하는 말이다.
지금 막 충격파의 쿨타임이 끝났고.
치지지직!
우우우웅!
전류를 흩뿌리는 오러 블레이드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제 끝낸다.'
쿠웅!
나는 땅을 강하게 구르며 놈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