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박명철이 물었다.
"우선 27층에 있는 녀석들의 본거지를 칠 생각입니다. 그 전에 아이템도 좀 맞춰야 하고."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민희를 통해 전달 드렸던 대로 경비를 엄청나게 확충했습니다."
"걱정 없습니다."
나는 박명철 앞에 아다만티움 한 덩이를 꺼내 보여줬다.
"이건…."
잠시 눈매를 좁히는 박명철.
아무리 한 길드의 길드장이라고 하더라도 이 당시에 아다만티움은 극도로 희귀한 금속.
"설마…. 아, 아다만…."
먼저 알아 본 한동희가 눈을 부릅떴다.
"쉿."
나는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여기에서 아다만티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벌려 봐야 좋을 일은 없으니까.
"하…."
박명철은 탄식을 쏟아냈다.
"그렇죠. 아다만티움을 방어구에 섞는다면 마법 명가의 마법을 어느 정도 무력화 시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나는 그를 바라보며 그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당연하죠. 전신을 아다만티움으로 칠하고도 남을 만큼 가지고 있습니다. 미스릴도, 오리하르콘도."
"허…."
"아니 대체 무슨…."
"그 정도면 웬만한 거대 길드 1년 예산을 털어도 부족할 텐데."
세 사람이 동시에 감탄성을 터트린다.
"준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다만티움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박명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 길드장님이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요. 일은 잘하는데 사람이 쫌…."
김민희는 놀리는 투로 작게 중얼거렸고.
박명철의 시선을 느낀 김민희는 작게 혀를 내밀었다.
"아무튼 다들 오늘 하루 잘 마무리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골드를 올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시게요? 조금 더 드시지…."
김민희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과음은 좋지 않습니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
"아쉽군요."
박명철은 나를 붙잡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표정은 그도 어쩌지 못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몰른을 바라봤다.
"오호호호! 맥주우! 맥주를 가져다 주세요오오!"
잔뜩 취해 있다.
몰른은 조금 더 즐기게 놔둘 생각이다.
그동안 나를 쫓아오느라 고생했을 테니까.
"이 녀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골드를 조금 더 꺼냈다.
"그, 그만 주셔도…."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몸을 돌려 주점 밖으로 나왔다.
몇몇이 나를 알아보고 내 이름을 불렀지만 굳이 대꾸는 하지 않았다.
'대장간을 한번 가 봐야겠어.'
지금 시간이면 문을 닫았을 수도 있지만.
'그 노인네라면 또 모르니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깡! 깡! 깡!
지구의 시간으로 치자면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
그럼에도 대장간 안에서는 망치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대장간의 위치는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마을의 가장 외진 곳.
'쫓기고 쫓겨 여기까지 밀려났다고 했던가.'
독불장군에 남의 말 따위는 듣지 않는 고약한 대장장이.
덕분에 탑의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최악,
새벽 늦도록 망치질을 멈추지 않으니 주민들이 좋아할 리도 없었다.
덕분에 대장장이는 마을의 가장 외진 곳, 인적이 드문 이곳까지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실력이 알려지고 성공하고 나서도 이 자리를 버리지 않았지.'
그것만으로도 지독한 장인의 고집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 더 대단한 건, 저 똥고집을 이 젊은 시절부터 수십 년을 유지했다는 거겠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느낄 수밖에 없을 수많은 감정을 뒤로한 채.
자신의 모든 일생을 쇠질에 내던졌다는 뜻이다.
나는 대장간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다가갈수록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뚜렷하게 들려왔다.
규칙성은 없는듯 하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리듬이 존재했다.
'오늘은 이걸로 됐다.'
나는 몸을 돌렸다.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장사를 하는 시간도 아니다.
온전히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라는 뜻.
'방해할 수는 없지.'
대장장이를 만나는 건 내일 해도 된다.
***
그 무렵 21층.
그곳에선 아직도 강민을 찾기 위한 명가들의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었다.
"없어요! 진짜 없어! 벌써 21층을 수백 번은 돈 것 같은데…. 뒈진 거 아니야?"
"솔직히 이렇게 안 보이는 거면 뒈진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안 보일 수가 없어!"
명가 소속의 플레이어들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게 아닌 이상….'
강민이 21층에 올라선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상식상 아직 21층에 있는 게 정상이다.
'근데 왜 안 보여?'
죽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역대 최고의 속도로 11층에서 20층을 돌파한 플레이어.
대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그런 괴물이.
고작 21층에서 죽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은신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명가 소속의 플레이어 정도라면 은신 능력 정도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정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은신 감지 아티팩트 정도는 항상 구비하고 있기도 하고.
"아오!"
플레이어 한 명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겹다.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걸 대체 어찌 찾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을.
다시 21층을 수색하려고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야! 다 철수해!"
"돌아오랍니다! 개털이래요!"
"다들 돌아와!"
여기저기에서 소속 플레이어들을 부르는 외침이 들려왔다.
"뭔일이랍니까? 왜요? 누가 먼저 찾았어요?"
강민을 찾지 못한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혹시라도 다른 명가에서 강민을 먼저 찾은 것이라면.
'X됐다….'
돌아가서 다가올 후환이 얼마나 거대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 새끼 지금 마을에 있다잖아!"
21층에서 죽었다는 소리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날이 밝자마자 대장간으로 향했다.
한적했다.
아직 그 명성이 알려지기 전이었겠지.
이른 아침이었지만 여전히 안에서는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열심히 했으니 나중에 그런 실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겠지.'
나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는 한 남자가 열심히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벽면에 놓인 많은 검과 갑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훌륭해.'
당연히 내가 알던 그 노인의 솜씨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젊은 대장장이의 실력도 뛰어난 건 사실이었다.
대장장이는 내가 온 것도 모른 채 쇠를 두드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음?"
내가 말을 하고 나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는 대장장이는 목에 두르고 있던 천으로 얼굴을 적신 땀을 닦아냈다.
"뉘쇼."
대장장이의 한 마디에 실소를 터트렸다.
뉘쇼, 라니.
대장간에 찾아왔으면 당연히 손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텐데.
'얼마나 손님이 없는지는 안 봐도 뻔하군.'
"장비를 만들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일없소."
그러더니 다시 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
돈을 벌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해밀턴 씨 아닙니까."
해밀턴.
그게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소?"
"실력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고요."
"개소리를 들었군. 썩 나가쇼."
"…."
시작부터 저런 상스러운 말이라니.
하여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저 인간한테 장비를 한 번 맡기려면 이것보다 더한 욕은 몇 곱절로 들어야 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촤르르!
나는 인벤토리 안에서 미스릴, 아다만티움, 오리하르콘을 꺼내 늘어놨다.
그러자 그의 동공이 가늘게 흔들렸다.
"허…."
역시.
대장장이의 본능은 숨기질 못한다.
그의 얼굴에 진한 욕심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차피 그래 봐야 소용없소. 나는 안 할 거요. 아니, 못 해."
이게 무슨 반응일까.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당연히 나도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돈이라면 필요한 대로 주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나가쇼. 돈 같은 뭣도 아닌 걸로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한 거라면 단단히 착각했으니까."
그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돈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맡겨도 된다.
이 마을에는 해밀턴 말고도 다른 대장장이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남자가 최고다.'
타고난 재능.
그리고 재능을 갈고닦는 열정까지.
같은 재료도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던가.
'포기할 수는 없어.'
안 된다면 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해밀턴이 영원히 이렇게 살았다면 모르겠지만.
분명 미래에는 다른 이들의 장비를 만들었다.
'그렇다는 건 변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뜻이야.'
깡! 깡! 깡!
해밀턴은 다시 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쇠의 열기에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장비를 풀고 대장간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해밀턴은 내가 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쇠만 두드릴 뿐이었다.
깡! 깡! 깡!
나는 조용히 앉아 그가 쇠를 두드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청아한 쇠의 울림이 대장간 안을 가득 메웠고.
그 순간.
'음?'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리듬은 분명….'
들어 본 적 있다.
전생이 아니라, 빙의하고 난 다음에.
'어디서…?'
기억을 곱씹었다.
그 순간 뇌리를 번쩍, 하고 스쳐가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쇠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 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그 대장장이.'
11층에 올라가자마자 들렀던 작은 마을.
그 안에 있던 이름 모를 대장장이의 쇳소리다.
'하지만 소리만으로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내게 해밀턴을 움직이게 할 만한 열쇠가 생겨났을지도 모르겠다.
철걱
나는 철도를 집어 들었다.
바로 그 장인이 내게 만들어 줬던 철도다.
"…?"
해밀턴이 잔뜩 견제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망치를 꽈악 움켜잡는다.
다짜고짜 무기를 집어 드니 내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나는 검을 검집에서 천천히 뽑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놨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만약 맞다면.
그 장인이 해밀턴과 어떤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해밀턴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순간.
"…!"
해밀턴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됐다.'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