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해밀턴과 나는 그의 공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 장인에 대한 미련 때문에 혹여라도 내 장비의 퀄리티가 떨어질까 봐.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백 번이라도 해밀턴의 스승을 만나게 해 주는 편이 낫지 않겠나.
"괜찮소."
해밀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다만…."
해밀턴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것이 스승님의 마지막 교육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묘한 감정이 나를 들볶아서 그렇소."
마지막 교육이라니.
이건 무슨 소릴까.
"스승님께선 늘 아집을 버리라고 하셨지. 그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분의 모든 것을 빼닮고 싶었소. 망치를 두드리는 리듬과, 세기. 그 모든 것을 말이오."
그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 역시 해밀턴의 무두질 소리를 듣고 그 노인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게 아니라고 하셨지. 나는 나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그럼에도 나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어."
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숱이 많은 눈썹이 보인다.
"그러니 당신께서 나를 벗어난 것이지. 그 그늘을 벗어나 나 스스로의 길을 찾으라고 말이지."
그들만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무튼…. 알 것 같소.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이 더러운 성질머리. 아집과 고집을 내 던져야겠지."
불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수십 년 후에도 똥고집으로 유명했다고.
그럼에도 자신의 영역을 확실히 개척해 낸 건 사실이다만.
"그래. 나에게 맡기고 싶은 게 무엇이오."
그가 나를 바라봤다.
뭐.
어쨌거나 나에게는 잘된 일이지 않은가.
시간이 흐를수록 해밀턴의 실력은 일취월장할 것이고, 지금 해밀턴과 맺어 놓은 관계는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질 테니까.
나는 모아 둔 금속들을 모두 꺼냈다.
"허어어…."
해밀턴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처음 보여줬던 것에 비해서 수십 배는 많은 양의 금속이었으니까.
"검과 경갑옷. 갑옷에는 특히 아다만티움의 비율을 최대한 높여 주십시오. 이 금속은 얼마를 쓰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최상의 퀄리티만 약속해 주신다면."
꿀꺽
내 말에 해밀턴의 입꼬리가 씰룩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대장장이의 본능이 날뛰고 있는 것이리라.
"맡겨 두게. 내 인생 최고의 역작을 한 번 만들어 볼 테니까."
해밀턴이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업적 '장인을 일깨워라'를 달성했습니다.]
[플레이어 '한강민'이 장인 '해밀턴'에게 의뢰하는 장비에 대하여 대성공 확률 50% 증가!]
'미치겠네.'
예상치 못한 업적이 튀어나온 순간이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3일. 3일만 주시오."
3일.
나쁘지 않다.
아니, 충분한 시간이다.
어차피 당장 탑을 오를 생각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해밀턴에게 재료를 맡긴 뒤 바로 공방에서 나왔다.
전생에서도 그는 작업할 때 혼자 몰두하는 것을 선호했으니까.
당연히 아직 잠재 스탯도 포식하지는 않았다.
그가 만든 장비 중에 쓸만한 잠재 스탯은 많았지만, 포식하는 건 결과물이 나온 뒤다.
아직 위드 길드 사람들은 이 마을에 머물러 있다.
'우선 장비가 나올 때까지는 여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어.'
그리고 내 예상대로라면, 조만간 큰일이 하나 터질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렇게 헤집고 다녔으니, 놈들이 가만히 있는 게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특히나 마법 명가와 검술 명가.
두놈들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할 타이밍이다.
내가 의도했던 대로 마법 명가는 그동안의 소행에 대해서 검술 명가를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분명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슬슬 본격적으로 두놈들이 으르렁댈 타이밍이기는 한데.'
그 녀석들이 서로 얼마나 지지고 볶건 나와는 관계없는 일.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다.
당장 마법 명가를 내 적으로 상정한 상황이긴 하다만.
늘 말했듯 명가 놈들은 다 거기서 거기고.
언젠가 내가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얼마 안 남았다.
놈들이 서로에게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밀 그 시간이 말이다.
그때였다.
[박명철 : 강민 씨. 지금 급하게 좀 만나야겠습니다.]
박명철로부터 도착한 메시지.
나는 직감했다.
기다리던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는 사실을.
***
하루 전.
박명철이 강민을 호출하기 전날이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자존심만 센 근육 덩어리들이 하는 결정이 다 그렇지 않겠어?"
마법 명가의 박승균.
그가 검술 명가의 반응을 전해 들은 뒤 조소와 함께 말했다.
"화가 나지 않으십니까. 듣기로는 그들이 우리의 서신을 그대로 불태웠다고 합니다."
"화가 왜 나?"
"흐음…."
박승균은 화가 나긴커녕 오히려 신이 날 지경이다.
"잘 보고 있어. 이제 검술 명가 그 무식한 것들이 어떻게 내 손에 놀아나는지 말이야."
그가 이렇게 여유로운 건 당연히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써 보낸 편지를 태웠다는 검술 명가의 가주, 김원호.
그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검술 명가 전체를 농락할 만한 그런 계획 말이다.
"자, 그럼 손을 써 봐야겠지?"
그가 자신 앞에 있는 남자를 불렀고.
그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곧바로 위드 길드와 다시 접촉하고, 이 사실을 은근히. 아주 은근히 다른 명가 놈들 귀에 흘리도록."
박승균의 지시를 받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하하."
박명철에게 지난밤의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도 내 예상한 그대로 움직여 주는지.
마법 명가와 검술 명가의 결정을 내리고 있는 그 머저리들에게 선물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우….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립니다."
박명철이 자신의 심장 어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설마 명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우리를 불러들이다니."
마법 명가가 위드 길드에 다시 접촉해 온 이유는 바로 이거다.
명가들의 회동 자리.
그 자리에 위드 길드와 나를 초청한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놀랐다.
내 전생, 그러니까 지금 시점에서 수십 년 후에야 명가들의 대표자들 모임은 꽤나 빈번했다지만.
지금 이 시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심지어 상위 길드도 아닌, 위드 길드를 초청한다니.
이건 누가 보더라도 검은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건 뻔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포지션은 그동안과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요."
내 말 그대로다.
위드 길드는 나를 꽉 붙들고 있겠다는 의지만 표명하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마법 명가 쪽에서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그보다 어떤 속셈인 겁니까, 마법 명가는 대체."
"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도출했다.
"뻔합니다. 나를 이용해서 검술 명가를 잔뜩 놀려주겠다는 생각일 겁니다."
"……!"
박명철도 무언가 느꼈는지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검술 명가라면 눈에 불을 켜고라도 나를 영입하고 싶어 할 테고. 물론 다른 명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요."
"결국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겠다는 뜻이군요."
"맞습니다."
모든 명가들이 노리고 있는 나.
영입은커녕 만날 수도 없지만, 마법 명가에서는 한발 앞서 위드 길드를 접촉했고.
내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손을 써 놨다.
정보력 면에서도, 행동력 면에서도 다른 명가들에 앞서 있다고 보일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보일 뿐이고, 결국 놈들의 착각에 불과하지만.
"결국 답은 하나죠."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명가들의 머리 위에 놀고 있는 건 검술 명가도, 마법 명가도 아닌…."
"강민 씨군요."
박명철이 정확한 핵심을 짚었다.
"예."
"대단하시네요."
박명철이 말했다.
덤덤하긴 하지만, 나를 보는 눈빛이 꽤나 묘하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었다고. 상대는 명가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아요."
박명철의 눈빛이 사뭇 결연해졌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니 그 역시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명철 씨는 제가 부탁드리는 일만 잘 수행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 모든 계획은 위드 길드와 명철 씨가 없었으면 실행조차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나는 박명철을 격려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헛된 격려도 아니었고.
"그럼 탑을 오르는 건…."
"저는 앞으로 3일 뒤 바로 올라갈 생각입니다."
해밀턴이 약속했던 날.
회동이 이뤄지기 하루 전이다.
"예? 명가들의 회동에 같이 안 가실 겁니까?"
"갈 이유가 없죠. 지금 저의 신상을 그들에게 노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법 명가 쪽에서…."
"더 좋아하겠죠. 아예 나의 존재를 숨길 수 있을 테니까."
박명철이 혀를 내두른다.
"더 난리가 나겠군요."
"그렇겠죠."
검술 명가를 향한 마법 명가의 도발.
"그 후에 내가 27층의 실험실을 박살 낸다면….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아…."
박명철은 이마를 짚으며 짧은 탄식을 쏟아냈다.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됩니다. 앞으로 더 엄청난 일들을 함께하게 될 테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박명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몰른을 깨우기 위해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다음 날.
검술 명가의 본당.
"하하하하!"
검술 명가의 김준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이 사실이냐! 마법 명가와 다른 머저리들이 그대로 회동을 진행하겠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자존심도 없다고 하더냐. 그 자리를 좋다고 쫄래 쫄래 쫓아가는 꼴이라니.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을 꼴이구나! 크흐하하하!"
그 역시 지금 마법 명가에서 퍼트린 소문을 전해들은 참이었다.
로 진행하겠다는 그 소식 말이다.
"음흉한 벌레들 아니랄까 봐 잔대가리를 열심히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김준석은 조소했다.
하지만 당연히 김준석은 마법 명가의 속셈에 놀아 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정말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마법 명가 놈들이 다른 명가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어떤 흉계를 꾸밀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느냐. 어차피 버러지들이 모여 꿈틀댄다고 해 봐야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야."
오만함과 자신감.
그의 말에는 자신의 실력과 검술 명가에 대한 자부심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허나…."
그에게 소식을 전한 남자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한강민이라는 자가 참석하기로 했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한강민.
그 단어를 들은 순간 김준석의 눈매가 좁혀졌다.
"뭐? 한강민?"
그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패었다.
갑자기 속에서 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강민에 대한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중이다.
그렇게 강민을 자신 앞으로 데려오라고 말했건만, 결국 위드라는 애매한 길드에 가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까.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놈인지. 상판이라도 한 번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
이미 가주와 장로들 선에서 이번 회동은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 나지 않았던가.
무턱대고 그들의 결정을 뒤로하고 회동에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버님을 설득해야 할 것인데….'
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잠시 후 결정을 마친 김준석은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검술 명가의 가주, 김원호의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