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힘 21, 민첩성 25, 체력 29.'
그동안 얻은 스탯이다.
26층의 골렘을 적어도 300마리 이상은 학살해서 얻어 낸 결과물이다.
이 정도 얻었으면 충분하니 잠시 쉬기로 했다.
'아직 용사를 발견한 파티는 없는 건가.'
파티들이 흩어져 용사들의 리젠 장소로 떠난 지 대략 4시간이 조금 넘었다.
가까운 곳이라면 지금쯤 도착했을 거고.
먼 곳이라면 아직 2~3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만약 가까운 곳에 용사가 있었다면 지금쯤 연락이 올 때가 됐을 텐데.
우선 나는 바닥에 앉아 전투 식량을 두 개 꺼내 하나는 몰른에게 건넸다.
질릴 만도 한데 몰른은 내가 주는 전투 식량을 아무런 말도 없이 잘 받아먹었다.
각자 자리에 앉아서 전투 식량을 먹고 있을 무렵.
[강민 씨! 찾았습니다! 용사 찾았어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잔뜩 들떠 보이는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좋군.'
나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
[위치. 어디입니까.]
곧 답장이 도착했고.
운이 좋게도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
나는 먹던 전투 식량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고.
"가자, 몰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티원들이 용사 무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오셨군요, 강민 씨."
그들의 입가가 찢어질 것 같이 벌어졌다.
내가 나타난 순간 저 뒤쪽에서는 환호성마저 터져 나왔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벌써 2주가 넘게 이곳에서 헤매고 있었거든요. 그 사이에 벌써 한 파티는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도 했고…."
물어보지도 않은.
궁금하지도 않은 얘기를 떠들어 대는 플레이어.
"예. 알겠습니다."
나는 적당한 선에서 그의 말을 끊었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용사 무리에서 한 명이 나섰다.
그의 머리 위에는 [용사 : 아킬레토]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반갑습니다. 모험가 한강민입니다. 용사 아킬레토 님."
"오! 그대가 이들이 그렇게 칭찬하던 그 모험가로군요! 그대의 무용담은 정말 나를 감명케 만들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실력을 가진 모험가가 있다니. 우리의 모험은 반드시 성공하고…."
시끄러워서 용사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디서 교육이라도 받고 오는 건지.
전생에서도 그랬고,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용사들의 수다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잠시 후 용사의 말이 끝이 났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용사의 손을 잡으면 '아킬레토' 파티에 가입합니다.]
나는 아킬레토의 손을 잡았고.
['아킬레토' 파티에 가입했습니다.]
[26층의 클리어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27층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갑시다. 다음 층으로."
"우아아아아!"
"나이스으으으!"
파티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용사 일행도 덩달아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27층이 되면 나는 따로 움직여야 한다.'
27층에 존재하는 마법 명가의 실험실.
그곳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30층에 오르기 위해서는 파티가 필요하니까.
'잠시 단독 행동을 하는 수밖에.'
저들이 거부하면 파티를 나가면 된다.
파티야 얼마든지 새로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27층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와중에도 용사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비장의 수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몰른을 용사 옆에다 붙이는 것.
몰른은 용사 옆에 선 이후로 입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결국 용사보다 몰른이 한 수 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3시간이 넘어갔을 무렵, 용사가 슬금슬금 몰른을 피하기 시작했으니까.
'이이제이.'
아주 좋은 단어다.
그 이후로는 쾌적한 상태로 26층을 횡당했고.
탑에 올라선 지 대충 하루가 지났을 무렵.
"27층이다아아아아!"
"만세에에에에!"
27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
강민이 27층에 올라서 골렘들을 사냥하고 있을 무렵.
평범한 플레이어들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삼엄한 경비로 둘러싸인 한 건물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5대 명가의 회동 장소로 정해진 곳이었다.
"…."
5대 명가의 대리인으로 나온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무거운 침묵을 이어갔다.
그 중에는 박승균과 김준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창술 명가의 구준회, 그리고 체술 명가의 최강혁. 궁술 명가희 예진희.
모두가 각 명가의 직계이며, 혈계를 계승한 이들이었고.
동시에 차후 가주로 촉망받는 이들이었다.
'미치겠네.'
그런 이들 사이에 껴 있는 박명철은 정말이지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이 사람은 뭐죠?"
궁술 명가의 예진희가 박명철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궁금하던 차였군.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난 본 적 있는 것 같습니다만…. 위드 길드의 길드장 아닙니까?"
"위드 길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당신이 여기에 와 있는 겁니까? 무슨 자격으로?"
명가의 대리인들이 박명철을 향해 질문을 쏟아냈다.
쏟아지는 질문에 박명철은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매뉴얼대로 하면 된다.'
이런 질문들은 당연히 마법 명가가 건네준 매뉴얼에 적혀 있었던 것이었으니.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현재 위드 길드의 길드장으로 있는 박명철입니다. 사실 저는 위드 길드를 대표한다기보다는, 우리 길드의 길드원인 한강민 씨를 대표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박명철은 유독 '우리 길드의 길드원'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메뉴얼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박명철의 독자적 판단이다.
박명철은 다급히 박승균의 표정을 살폈다.
박승균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
박명철은 자신의 임기응변에 나름 만족하며 숨을 돌렸고.
"…!"
"한강민?"
"허허!"
한강민이라는 이름에 모두가 흠칫 놀랐다.
특히나 검술 명가의 김준석의 반응은 그 중에서도 유별날 정도였다.
"하!"
김준석이 탄식을 터트렸다.
동시에 박승균을 바라본다.
"더러운 꼼수를 쓰셨구만."
그러거나 말거나.
박승균은 뻔뻔한 얼굴로 대리인들을 훑어봤다.
"사실 한강민 씨가 직접 왔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현재 26층을 등반중이라 이곳에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박승균은 미리 입수한 강민에 대한 정보를 떠들어댔다.
역시나 자신들이 다른 명가에 비해 정보력과 영향력에 있어서 앞선다는 사실을 떠벌리기 위함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김준석은 울화가 치밀 것 같았다.
강민을 보기 위해 온 자리에 강민은 없고, 박승균의 잔꾀에 놀아난 꼴이 되었으니까.
'아버님께서 아시면 나를 죽이실지도 모르겠어.'
강민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숨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김준석.
그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자. 말해 보십시오. 이번 모임의 목적이 뭡니까. 그리고 하나 더. 한강민. 그 사람이 대단한 건 맞지만 이 자리에 올 만한 사람도 아닌데.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김준석이 박승균을 쏘아붙였다.
박승균은 오히려 여유로운 태도로 김준석을 바라봤다.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한강민 씨를 탐내고 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헛."
"흡!"
"……!"
모두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설마 저런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할 줄이야.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어엿한 명가의 대리인들이 모인 공적인 자리에서!
'박승균. 또라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모두가 내심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박승균의 똘끼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목적이요. 하나죠. 한강민. 그 사람을 탐내지 마십시오. 그 꼴은 내가 볼 수 없거든. 그 사람은 곧 대한민국의 탑을 흔들만한 플레이어로 성장할 텐데. 당신들 명가에 들어가는 꼴을 내가 어떻게 봅니까? 크하하하하!"
"……미친 새끼."
결국 김준석도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박승균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미친 새끼라. 좋은 말입니다. 이 탑에서 미치지 않고서는 하루도 버틸 수 없으니까.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
박승균에게서 느껴지는 광기는 모두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강민 씨가 직접 나왔으면 좋았겠지만, 상관없습니다. 다들 강민 씨에 대한 욕심은 접어 둡시다. 각자 명가의 힘으로 싸워야지. 그런 천재를 영입해서 날로 먹으려는 건 좀 그렇잖아요?"
"하, 참. 어처구니가 없군. 이딴 말이나 하려고 부른 거라면, 난 가겠습니다."
"저도 가겠어요."
궁술 명가의 예진희와 체술 명가의 최강혁이 말했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에이. 아니죠. 설마 제가…."
"이런 농담 따먹기 따위나 하고 있을 생각 없습니다."
기어코 창술 명가의 구준회마저도 자리에 일어선 순간.
"앉으십시오."
김준석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순간.
"…."
두 사람은 김준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자리에 착석했다.
그들에게는 당연히 마법 명가보다는 검술 명가의 위세가 더 두려웠으니까.
김준석은 한 마디로 검술 명가가 오대 명가의 맹주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준석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박승균을 흘겨봤다.
'명가 맹주의 자리는 우리 김씨 일가의 것이다. 네 놈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두 사람의 치열한 신경전은 결국 김준석의 승리로 끝이 난 셈이다.
'그래. 마음껏 날뛰어라. 그것도 이제 조만간일 테니까.'
박승균은 금세 표정을 고치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이런 것이 다는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께 괜찮은 제안을 하나 해 보고자 합니다. 들어 주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싱긋 웃으며 명가의 대리인들을 바라보는 박승균.
그 음흉한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대리인들은 기분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해보십시오."
김준석의 한 마디에 상황은 다시 정리됐다.
"역시. 쿨하신 김씨 일가의 장남. 좋습니다."
"헛소리는 하지 마시고."
박승균은 가볍게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아마 여러분들도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탑 등반이 꽤나 늦어지고 있다는 걸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이 직접 확인은 할 수 없었지만.
탑 밖에서부터 전해 들어오는 소식으로는 이미 60층을 돌파한 국가들도 있다고 했으니까.
"아직도 50층 언저리에서 쩔쩔매고 있는 것.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
반박의 여지는 없다.
모두가 은연중 느끼고 있던 것이니까.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우리끼리 이렇게 지지고 볶으면서 탑에서 군대놀이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물론 박승균의 속내는 따로 있다.
다른 명가들이 탑 등반에 열을 올리도록 만들고.
그들은 아래층에서 흑암파 양성에 힘쓰기 위한 계획이었지만.
구색은 완벽하게 갖춘 제안이었으니.
다른 이들도 조금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박승균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명가들의 협동.
강민의 전생에서는 지금으로부터 먼 훗날 발생할 일이었지만.
강민 덕분에 역사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대답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 각자 가문의 가주님과 장로님들과 상의 후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