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열쇠는 내 손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해밀턴의 잠겨진 마음의 문을 연 건 아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의 한 수가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다.'
만약 해밀턴이 역정을 내며 꺼지라고 욕지거리라도 내뱉는다면,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하겠지.
전생에도 한 번 눈 밖에 난 사람은 아무리 많은 돈을 갖다 바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걸… 어디에서 구한 거지?"
내 검을 들고 있는 해밀턴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검신에 요동치는 물결무늬를 눈에 담으려는 듯 조심스레 살폈고.
검 손잡이에 새겨진 특유의 문양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제대로 먹혔군.'
도박이긴 했다.
물론 확률 높은 도박이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성공인 것 같다.
"한 장인이 내게 만들어 준 검입니다."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아직은 감정을 담을 때가 아니다.
"당신에게 직접 만들어 줬다는 말…인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어디서!"
잠시 고민했다.
11층이라고 하면 어차피 모를 테니까.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작은 마을!"
해밀턴은 잔뜩 흥분했는지 입술마저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끼어들 이유도 없었고.
해밀턴이 감정을 추스르길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여기에서 괜히 나섰다가는 다 된 밥에 재 푸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철거덕
해밀턴이 내 검을 내려놨다.
"…주시오."
그가 아주 작게 무언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듣지 못했다.
되묻기보단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분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오."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 주는 대신 장비를 만들어 달라는, 그런 조건은 달지 않는다.
저 사람의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도록.
본심에서 우러나와야 내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결과물을 얻어 낼 수 있다.
꿀꺽
떨리는 목소리의 해밀턴이 침을 한번 넘겼고.
"그분을… 찾아 준다면. 아니, 살아 계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내 기꺼이 당신의 부탁을… 들어 주겠소."
어느새 해밀턴의 말투는 존칭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말하는 해밀턴의 목소리에는 깊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추스른 해밀턴이 나를 바라봤다.
"아까는 내가 실례했소. 내가 사회성이 많이 떨어지는지라."
"괜찮습니다."
"후…."
해밀턴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분은 나의 은사님이셨지."
은사라.
어느 정도 예측한 범위 안에 들어 있는 답변이다.
"대장장이가 되고 싶어 십 년을 그분의 공방을 오고갔고, 겨우 그분께서 나를 제자로 받아 주셨지."
말없이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렇게 5년. 그분 아래에서 기술을 연마했소. 허나 떠나셨소. 1년 전이었지."
"…."
떠난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말해 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모르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나셨으니까. 나는 좌절했소."
"…."
"내 실력이 부족해서 떠났다고 생각했지. 그때부터 문을 걸어 잠갔소. 내가 실력을 기르고, 훌륭한 대장장이가 된다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리라 생각하고. 그러니 그전까지는. 내가 그분의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목소리가 조금 격양됐지만, 다시 감정을 추슬렀다.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다짐한 거요. 그래서 그랬소. 미안하오. 하지만…."
꽈악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놀랐지만, 만류하지 않았다.
"부탁하오. 그분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시오."
해밀턴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층간 이동 아티팩트.
그것만 있으면 11층으로 가는 일 따위야.
지금 당장에라도 할 수 있다.
"당장 가시겠습니까?"
내 물음에 해밀턴은 조금 놀란 모양이다.
"자, 잠시…. 공방의 문을 닫을 시간만 주시오."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대장간 밖으로 나가서 해밀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그 무렵 검술 명가의 본당.
검술 명가의 가주와 장로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검술 명가의 유력 후기지수인 김준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하나다.
"…."
명가의 가주인 김원호.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편지 한 통 때문이었다.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편지가 어디에서부터 도착한 것인지는."
알다마다.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
편지 한가운데에 떡하니 찍혀있는 인장은 마법 명가의 인장이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마법 명가의 인장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없다.
"혹시 아는 것이 있느냐."
김원호가 김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정식으로 가문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건 아니지만.
검술 명가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건 명백히 김준석이었고.
현재 탑의 정황에 가장 밝은 것도 김준석이니까.
"…,"
김준석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가주와 장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모른다.
유력한 후기지수지만, 아직 장로들을 감당할 깜냥은 되지 못했다.
'…기어코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요즘 마법 명가를 뒤엎은 사건 때문이리라고 확신했다.
검술 명가의 짓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황상 검술 명가라고 추측할 만한 증거들이 많지 않던가.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는 일이다.'
김준석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흐음…."
김원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두꺼운 팔뚝의 근육이 꿈틀댔다.
"말해 보아라."
"…."
김준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정체 모를 플레이어의 마법 명가 습격.
그리고 정체 모를 플레이어의 능력이 자신들 검술 명가와 유사하다는 것도.
잠시 후 그의 설명이 끝이 났다.
"우리의 짓이 아닌 것은 확실하겠지?"
"당연합니다. 뭘 얻자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현재 우리 가문의 일대 사업은 탑 등반이라는 것은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김준석이 열변을 토했다.
김원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떤 내용이 담겨 있던가."
검술 명가의 장로 한 명이 물었다.
김원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전 명가의 회동을 요청했습니다."
"…."
"허어!"
김원호의 말에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무슨!"
"이것은 명백한 우리를 향한 도발이 아닌가!"
장로들이 분개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간의 역사 중 모든 명가가 모인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런 경우라면 탑의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한 일 말고는 없었다.
한 가문의 필요가 아니라, 모두의 필요가 겹쳐졌을 때에나 간신히 성사될 수 있는 만남이었다는 뜻.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마법 명가가 본인들의 피해를 추궁하기 위해 전 명가를 소집했다.
오로지 자신들의 필요로 인해서.
"기어코 놈들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어찌 잡기나 연마하는 마술쟁이들이 유수의 가문들을 소집하려 나선다는 말인가!"
장로들은 통탄을 금치 못했다.
검에 살고 검에 죽는 검수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란 신체를 단련하고, 검의 날을 갈고 닦는 것.
다른 육체 계열의 명가는 존중할지언정, 마법 명가는 그들에게 있어 하찮은 잡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거절하시게!"
"들을 가치도 없는 물음이야!"
장로들이 소리쳤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검술 명가의 가주가 답했다.
애당초 그 역시 마법 명가의 얼토당토않은 요청에 응할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까.
'건방진 것들. 제 주제도 모르고 나서다니.'
쫘아악-
가주는 마법 명가의 편지를 반으로 찢어 자신의 옆에 있는 촛불로 가져다 댔다.
화륵!
마법 명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
"…여기라는 말이오?"
해밀턴이 떨리는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봤다.
위드 길드에서 내게 줬던 층간 이동 아티팩트.
마침 두 명을 동시에 이동시킬 수 있는 아티팩트였으니.
나는 해밀턴과 함께 즉시 11층으로 이동했다.
"저기 보이는 저 작은 마을. 저곳에 그분이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저곳에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저 작은 마을에 자신의 공방을 차렸을 정도면 꽤 오래 머무르겠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가, 갑시다. 어서!"
해밀턴은 한시가 급한지 나를 재촉했다.
밤낮없이 쇠만 두드리던 해밀턴이 즉시 공방의 문을 닫았을 정도니.
자신의 은사라던 그 장인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큰지는 뻔한 일이다.
나와 해밀턴은 마을을 향해 걸었다.
굳이 마을 사람들과 마주칠 필요는 없으니 곧장 대장간이 있던 방향으로.
그렇게 십 분을 조금 넘게 걸었을 무렵.
먼 곳에서부터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깡! 깡! 깡!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지만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해밀턴의 쇠 두드리는 소리와 겹쳐졌다.
닮아 있었다.
풀썩
해밀턴이 무릎을 꿇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셔야죠."
내가 말했지만 해밀턴은 여전히 제 자리에 무릎 꿇고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지독한 사연이 있는 건 확실하다.
고작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해밀턴이 흐느낌을 멈추고 공방을 바라봤다.
눈을 감았다.
들려오는 소리는 바람 소리와 장인의 무두질 소리뿐이었지만.
해밀턴은 무두질 소리를 음악이라도 듣는 마냥 음미하고 있었다.
'….'
나는 그를 가만히 놔뒀다.
장인.
지금의 해밀턴을 장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훗날 그는 명백한 장인의 반열에 올라선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장비들은 가히 예술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저 안에 있는 노인도 마찬가지다.
탑의 시스템이 그를 장인이라고 공인하지 않았던가.
'나는 알 수 없는 세계.'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다지만, 저들이 펼쳐내는 오묘한 대장술의 세계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내가 해밀턴의 행동을 쉽사리 판단할 수는 없다.
지금 저 남자는 무언가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망치를 잡기 시작했던 이유.
오랜 세월을 보고 듣고 배우며 스스로를 담금질했을 저 망치 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더 먼 미래에 다가왔을 어떤 오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해밀턴의 어깨가 미약하게 들썩였다.
무두질 소리와 함께 그의 호흡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꿈틀댔고.
입으로는 무언가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해밀턴이 몸을 일으켰고.
나를 바라봤다.
"갑시다."
"음?"
"그대가 부탁한 장비를 만들어 주겠소."
"저분을 안 봐도 괜찮겠습니까."
"…나를 왜 떠나가셨는지…. 알 것 같소."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나야 아티팩으로 쉽게 오고 갈 수 있지만.
해밀턴에게는 결코 쉽지 않을 텐데.
"대신 하나만 부탁하겠소."
"말씀하십시오."
"먼 훗날. 내가 스승님께서 인정할 만한 경지에 올라섰을 때. 나의 검 하나를 스승님에게 가져다주시오. 그거면 되오."
그의 말에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 할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해밀턴의 말에는 앞으로도 나를 계속 보리라는 의도가 담겨 있으니까.
"어렵지 않은 부탁입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지금 나는 훗날 탑을 호령하게 될 위대한 대장장이를 내 편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