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저기 구석에 잘 처리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꽤 오래 버티더라?"
"그러면 뭐 해. 쓰레기는 쓰레기지. 불쌍한 놈. 5분만 더 버텼어도 파티에 넣어 줬을 텐데. 흐흐흐."
26층.
그곳에 한 무리의 파티원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나름의 선별 작업을 거치고 있는 중이다.
26층 정도 올라 온 이들이라면 나름대로 탑에 적응하여 나름의 생존 원리를 터득한 플레이어들.
그러니 이와 같이 파티원을 선별하는 작업은 종종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이들의 방식은 평범하지 않다.
이 파티의 리더인 강민준.
그의 지시하에 파티원들은 말 그대로 한 달 동안이나 파티원을 모으는 선별 작업을 거치고 있었던 것.
문제는 시간이 아니다.
어차피 26층부터 맺어진 파티는 죽지 않는 이상 30층까지 쭉 이어지는 게 보통이다.
새로운 파티원을 추가할 수 있는 건 26층뿐이니까.
웬만하면 26층에서 최대한 완벽한 파티를 구성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뜻.
하지만 강민준.
그의 선별 작업은 조금 이상했다.
새로 파티원이 파티에 가입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는 파티원들을 통해 새로운 플레이어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그것이 강민준의 선별 작업.
여기까지라면 납득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결을 통해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것만큼 직관적인 방법은 없으니까.
다만 강민준의 진짜 의도는 단지 실력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다.
실력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정당한 대결을 통해 어느 정도 선에서 싸움을 멈춰야 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그는 새로 가입한 플레이어가 고통에 빠져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사실상 선별이라는 허울을 쓴 폭력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강민준과 함께 26층에 도착한 5명의 플레이어들은 처음엔 강한 파티원을 구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지만.
어느새 그들의 선별 작업은 탑 내부에서 받는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변질되기 시작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강민준과 파티원들의 일종의 유희가 되었던 것.
"내가 그 새끼 목을 땄어야 됐는데."
"니가 느려서 그런 거지."
"X발. 다음에 들어오는 새끼는 어떻게 조질까?"
"오랜만에 다리 먼저 자르고 가지고 노는 것도 괜찮겠는데?"
"오오오오! 좋아, 좋아! 나도 할래!"
광기다.
방금 전 새로운 파티원을 죽였건만.
그들은 벌써 새롭게 등장할 파티원을 괴롭힐 생각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민준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한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어…! 아, 알겠습니다."
"당연하죠! 민준 님이 하셔야지!"
"그러엄!"
공포정치.
이 모든 시스템의 정점에 서 있는 강민준.
당연히 이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건 그의 강함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나서지 않은 건 꽤 오래됐다.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쾌감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지금 오랜만에 직접 나서고 싶어졌다.
"이제 그냥 지켜보는 건 재미없어졌어."
그리고 그때.
[새로운 파티원이 소환됩니다.]
강민준의 파티에 새로운 파티원이 소환됐다.
***
"음."
일단 소환이 된 건 맞는데.
분위기가 조금 요상하다.
묘한 분위기는 나만 느낀 게 아닌지, 시끄러워야 할 몰른도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한강민."
파티원 한 명이 내 이름을 불렀다.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걸 보니 26층에서 꽤 오래 머물렀던 모양이다.
내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동안 항상 그러지 않았던가.
내 얼굴은 몰라도 내 이름은 알았고.
이제는 명가에서도 나를 영입하기 위해 발버둥 칠 정도였으니까.
'대충 2주에서 한 달 정도 26층에 머무른 녀석들이겠군.'
그런 판단이 들었다.
내가 1층부터 탑을 오르기 시작한 게 이제 막 한 달 쯤.
내 이름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건 대충 2주쯤이니까.
'그런 녀석들은 흔하지.'
26층쯤 올라왔으면 한 층 한층 신중하게 오를 수밖에 없고.
한 층에서 몇 달 정도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파티원들은 나를 둘러싸고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잘못 걸렸군.'
26층부터 30층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파티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금 이 녀석들에게서는 26층을 클리어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다.
이 파티를 나가서 새로운 파티를 구하는 것.
하지만 문제는.
'곱게 보내 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인데.'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파티원들은 점점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없으면 저는 파티를 나가겠습니다."
[파티에서 탈퇴했습니다.]
[26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파티에 가입되어 있어야 합니다.]
파티는 곧 구하는 걸로 하고.
곧바로 내 갈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툭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서기 전까지는.
"뭡니까."
내가 그를 향해 물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였다.
"에이. 그렇게 맘대로 가면 쓰나?"
"…."
대충 알겠다.
처음 나를 그렇게 노려보고 있던 이유가 뭔지.
새롭지는 않다.
탑에는 늘 정신 나간 미친 것들이 득실거린다.
처음 탑에 올라서 의지를 다지던 녀석들도.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의 압박 속에서 정줄을 놓는 건 흔한 일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내가 그렇게 말하자.
"크하하하하하!"
"그렇군이래, 그렇군!"
"저 새끼 뭐 중2병이냐? 흐흐하하하!"
놈들이 폭소했다.
그때였다.
저벅
저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왜소한 남자.
하지만 그의 옆에 떠 있는 능력창을 본 순간.
나는 이들이 나를 붙잡았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게 됐다.
[아이언 바디 – AA]
플레이어들에게 어떤 능력을 가지고 싶느냐고 물을 때 빠지지 않는 능력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방어력에 관한 능력이다.
체력이 높아 봐야 인간의 피부는 두꺼워지지 않는다.
비싼 장비로 온몸을 두르지 않는다면, 검에 맞으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이다.
'하지만 저런 스킬 하나만 있으면.'
생존율을 극도로 높일 수 있다.
체술 명가.
그들을 명가의 반열로 올려놓은 게 고작 금강불괴라는 사기적인 능력 하나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방어력을 증폭시켜주는 능력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 지는 한눈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건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재빠르게 상대의 공격을 피한다고 해도, 찰나의 실수로 공격을 한 번 허용한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지.'
특히나 동료 없이 혼자 싸우는 나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저 녀석은 내 앞에 나타난 또 한 명의 귀인이다.
나는 놈을 보면서 말했다.
"고맙다. 진심으로."
내 말을 들은 놈의 눈매가 조금 좁혀졌다.
***
그 시각 강민이 떠나간 25층에서는 위드 길드가 마법 명가의 대리인과 만나고 있었다.
"내일 있을 회동에 대해서 안내를 하려고 왔습니다."
"예."
박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건 없습니다. 우선…."
"잠시만요."
마법 명가 대리인의 말을 끊은 박명철.
"음?"
조금 불쾌한 기색을 표했지만 박명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것보다 강민의 불참 소식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으니까.
"강민 씨는 불참하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명가의 대리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알겠습니다. 저는 가서 그 사실을 알릴 테니… 이건 대충 한 번 읽어 보시면 될 겁니다. 어려운 내용은 없어요. 다른 명가들의 질문에 대한 대처법이나… 그런 거 적혀 있는 거니까."
명가의 대리인은 조급해졌는지 박명철에게 설명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금세 자리를 떠 버렸다.
"…어떻게 되려는 건지. 나는 이제 모르겠네."
박명철이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쩌다 이런 복잡한 일에 얽혀 버렸는지.
다섯 명가의 회동 자리에 자신이 낀다는 것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았고.
그 일이 다가올 시간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더 흥분시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법 명가의 대리인이 주고 간 종이를 바쁘게 읽어 내려갔다.
그것을 읽어내려 갈수록 박명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이유는 하나다.
'나를 그냥 머저리 취급하겠다는 거잖아….'
그 안에 적힌 내용은 길지만 핵심은 하나다.
주제를 알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것.
그런 글을 읽고 신이 날 사람은 없다.
박명철도 마찬가지다.
알고는 있다.
거기에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강민이 필요해서라는 것도.
'그래 맞다. 내가 그들과 어울려서 명성을 얻으려는 것도 아닌데….'
순간 조금이나마 들떴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런 생각을 한순간 오히려 박명철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강민 씨를 만난 순간 이미 작정하지 않았던가. 나의 욕심이나 허영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가치가 아닌 것을.'
그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강민이 남긴 말과, 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내 목적은 명가들과의 친목을 다지는 게 아니야. 강민 씨를 도와 그렇게나 더러운 짓을 일삼는 마법 명가를 무너트리는 거지.'
그의 눈이 번뜩였다.
***
'잘 됐다.'
장비를 바꾸며 증가된 나의 현 상태를 실험해 볼 좋은 상대다.
그러니까 저 앞에 있는 남자는 샌드백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해서 쉽게 부서지지 않는 샌드백.
마침 이렇게 적절한 상대가 나타나 주다니.
당장 놈의 능력을 포식할 수도 있다.
내가 가진 포식 포인트는 현재 4만.
이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포식은 놈을 처치하고 나서.'
스릉
검을 뽑아 든 순간 남자의 표정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저 미소를 보고 확신했다.
저 인간은 미친놈이라고.
"히에에엑!"
몰른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게 분명하다.
저런 썩어 버린 싹은 싸그리 뽑아 버리는 게 맞다.
이 탑을 정화하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사명 때문은 아니다.
그냥 꼴 보기 싫으니까.
"와라."
내가 말했다.
그 순간.
"크흐...크흐흐하하하!"
놈이 웃음을 터트렸다.
광기가 가득한 웃음이다.
그와 함께 놈의 능력 아이언 바디가 활성화됐다.
놈의 피부가 회색으로 물들었다.
능력의 이름 그대로 온몸을 쇠로 만드는 능력인가 보다.
까드득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맨 주먹이군.'
어쩌면 그에게 가장 적절한 무기를 택했을지도 모른다.
어중간하게 무기를 잡는 것보다는 단단한 몸으로 때우는 게 편했을 테니까.
자, 그럼 나도 확인해 볼 차례다.
뇌전검, 충격파도 있지만.
지금 내가 확인해 보고 싶은 건 당연히 오러 블레이드다.
오러 블레이드.
쇠를 스펀지처럼 잘라내는, 소드 마스터들의 전유물.
그 힘을 3단계까지 일깨웠으니.
AA급의 수준급 방어 능력을 가진 26층의 실력자.
그런 상대를 대상으로 내가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콰아아아!
검 위로 짙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