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역시 탑을 오르는 건 쉽지 않다.
그것도 나 혼자서 오르는 건 말할 것도 없다.
'24층.'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빡세다.
그동안 플레이어들도 몇 번 마주쳤다.
물론 전부 곧 죽어가는 몰골이거나 구석에 모여서 쉬고 있는 이들이었다.
아마 24층까지 올라온 이들이라면 어딜 가도 제 몫은 할 수 있는 이들일 것일 텐데도 쉽지 않은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정말 나는 옛날에 어떻게 여기를 헤쳐나갔던 거지.'
문득 전생에 내가 대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실 뭐.
기적이기도 했다.
능력도 없는 채로 악착같이 파티에 붙어 있어야 했으니까.
'말이 쉬운 거지.'
내가 얼마나 갖은 수모를 겪었는지는 직접 보지 않는다면 모를 거다.
능력을 가진 이들도 한 파티에 붙어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나같은 놈은 정말 가장 앞서서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버텨내야 했다.
파티에서 제 몫을 못 할 경우 쫓겨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게 바로 과거의 나였으니까.
'인생 역전이지.'
그랬던 내가 혼자 24층의 골렘을 쳐부수고 있다니.
눈물이라도 한번 쏟아 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이거만 잡으면….''
100마리.
25층으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이 충족된다는 뜻이다.
쿠르르릉!
[마력 2.1을 포식했습니다.]
[처치한 골렘 수 : 100/100]
[25층으로 진입하기 위한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됐다.
"오호호호! 25층으로 가요오!"
몰른이 소리쳤다.
펫이 되고 난 다음부터 몰른에게도 시스템이 생겨났는지 내게 보이는 메시지를 몰른도 보게 됐다.
"가자, 몰른."
망설이지 않고 다음 층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김민희 : 강민 씨.]
김민희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
[김민희 : 마법 명가쪽에서 다시 접촉해 왔어요.]
드디어 놈들이 미끼를 물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가 말했던 대로. 그대로만 하시면 아무 문제는 없을 테니까요.]
[김민희 : 예. 조금 이따가 연락드릴게요.]
[끝나고 25층 뒤 마을에서 잠시 봅시다.]
[김민희 : 예? 지금 몇 층…. 아, 아니지. 알겠습니다.]
메시지가 끝났고.
몰른을 바라봤다.
"몰른. 조금 더 달려야 될 것 같다. 할 수 있겠지?"
"예에에에! 당연하죠오!"
몰른이 외쳤다.
좋다.
조금만 더 힘 내 보자.
***
꿀꺽
박명철과 김민희, 그리고 한동희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건 마법 명가에서 보내 온 대리인이었으니까.
"반갑습니다. 전에 연락 드렸던 마법 명가 소속의 이명환이라고 합니다."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웃으며 박명철을 향해 인사했다.
"위드 길드의 길드장 박명철입니다."
"인상이 참 좋으시군요. 과연 훌륭한 길드를 이끌고 계시는 길드장다우십니다."
이명환이라는 남자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박명철을 띄워줬다.
'압박하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박명철이 생각했다.
그 역시 강민이 김민희와 한동희에게 했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상태다.
하지만 박명철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이명환에게 물었다.
"마법 명가에서 저희 길드를 찾았다니. 많이 놀랐습니다. 저희 길드가 과연 마법 명가를 만날 깜냥이나 되는지….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지 뭡니까."
'여유로워.'
'역시 길드장님.'
한동희와 김민희는 박명철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속내와는 전혀 다른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으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현재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 중 위드 길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요."
이명환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상위권 길드는 아니었지만, 나름 내실 좋은 길드로 유명했으니까.
"아뇨. 요새 저희 길드도 인원을 크게 감축했습니다. 제 역량이 부족했던 탓이죠."
박명철의 말에 이명환은 작게 미소 지었다.
불편한 기색은 아니다.
'간 떨어지겠네, 정말.'
'확실히 담이 커.'
여기에서 저 말을 내뱉을 줄이야.
하마터면 현재 위드 길드의 상황을 들켜 버릴지도 모를 한 마디였지만.
박명철의 뛰어난 연기에 이명환은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김민희와 한동희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 서로 인사치레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요."
이명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박명철을 쏘아본다.
하지만 박명철 역시 당황한 기색은 없다.
'괜찮네.'
그런 박명철을 보며 이명환도 상대에 대한 판단을 어느 정도 끝마쳤다.
'이런 녀석이라면 한강민이라는 플레이어를 꽉 잡아 놓을 수 있겠어.'
"좋습니다. 본론을 말씀해 주시죠."
박명철이 말했다.
그 순간 이명환이 입꼬리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한강민."
"…!"
박명철의 동공이 흔들렸다.
한발 뒤에 서 있는 김민희와 한동희에게도 박명철의 당혹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미친. 연기 봐.'
'대박.'
설마 이명환의 입에서 강민의 이야기가 나올 줄을 생각도 못 했다는 반응을 성공적으로 연기한 박명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강민 씨는…. 저희 길드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을 위해 인원을 감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박명철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이명환이 다음 말을 잇기도 전.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많은 명가들, 상위 길드에서 그 사람을 노린다는 것도요. 하지만 저희, 아니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그 사람을 잡을 겁니다."
박명철이 쐐기를 박았다.
그 말에 한동희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지. 이렇게 알아서 술술 뱉어 주면 나야 고맙지.'
이명환은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는 중이다.
이렇게 박명철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우선 한고비는 넘긴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이명환은 다시 한번 박명철을 쏘아보았다.
"제가 그 사람을 데리고 간다면요?"
"그…. 그건…."
박명철이 말을 더듬는다.
물론 이것 역시도 연기지만, 그의 연기는 완벽했다.
"아니죠. 안 돼.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박명철 씨."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이명환은 긴장을 풀었고.
그 찰나를 놓칠 박명철이 아니었다.
"혹시…."
"예?"
"저희가 붙잡고 있기를 원하는 겁니까?"
'헐.'
'와. 진짜….'
다시 한번 박명철의 솜씨에 감탄하는 한동희와 김민희.
그리고 이명환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알겠습니다. 왜 저희를 찾아오신 건지. 그리고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인지.'
박명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지루한 대화를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도와주십시오."
"…!"
그 한마디에 공기의 기류가 묘하게 뒤흔들렸다.
이명환이 눈을 번뜩였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명가로부터 한강민 씨를 지킬 힘이 없습니다."
"호오…."
"그러니까 도와주십시오. 강민 씨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걸 원하지 않는 것 아니십니까."
이명환이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박명철의 뻔뻔함과, 동시에 무모할 만큼의 저돌적인 그 모습에 내심 감탄도 될 정도다.
"얘기가 빠르겠네요."
이명환이 말했고.
박명철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당신들이 한강민을 붙잡을 수 있도록 우리 명가 쪽에서 자금을 지원하겠습니다."
"그, 그렇게까지는…. 저는 단지…."
"아뇨. 사실 이미 내부에서 결정된 사안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는데. 옳은 선택을 하셨군요."
당연히 이미 박승균과 이야기가 된 사항이었다.
순순히 따를 경우 돈을 지원하고.
고집을 부릴 경우에 그 자리에서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던 이명환이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그렇게까지 생각할 건 없습니다. 이건 일종의 거래니까.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한강민이라는 플레이어가 다른 명가. 특히나 검술 명가 쪽에 넘어간다면… 당신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는 사라지는 겁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깊은 사명감을 느낀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박명철.
그와 동시에 박명철은 생각했다.
'멍청한 놈들.'
그들이 지원하는 돈은 곧 그들을 향한 칼날이 되어 돌아갈 테니까.
***
[김민희 : 대박! 진짜 대박! 강민 씨가 말했던 그대로예요! 진짜로 대박!]
벌써 몇 번째 김민희는 메시지를 통해 잔뜩 들뜬 자신의 심경을 표출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잠깐만….]
안 그래도 속도를 높이고 있던 중인데 메시지가 자꾸 도착하니 나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김민희 : 미안해요. 진짜 너무 신기해서.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예측을 한 거예요?]
[민희 씨. 이따 봅시다.]
[김민희 : 아, 넵.]
내 말에 더 이상 김민희의 메시지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박명철을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희의 반응만 보더라도 내 예상 이상으로 잘 해줬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 보자. 앞으로 다섯 마리.'
25층에서 100마리를 잡는 데 걸린 시간은 두 시간 남짓.
경이적인 속도다.
물론 그만큼 나 스스로를 갈아 넣은 결과기도 했지만.
마침 저 앞에 골렘 다섯 마리가 모여있었다.
'간다.'
타앗!
몸을 날렸다.
[처치한 골렘 100/100]
[25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마을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됐다.
김민희는 지금 박명철과 한동희와 함께 마을에 있는 주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고생했다, 몰른. 가서 맥주나 한잔하자고."
"좋습니다요오오오!"
나와 몰른은 가뿐한 마음으로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여기요, 여기 강민 씨!"
내가 주점 안에 들어서자 저 먼 곳에서 김민희가 손을 흔들었다.
이미 세 사람은 잔뜩 취해 보였다.
이해한다.
큰일을 해치우고.
그것도 아주 잘.
기분이 좋을 테니 이런 날 잔뜩 취하는 것도 꽤 좋은 선택이다.
그런데 그 순간.
"어, 어? 강민? 한강민?"
"설마? 한강민 얘기하는 건가?"
"어디? 내가 아는 그 한강민이 맞는 거야?"
내 이름을 들은 사람들이 있는지 주점 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탑의 원주민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모여 있는 플레이어들은 바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긴 내 얼굴은 모를 테니까.'
이름은 알아도 나를 직접 본 사람은 여기에 없으리라.
아직까지는 나를 직접적으로 알아보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나는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며 세 사람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가 앉았다.
"강민 씨."
박명철이 내 이름을 불렀다.
입가에 미소가 떠 있었다.
나 역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건은요. 강민 씨가 다 한 것이나 다름없는걸요."
"그럴 리가. 내가 박명철 씨를 택한 걸 잘했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를 겁니다."
"고맙군요."
고맙다니.
저 사람 입장에선 내가 사지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다시 한번 박명철이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여전히 주변에서는 나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쉽사리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견제와 질투 혹은 동경이 담긴 시선들.
이제는 익숙해져야 한다.
"여기 맥주 한 잔 주십시오."
내가 점원을 바라보며 말했고.
"복잡한 이야기들은 잠깐 치워 두고. 축배를 먼저 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내가 말했다.
축하할 일은 확실히 축하해 줄 필요도 있으니까.